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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살에 역사의 횃불 밝힌, 안중근의사 104주년 기념식



국방/외교

    31살에 역사의 횃불 밝힌, 안중근의사 104주년 기념식

     

    안중근 의사는 26살에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31살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암흑같은 일제 치하에서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남을 횃불로 타올랐다.

    안중근의사 의거 104주년 기념식이 26일오전 10시 남산에 있는 안중근의사기념관 강당에서 열린다.

    안중근의사숭모회 주관으로 열린는 기념식에는 최완근 국가보훈처 차장, 독립운동관련 단체장, 광복회원, 시민, 학생 등 4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안중근 의사(1879~1910)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에서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인 일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알렸다.

    안중근의사 황해도 신천 사람으로, 1905년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26살의 나이에 중국 상해로 건너가 국권회복의 길을 찾아 나섰으며, 부친상을 당하고 돌아와서는 재산을 털어 삼흥(三興)학교,돈의(敦義)학교를 세워 인재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광무황제의 폐위, 군대의 해산 등 국권이 식민지 상태에 이르자 다시 해외로 나가 이범윤,김두성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1908년에는 의군장이 되어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함경북도로 진입하여 경흥, 회령 등지에서 대일항전을 펼쳤다.

    그 후 다시 노령의 블라디보스톡,연추 등지를 왕래하면서 동지들을 만나 구국의 길을 모색했고, 1909년 봄에는 김기열,백낙길,박근식 등 동지들과 함께 손가락을 잘라 단지동맹을 결성하며 일사보국을 맹세했다.

    그리고 1909년 9월 노령 블라디보스톡에서 일제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 등과 함께 거사 계획을 세웠으며, 의거 당일(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기다리다 9시경 기차에서 내려 러시아 군인들의 경례를 받으며 각국 영사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여 걸어가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총을 쏘아 3발을 모두 명중시켰다. 일본헌병이 그를 체포하려고 하자 하늘을 향해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크게 세 번 외쳤다.

    1909년 11월 러시아 헌병대에서 중국 여순(旅順)에 있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되어 심문과 재판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일본의 부당한 침략행위를 공박하며 시정을 요구했고, 조국의 완전 독립과 동양평화의 정착을 주장했다.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은 후 1910년 3월 26일 순국하셨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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