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배너 닫기

전체메뉴보기

'잔혹 동시' 논란…통제와 규율 사회의 위험성



문화 일반

    '잔혹 동시' 논란…통제와 규율 사회의 위험성

    [칼럼] 강남순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

    강남순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

     

    통제와 규율 사회의 위험성: "잔혹 동시" 논란을 보며

    한 초등학생이 쓴 "학원 가기 싫은 날"이라는 제목의 시가, "잔혹 동시"라는 라벨이 붙여진 채 한국사회의 검열에 걸렸고, 그 시를 담은 시집을 출판한 출판사는 쏟아지는 비판을 견디다 못해 시집을 전부 수거하여 폐기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1. 나는 우선 이 "잔혹 동시"라는 라벨을 누가 어떠한 근거에서 붙였는지 모르지만, 이러한 라벨 붙이는 자체가 매우 폭력적인 그리고 식민적인 행위라고 본다. "폭력적"인 이유는 그 시를 쓴 아이에게 "너는 잔혹하고 비정상이야" 라는 정죄적 판단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실로 "자연화"함으로서 그 아이에게 치명적인 정신적·사회적 상처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외면적인 물리적 폭력에 의한 상처처럼 피가 나지 않았지만, 그 보다 더 훨씬 깊은 중증의 상처를 입힌 것이다. 그것도 한 두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이름으로 그 한 아이의 내면세계와 외면세계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 동시에 그러한 "잔혹 동시"라는 라벨은 이 땅에 "시적 상상력"으로 자신들이 겪고 있는 그 '비정상적' 인 삶을 넘어가고 싶어하는, 자신들만의 내적 세계를 꾸며감으로서 숨 쉴 공간을 가까스로 만들어내고 있을, 무수한 다른 아이들에게도 그 '시적 상상력'이 어른들과 사회의 '검증'에 통과되어야만 한다는 강력한 "폭력적 메시지"를 주는 것이다.

    2. 누가 '정상-비정상'을 규정하며, 어떠한 기준으로 그러한 '틀'들이 형성되는가. 어른들의 눈에 '비정상'인 아이들이 숨쉴 곳은 어디인가. 한국의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사적공간과 공적공간에서 어른들이 만들어낸 매우 '잔혹한' 교육제도와 갖가지 통제와 규율속에서 버티고 살아가고 있다. 만약 아이들을 갖가지 규율로 통제하는 것의 세계적 순위를 매기는 것이 있다면, 아마 한국은 첫번째 그룹에 들어갈 것이다.

    지독한 '비정상적' 세계속에서 살아가면서 "너무 아프다"고 시로서 표현하는 아이. '잔혹하고 비정상적인 세계'를 만들어낸 어른들이, 그 속에서 고통당하는 아이에게 "비정상"이고 "잔혹"하다고 한다. 한국에 있는 갖가지 종류의 무수한 학원들의 존재를, 그리고 아이들이 공교육을 받는 학교가 끝난 후에 이런 저런 학원이라는 또 다른 규율의 공간들에서 공부해야 하는 그 통제적 삶의 방식을 한국 사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도대체 설명할 방도가 없다.

    3. 나는 내 주변의 여러 아이들이 학교를 '감옥'으로 느끼며 감옥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았다. 내가 아는 한 아이는 '우리 학교'라는 주제를 가지고 그림 그리는 시간에, 도화지 전체에 창살이 있고, 그 창살안에 아이들이 그림자처럼 들어가 있는 그림을 그렸다.

    제출한 그림을 본 담임 선생님은 그 아이를 학교가 끝나고도 남으라고 했고, 그 아이에게 '우리 학교'라는 그림을 다시 그리라고 명령했다. 왜냐하면 '우리 학교'를 그렇게 감옥처럼 그리는 것은 '비정상적'이고 '못된' 생각이니까. 방과후에도 학교에 남아야 했던 그 아이는 빨리 집에 가고 싶어서 선생이 원하는 대로 '예쁜 그림' 을 다시 그려 제출하고 집에 늦게 돌아와야 했다.

    그 다음부터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 아이는 미술시간에는 늘 '예쁘게,' 그리고 매일 검열받는 일기장에는 '착한' 말만 써서 담임선생님에게 '잘했어요' 도장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 아이는 겉으로 드러내는 '보이는 자기'와, 속으로 자신만이 느끼는 '안보이는 자기' 사이의 거리가 점점 커지며, 마음 속 깊이 절망의 무게를 견디어 내야 했다.

    "예쁜 그림"과 "아름답기만한 글"을 써야만 "착한 아이"라고 칭찬해주지만 그러한 어른들이 만든 규율에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못되고 잔혹한 비정상적 아이"라고 꾸지람하는 사회속에서, 사실상 깊숙히 멍들어가는 무수한 아이들의 삶을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4. 시란 언제나 '사실적 세계 너머의 세계'를 그린다. 시를 단순한 '사실'로 읽고 해석하는 것처럼 시를 왜곡하는 것은 없다. 그것은 마치 '추상화'를 '정물화'로 착각하면서 엉뚱한 해석과 논의를 하는 것과 같다. 시의 저자가 '아이'라고 해서 '모든 어른' 들이 그들의 시적 세계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오류이다. 또한 시를 마치 '분명한 사실'을 확보한 것 처럼 '통제'하고 '잔혹' 이라는 '비정상의 표지' 를 붙이는 것은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식민화"이다.

    어른들의 마음을 심히 불편하게 한, 또는 다른 아이들이 읽고서 '나쁜 영향'을 받을수 있다고 생각되는 '잔혹 동시' 한 편이 들어가 있다며 이미 출판된 책을 전량회수하겠다고 결정한 것은 한국사회가 얼마나 강력한 통제와 규율 사회인지, 그리고 '어른들'은 아이 보호·사랑의 이름으로 얼마나 아이들을 식민화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다.

    '아이'는 '어른'과 마찬 가지로 다층적 욕구와 상충적 성향들을 모두 지니고 있는 '인간'이다. 어른들이 낭만화되고 단순화된 '아이'에 대한 표상을 절대화하면서, 정작 그 아이들도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그 모습 '전체'가 존중받아야 할 엄연한 한 '인간'임을 외면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 즉 인권도 처절히 외면되고 있다.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그 아이들의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는 그 부재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감지되지 못하고 있다.

    5. 나는 개인적으로 여타의 시에 '사실적 그림'을 곁들이는 것을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이 '학원가기 싫은 날'을 담은 시집에 대하여 내가 갖는 가장 커다란 아쉬움이다.

    '학원가기 싫은 날'이라는 시에 적나라한 사실적 그림을 덧붙인 것은, 아이들이 쓴 시라고 해서 하나의 그림으로 표현되는 '단순성'과 '사실성' 만이 담겨 있을 것이라고 보는 '어른'들의 다른 종류의 '계도성 시도' 라고 본다. 그 시에 아무리 '사실적 표현'이 담겨 있다고 해도, 한편의 시가 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하여는, '추상화'를 볼 때 요구되는 "다층적 상상력"이 요구된다.

    이 시각 주요뉴스


    Daum에서 노컷뉴스를 만나보세요!

    오늘의 기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댓글

    투데이 핫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