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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 모집하는 줄 알고…" 서명 한번에 빨갱이 꼬리표



사회 일반

    "해녀 모집하는 줄 알고…" 서명 한번에 빨갱이 꼬리표

    [제주4·3수형인]⑧오희춘 "연좌제 때문에 자식한테도 말 못해"

    제주4·3(1947.3~1954.9)으로 제주도민 3만 여명이 죽고 민간인 2500여명이 군사재판을 받았다. 이들 수형인들은 고문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죽거나 살아남은 자는 육체적·정신적 후유장애와 함께 억울한 삶을 살아왔다. 현재 신고된 수형 생존자는 33명. 이 가운데 18명이 지난 4월 19일 제주지방법원에 '4·3수형희생자 불법 군사재판 재심'을 청구했다. CBS 노컷뉴스는 이들 18명의 기구한 삶을 소개한다. 기사는 수형 생존자들의 삶을 이해하기 쉽도록 일부는 1인칭으로, 나머지는 인터뷰 형식을 취했다. 당시 나이는 수형인명부를 따랐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양근방(84·당시 16살): 1949년 7월 5일, 징역 7년(인천)
    2. 정기성(95·당시 27살): 1949년 7월 1일, 무기징역(마포)
    3. 박내은(86·당시 21살): 1948년 12월 28일, 징역 1년(전주)
    4. 오영종(87·당시 20살): 1949년 7월 3일, 징역 15년(대구)
    5. 조병태(88‧당시 18살): 1948년 12월 26일, 징역 1년(인천)
    6. 부원휴(88‧당시 18살): 1948년 12월 15일, 징역 1년(인천)
    7. 박동수(84‧당시 18살): 1949년 7월 5일, 징역 7년(인천)
    8. 오희춘(84‧당시 18살): 1948년 12월 10일, 징역 1년(전주)
    9. 김평국(87‧당시 18살): 1948년 12월 5일, 징역 1년(전주)
    10. 현우룡(94‧당시 26살): 1949년 7월 2일, 징역 15년(대구)
    11. 현창용(85‧당시 16살): 1948년 12월 9일, 징역 5년(인천)
    12. 한신화(95·당시 27살): 1948년 12월 28일, 징역 1년(전주)
    13. 김경인(85‧당시 18살): 1949년 7월 7일, 징역 1년(전주)
    14. 양일화(88‧당시 16살): 1948년 12월 27일, 징역 5년(인천)
    15. 오계춘(92‧당시 25살): 1948년 12월 26일, 징역 1년(전주)
    16. 임창의(96‧당시 27살): 1948년 12월 28일, 징역1년(전주)
    17. 김순화(84‧당시 17살): 1949년 7월 7일, 징역 1년(전주)
    18. 박순석(89‧당시 21살): 1949년 7월 7일, 징역 3년(전주)
    19. 재심청구 변호인단
    20. 제주 4‧3도민연대


    '서명'이 인생을 바꿨다. 다른 지방에서 물질을 하게 해주겠다는 동네 어른의 말을 듣고 백지에 이름 석 자 쓴 게 평생의 한이 됐다. 나중에야 그게 남로당 명부인 걸 알았다. 며칠 뒤 경찰에 잡혀가 수사를 받고 대전형무소로 옮겨졌다. 억울하게 1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해야 했다. '징역산 년'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붙었다. 창피해 동네에서 평생을 숨어 지냈다. 피지 못한 내 청춘 꽃봉오리. 되돌릴 수 없는 그 시절을, 이제야 세상에 꺼낸다.

    오희춘 할머니 (사진=문준영 기자)

     

    나는 오희춘이다. 1933년 서귀포시 하효동에서 9남매(6남3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농사를 지었고 아버지는 배를 탔다. 신효공립국민학교를 다닐 만큼 집안 형편은 괜찮았다. 일본인과 제주 출신 교사 밑에서 일본어를 배웠다.

    1942년 일본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싱가포르를 점령했을 때 일본기를 들고 행진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일본말로 '싱가포르 관악구 반사이 반사이(싱가포르 점령 만세)'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다. 해방의 꿈은 1945년, 내가 15살이 돼서야 이뤄졌다.

    해방 당시에는 모든 게 우리 세상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일본군이 공출한 식량을 보관하는 창고를 털어 배부르게 먹었다. 서귀포시 하효동 쇠소깍에는 일본군이 주둔하며 공출한 화목(땔감)이 가득했는데, 그것도 몰래 가져다 사용하기도 했다.

    해방과 동시에 5학년 2학기 학교를 그만두고 물질을 배웠다. 마을에서는 야학을 하며 한글을 공부했다. 아무 걱정 없던 사회였다. 하지만 미군이 제주에 들어오면서부터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동네에는 미군이 여자를 납치해 강간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동네 사람이 당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지만 여성들은 오일장 등에서 미군차가 지나가면 숨기 바빴다.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해방의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오희춘 할머니 (사진=문준영 기자)

     

    당장 먹고 살아야 했기에 열심히 물질을 배웠다. 2년 정도 경력이 쌓이자 상군이었던 어머니를 따라 바다에 나갔다. 해녀에도 등급이 있었는데, 상군이면 배를 타고 먼 바다에 나가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 만큼 얻는 게 많았다. 어머니를 보며 상군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물질에 푹 빠져 있던 1947년 무렵 동네에서 해녀를 모집하는 남성이 나타났다. 소개비를 받는 중간업자였다. 그는 육지에 가서 물질을 하게 해주겠다며 서명을 요구했다. 상군이 돼 먼 바다에 나가길 바랐던 나는 친구 김정추와 아무런 의심 없이 종이에 도장을 찍었다. 4·3의 고통이 내게 드리운 순간이다.

    1948년 10월, 시장에 나가 감자를 팔고 있을 때 동네 단장이라는 사람이 리사무소로 오라고 통보했다. 가보니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여자는 나와 정추 둘 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남자였다. 남로당에 서명을 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후 서귀포서로 옮겨졌다. 조사를 받고 나서야 예전에 해녀 모집 종이에 서명을 받은 사람이 남로당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오희춘 할머니 (사진=문준영 기자)

     

    고문은 없었다. 경찰이 나와 친구 김정추는 잠수해녀 모집자한테 속았다는 걸 인정해줬기 때문이다. 모집을 주도한 남성도 여자애들은 잘못이 없다고 경찰에 말해줬다. 우리는 유치장이 아닌 경찰서 통로에 앉아 지냈다. 남자는 남자 유치장에, 중한 죄 지은 여자는 여자 유치장에서 지냈다.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들은 우리처럼 통로에 있었다. 그때 공천포 여자도 있었는데, 미모가 뛰어나 서북청년단장이 빼갔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거기서 20여일 살고 제주시 관덕정에 있는 경찰서로 옮겨졌다.

    제주시에서 10일 정도 머물고 관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군인이 사람들을 10여명씩 줄 세워 이름을 불렀다. "오희춘 금고 1년". 어머니 품밖에 몰랐던 우리가 금고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나.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었다. 형무소로 보낸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나와 정추는 재판을 받고 사흘 뒤 제주항으로 보내졌다. 경찰은 손을 묶어 배 밑창에 우리를 가뒀다. 무서워 어디 가냐고 묻지도 못했다. 그렇게 전주형무소로 보내졌다.

    국가기록원에 보존 중인 제주4·3 수형인 명부에 따르면 오씨의 군법회의 재판 언도 날짜는 1948년 12월 10일로 기록돼 있다.

    추미애 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1999년 9월 15일 당시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발견한 4.3수형인 명부에 따르면 오희춘 할머니의 군법회의 판결 날짜는 1948년 12월 10일로 기록돼 있다. (사진=4.3수형인 명부, 문준영 기자)

     

    파란옷을 입고 감방생활을 시작했다. 우리 방에는 제주시 애월읍 김하윤, 김수열, 조천읍 김찬배, 아라리 부은선, 김선옥, 김영숙, 김정추, 나 이렇게 8명이 살았다. 밥 넣어주면 먹고, 일과 시간에는 죄수복을 재단했다. 목욕은 일주일에 한 번, 칫솔질은 소금으로 했다. 방에서는 사람들끼리 경찰에게 취조받은 이야기를 하며 지냈다. 전기 취조 받은 사람도 있었고, 천장에 메달아 매 맞고 온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10개월을 형무소에서 보냈다.

    형을 마치고 정추와 함께 제주에 내려왔다. 창피해서 몰래 집으로 갔다. 어머니와 서로 부둥켜 울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죽은 딸이 살아 돌아왔다며 기뻐했다.

    제주에 도착한 뒤에는 징역살이가 창피해 동네에서 숨어 지냈다. 어머니와 나는 수감생활에 대해 일언반구하지 않았다. 그때는 4·3관련자라고 하면 빨갱이로 매도했으니까. 그렇게 평생을 숨어 지내야 했다.

    오희춘 할머니 (사진=문준영 기자)

     

    이것이 내가 겪은 4·3이다. 자식들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 사연을 이제야 세상에 꺼낸다. 지금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내가 50살 때(1983년도)라도 지금처럼 이야기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피지 못한 내 청춘. 억울하게 흘러간 그 세월에 한이 맺힌다. 우리 수형인들의 통곡의 삶을, 국가가 재심을 통해 다시 살펴주길 간곡하게 부탁한다. 부탁드린다. {RELNEWS:right}

    '4‧3의 또 다른 아픔은 당시 사망·행방불명된 사람들의 무고한 희생이 당대에 그치지 않고 그 유가족들에게 대물림됐다. 4·3 와중에서 군·경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사법 처리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희생자 유가족들은 연좌제에 의해 감시당하고 사회 활동에 심한 제약을 받아왔다. 제주도민들과 희생자 유가족들은 법적 근거도 없는 연좌제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누리지 못하고 레드 콤플’스에 시달렸다.'(4.3아카이브-연좌제의 족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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