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배너 닫기

전체메뉴보기

빚은 형편껏 갚을 수 없는가



경제정책

    빚은 형편껏 갚을 수 없는가

    [채무불이행자문제 기획①]

    빚을 권하는 사회 풍토 속에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서민취약계층들이 과중한 빚으로 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민간영역에서 이들의 빚을 탕감해 주자는 운동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왜 이 운동이 펼쳐지고 있는지, 채무불이행자 문제에 대한 대책은 무엇인지를 두 차례로 나눠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빚은 형편껏 갚을 수 없는가
    2. '빚에서 빛으로' 가능한가

    "빚은 형편껏 갚아야 한다!"

    (사진=자료사진)

     

    우리나라에서 미국에서처럼 롤링 주빌리 운동(Rolling Jubilee)을 펴고 있는 주빌리 은행의 캐치프레이즈다.

    롤링 주빌리 운동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월가에서 시작된 운동이다.
    주빌리(Jubilee)
    구약성경에 나오는 '희년'(禧年,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에서는 50년마다 희년을 두고 희년이 되면 노예를 해방시켜주고 부채탕감과 함께 토지를 원소유자에게 돌려주도록 돼 있었다)을 뜻한다. 앞에 롤링(Rolling)이 붙은 것은 성금을 모아서 부채를 탕감해주고 부채를 탕감받은 사람들이 또 성금을 내는 방식으로 부채탕감운동이 계속 이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운동은 미국의 시민단체인 '월가를 점령하라'(OWS, Occupy Wall Street)가 2012년 11월부터 벌인 것으로, 시민들로부터 성금을 모아서 금융사들이 2차 채권시장에 헐값으로 매각하고 있는 장기연체채권으로 사들인 뒤 무상 소각했다.

    이 운동으로 지난해까지 모은 성금은 모두 67만 7,552달러(약 7억 1,481만원), 이 성금으로 사들여 소각한 채권은 1,473만 4,569달러(약 155억 4,497만원)였다. 그 결과 2,693명의 빚이 사라졌다.

     

    ◇ 한국판 롤링 주빌리 운동 : 3,400명의 빚 171억원 탕감

    우리나라에서는 지난해 초부터 사단법인 희망살림 등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한국판 롤링 주빌리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이 운동을 통해 지금까지 시민들로부터 모은 성금은 5천200여만원. 이 성금으로 샀거나 기부받아서 지금까지 10차례에 걸쳐 소각처리한 부실채권은 모두 171억원 어치나 된다. 그 결과 빚더미 속에서 고통을 겪던 3천400명의 채무자가 빚에서 풀려났다.

    지난 8월 27일에는 이 운동을 전담하기 위해 주빌리 은행이 출범했다.

    그동안 이 운동을 추진해온 시민단체와 지방자치단체가 주축이 돼 설립된 주빌리 은행은 은행법에 근거한 통상적인 은행은 아니다.

    장기연체된 부실채권을 사들여 채무자들의 빚을 탕감해 주기 위해 출범한 프로젝트 은행이라고 할 수 있다.

    주빌리 은행은 성금을 모아서 올해 안에 1000억원의 빚을 탕감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

    ◇ "빚 때문에 죽으려 하지 말고 빨리 도움 받으라"

    부실채권을 기부받거나 성금으로 사서 소각시키고는 있지만 주빌리은행이 모든 부실채권을 다 사들여서 소각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롤링 주빌리 운동을 시작하고 주빌리 은행을 태동시킨 주역인 제윤경 주빌리 은행 상임이사는 "채권을 확보해서 채무자 구제를 얼마나 할 수 있겠나. 이런 부실채권 소각을 통해 채무자에게 알리려고 하는 거다. '빚은 구제받을 수 있다. 빚 때문에 죽으려고 하지 말고 도망가려고 하지 말고 금융복지상담센터 등을 통해 빨리 도움 받으라'고 알리려고 한다"고 말했다.

    빚을 갚지 못하는 금융채무자가 빚 독촉에 시달려 가족과 함께 죽음으로 내몰리는 경우가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 1위의 불명예를 안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자살 이유의 첫번째가 경제문제라는 것은 적어도 이런 현실 타개의 시급성을 보여준다.

    (사진=스마트이미지 제공)

     

    ◇ "취약계층 채무불이행의 3, 40%는 사회·금융시스템의 책임"

    빚을 갚지 못하는 취약계층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2000년대 초 카드대란 이후 금융기관 간 신용회복지원협약에 따른 개인워크아웃 시스템이 가동되고 있는 것이나 현 정부 들어 국민행복기금을 통해 부실채권을 대량으로 사들여 대대적으로 채무조정에 나선 것이나 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들이다.

    개인회생제도와 파산면책제도도 갖춰져 한 해에도 수만명이 법원을 통해 정식으로 부채를 조정받거나 탕감받고 있다.

    그럼에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고 빚을 갚지 못하는 취약계층은 빚 독촉에 시달리다 못해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차적인 책임은 자신의 형편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과다한 빚을 낸 채무자들에게 있다.

    하지만 빚을 권하는 사회, 금융시스템도 책임을 면할 길은 없다.

    김기성 서울금융복지상담센터 금융복지상담위원은 "취약계층들이 채무를 불이행하게 된 원인의 3~40%는 바로 사회적인 시스템에 책임이 있다고 본다"고 피력했다.

    "신용도가 낮아 은행을 찾아갈 수 없는 사람들의 경우, 채무문제가 생겨 돈을 빌리려고 하면 검색하는 것이 인터넷이나 TV광고를 보게 되는데 그런 곳은 고금리 회사가 다 장악하고 있다. 첫발부터 그쪽으로 가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이곳에서는 중계시장이 발달돼 보험 가입할 때 보험설계사를 통하는 것처럼 대출중계인을 통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돈 빌리는 사람의 사정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대출을 많이 받게 해야 수수료를 많이 받는다. 중계인 입장에서는 천만원 필요한 사람에게 2천만원을 권한다. 이것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런 시스템 때문에 빚이 늘어나는 것을 현장에서 많이 본다"고 김기성 상담위원은 말했다.

    정부도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빚을 권하는 광고를 금하고 있지만 뒤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사진=스마트이미지 제공)

     

    ◇ "약탈적 대출은 자본주의 정신에도 어긋나는 것"

    금융기관이 돈을 빌리는 사람이 돈을 갚을 형편이 되는지는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돈을 빌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약탈적 대출이라고 할 수 있다.
    약탈적 대출(Predatory Lending)
    상환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높은 수수료를 물리는 등의 방법으로 채무자에게 손해를 끼치는 대출을 말한다. 채무자가 갚을 수 없는 줄 알면서도 돈을 빌려주는 이유는 최악의 경우 담보로 제공한 자산을 회수하면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담보자산 없이 과도하게 주어지는 신용 대출도 마찬가지다. 돈을 빌려줄 때는 까다롭지 않은 조건을 제시하며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대출금을 회수할 때는 혹독하게 다룬다는 게 약탈적 대출의 특징이다.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교수(주빌리 은행 공동은행장)는 "우리나라에서는 가혹한 채권추심이 가능하고 돈 빌려주고 난 뒤 못 갚으면 꼭 필요한 재산까지 다 뺏어갈 수 있고 주변까지 쥐어짜게 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런 구조를 갖고 있으면서,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갚을 능력과 관계없이 돈을 마구 빌려준다. '전화 한 통이면 다 빌려준다' 이것이야말로 약탈적 대출이다. 정상적인 시장거래가 아니고 경제적 강자가 약자를 약탈하기 위한 것이다. 자본주의 정신에도 어긋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채권기관, 소멸시효 지난 부실채권 대부업체에 5%의 헐값에 팔아"

    약탈적 대출은 금융기관이 채무자에게 손해를 끼치는 대출이니만큼 채무자 입장에서는
    빚을 무덤까지 가면서까지 기필코 갚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를 펼 수 있다.

    금융기관들이 장기 부실채권을 대부업체에 헐값에 팔아 넘기는 관행도 채무자들의 심리적인 압박감을 덜어줄 수 있다.

    제윤경 상임이사는 "채권기관들은 소멸시효가 지난 부실채권을 손실로 처리하고 대부업체에 헐값에 팔아 넘긴다. 예금보험공사나 자산관리공사와 같은 정부 기관도 마찬가지다. 빚 독촉에 시달리는 채무자들에게 팔아넘기는 가격을 얘기하면 다들 놀란다. 채권 값의 5% 정도만 받고 판다. 이들 채권의 채무자는 자신이 돈을 빌린 채권기관에 빚을 갚는 것이 아니다. 그런 만큼 빚을 갚는데 자신의 목숨을 걸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주빌리 은행이 "빚은 형편껏 갚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진=스마트이미지 제공)

     

    ◇ "빚은 형편껏 갚는다는 원칙은 법원의 개인파산, 회생제도의 밑바탕에도 깔려있다"

    "빚은 형편껏 갚는 것"이라는 주장은 금융 빚을 성실하게 갚는 대부분의 채무자들의 정서와는 맞지 않는 주장임에 틀림없다.

    이런 주장을, 빚을 성실하게 갚는 모든 채무자들에게까지 확산시키는 것은 채무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불러 일으킬 수 있고 더 나아가 자칫하면 자본주의 금융신용 시스템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땅한 소득이 없어 빚을 도무지 갚을 길 없는데도 불구하고 빚 독촉에 시달려 극한 상황으로 내몰리는 취약계층에게는 삶의 희망을 갖게 하는 메시지가 될 수 있다.

    무덤까지 가면서까지 빚을 갚아야 한다는 연좌맷돌 같은 무거운 책임감으로 묶기 보다는 빚은 자신의 형편 껏 갚으라는 권고가 이들에게는 한줄기 희망이 될 수 있다.

    사실 "빚은 형편껏 갚는 것"이라는 주장은 공적인 채무조정제도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원칙으로 표명은 안됐지만 법원의 개인파산이나 회생제도도 기실은 '빚은 형편껏 갚는다'는 원칙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파산은 있는 돈에서 빚을 다 청산하고 갚을 여력이 없다면 불이익을 다 없애주는 제도고, 개인회생제도는 소득 있는 사람이 5년간 최저생계비를 제외한 소득을 다 내면 빚을 탕감해주는 제도가 아니냐"고 오윤해 KDI 연구위원은 반문했다.

    빚을 갚을 수 없는 취약계층의 부채감면이나 탕감은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이득이다. {RELNEWS:right}

    이헌욱 법무법인 정명 대표변호사(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장)는 "채무자가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사회적으로도 좋을 게 없다. 전체 사회적으로는 그만큼 노동력이 상실되고 소비도 할 수 없다. 이들은 빚 갚는데 인생을 허비하게 된다. 빚을 갚을 수 있을 때는 열심히 갚도록 해야 하지만 빚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빚의 굴레에서 빨리 해방시켜서 새 출발하게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좋다. 시스템도 원활하게 돌아가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빚을 갚을 수 없는 취약계층이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찾도록 하고 사회에도 기여하도록 하기 위해 "빚은 형편껏 갚는 것"이라는 구호의 의미를 되새겨볼 만한 시점이다.

    이 시각 주요뉴스


    NOCUTBIZ

    오늘의 기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댓글

    투데이 핫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