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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흔적에서 교훈으로]한국전쟁 예비검속 당시 희생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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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약


제주

    [4.3 흔적에서 교훈으로]한국전쟁 예비검속 당시 희생 유적지

    핵심요약

    제주에는 4.3유적지를 비롯해 수많은 다크투어 유적지가 존재한다. 제주는 대한민국의 대표 관광지이지만 제주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제대로 된 기억의 전승이 우선 필요하다. 제주CBS <시사매거진 제주>는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와 함께 제주에 존재하는 다크투어 유적지가 잘 보전되고 정확하게 안내가 되고 있는지 역사적 사건과 함께 짚어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방송은 매주 토요일 오후 5시 5분부터 방송되며, 노컷뉴스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비검속 당시 한림지역 주민들 어업창고에 구금
    예비검속자들 기준은 상당히 '자의적'…돈주면 풀려나기도
    섯알오름에서 희생…신원확인 쉽지 않아 만벵듸 공동장지에 안장
    1950년 8월…법원장, 검사장, 읍장, 변호사 등 지역유지들 군에 잡혀가

    만벵듸 공동장지 모습.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 제공만벵듸 공동장지 모습.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 제공
    ■ 방송 : CBS 라디오 <시사매거진 제주> FM 제주시 93.3MHz, 서귀포 90.9MHz (17:05~18:00)
    ■ 방송일시 : 2021년 8월 14일(토) 오후 5시 5분
    ■ 진행자 : 류도성 아나운서
    ■ 대담자 : (사)제주다크투어 양성주 대표
     
    ◇류도성> 오늘 소개해 주실 유적지는 어디인가요?
     
    ◆양성주> 지난 시간에 대정지역 4·3유적지인 섯알오름과 백조일손지묘에 대해 설명해 드렸었는데요.
     
    오늘은 한국전쟁 예비검속 당시 섯알오름 학살터에서 돌아가신 한림지역 희생자들이 묻혀있는 만벵디 공동장지와 당시 한림지역 주민들이 수감되어있던 한림항 어업창고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예비검속이 진행되던 시기에 제주지역사회를 공포 분위기로 몰았던 '유지사건'에 대해서도 얘기하고자 합니다.
     
    ◇류도성> 지난 시간에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 2개의 구덩이 중 한 구덩이에서 한림지역 주민들이 희생되었다고 말씀해 주셨었죠.
     
    ◆양성주> 그렇습니다. 1950년 음력 7월 7일 섯알오름에서 희생된 모슬포지역 예비검속자와 같은 날 다른 시간, 다른 구덩이에서 한림지역 예비검속자들이 학살되었습니다.
     
    저번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치안국장의 명의로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을 하달하고 6월 29일 자 공문으로 '보도연맹 및 기타 불순분자를 구속하라'는 명령에 따라 예비검속을 시행하게 됩니다.
     
    만벵듸 공동장지 모습.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 제공만벵듸 공동장지 모습.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 제공
     ◇류도성> 지난 시간부터 '예비검속'이 자주 언급되고 있는데요. 예비검속으로 인해 많은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되었잖아요.
     
    ◆양성주> 맞아요. 초토화 작전이 있었던 1948년 11월부터 1949년 2월까지 대부분의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는데요. 그 이후 무차별 학살이 줄어드는 듯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다시 전국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던 4·3연루자들과 예비검속으로 제주의 4개 경찰서별로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이 비밀리에 대량학살 되는 비극이 발생한 겁니다.
     
    일전에도 예비검속이 불법적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진실화해위원회 섯알오름 학살사건 기록에서도 어떤 법령이나 규정에 근거하지 않은 채 불법적으로 구금을 하였다고 결정하고 있습니다.
     
    ◇류도성> 그렇군요. 한림지역 주민들이 구금된 장소가 어업창고라고 하셨는데요.
     
    ◆양성주> 구금된 장소는 당시 한림어업창고였는데요. 창고의 위치는 현재 한림항 인근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숙박업소로 이용되고 있는 자리라고 합니다.
     
    당시 수감되었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수감 인원은 대략 50~60명 정도 됐다고 합니다. 수감된 사람들은 하루에서 길게는 두 달 동안 갇혀있기도 했고, 남녀 구분 없이 지냈다고 합니다.
     
    ◇류도성> 길게는 두 달이요? 수감된 사람들에게 음식 제공은 당연히 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양성주> 그렇습니다. 음식이 제공됐을 리는 없고요. 가족들이 몰래몰래 넣어주는 음식으로 끼니를 때웠다고 합니다. 공식적인 면회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창고 문을 통해 먼발치로 가족들의 얼굴만 확인할 뿐이었다고 합니다.
     
    ◇류도성> 수감되어 있던 주민들 중에 중간에 석방된 사람들 없이 모두 섯알오름으로 끌려가 학살당한 건가요?
     
    ◆양성주> 일부 수감자 중에 석방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돈을 주면 풀려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몇몇이 석방되고 난 후에 추가로 잡혀 온 사람들이 있는데 석방된 숫자만큼 무작위로 채워 놓은 게 아닌가, 추정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류도성> 수를 채우기 위해 또다시 무고한 주민들을 잡아들인 건가요?
     
    ◆양성주> 경찰은 학살 전날 8월 19일 아침, 어업창고에서 50여 명을 호명한 뒤 오후 늦게 수감자들을 트럭에 태우고 모슬포로 떠났습니다.
     
    수감자들을 싣고 가던 트럭은 대정면에 있던 무릉지서에 잠깐 정차해서 9명을 추가로 태우고 갔다고 합니다. 이 내용에서 토벌대가 모자란 수를 채우기 위해 무릉지서에 들린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하는 분들이 있는 겁니다.
     
    만벵듸 공동장지 모습.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 제공만벵듸 공동장지 모습.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 제공
     ◇류도성> 그렇군요. 위에서 석방된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어떤 기준이 있었던 건가요?
     
    ◆양성주> 당시 예비검속자들을 D,C,B,A의 4등급으로 분류했었는데요. D등급은 아주 중요한 자, C등급은 중요한 자, B등급은 사소한 자, A등급은 애매한 자로 나누었고, B,A급은 석방 또는 계속 구금, D,C급은 1950년 7월 16일, 8월 20일 두 차례에 걸쳐 해병대 당국에 송치한 뒤 총살했습니다.
     
    ◇류도성> 어떤 원칙에 의해 분류를 한 건가요?
     
    ◆양성주> 진실화해위원회 섯알오름사건 내용을 보면 희생자 본인이나 가족, 동료들이 4·3과 관련된 경우에 구금되었지만 전부 그런 것은 아니고 경찰의 개인적 미움을 받아서 희생된 경우도 있다고 결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 범죄 동향을 기록해 놓은 것을 보면 내용이 매우 자의적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만일의 경우에 폭동을 야기할 우려 농후함', 또는 '협력하는 태도이나 주거지역으로 보아 만일의 염려', '제반사 협력하는 듯하나 동향 극히 애매함' 등으로 기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비검속으로 구금된 사람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죽어갔다고 주장할 만한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류도성> 지난 시간에 말씀해 주셨던 예비검속자 총 344명 중 252명이 D, C등급으로 분류되었던 거군요.
     
    ◆양성주> 그렇습니다. 일부는 석방되었지만, 대부분은 총살당했습니다. 희생자들은 한림지서 관할 한림항 어업창고에 수감되었던 사람들과 모슬포경찰서 대정지서 관할 절간고구마 창고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7월 16일 1차로 20명이 섯알오름에서 총살당하고, 한 달 뒤 8월 20일에 191명이 섯알오름에서 총살당합니다. 나머지 희생자들은 어디서 사망했는지 알지 못하다가 정뜨르 비행장에서 학살된 것으로 DNA 조사를 통해 밝혀졌습니다.
     
    ◇류도성> 그렇군요. 예비검속으로 어떤 사람들이 잡혀 왔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어요?
     
    ◆양성주> 예비검속으로 희생된 사람들 대부분은 제주4·3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일본에서 유학한 지식인층과 공무원, 이장 등 4·3과 무관한 지역사회 지도층이 일부 포함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예비검속 희생자의 연령별 분포를 보면, 20~30대가 70~80%를 차지할 정도로 4·3의 영향으로 당시 가장 활동적인 청년세대가 예비검속의 주요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성별 분포를 보면, 남성이 90% 이상으로 희생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4·3관련자 중 살아남은 사람을 포함한 일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제거를 구체화했다고 지적하면서 가해의 의도성과 계획성을 엿볼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류도성> 그렇군요. 지난 시간 말씀해 주신 것에 따르면, 1950년 음력 7월 7일 한림지역 주민들이 먼저 총살당했다고요?
     
    ◆양성주> 그렇습니다. 같은 날 새벽 2시경에 한림지역 주민들이 먼저 총살당합니다. 전해져오는 증언에 따르면, 백조일손 희생자들이 타고 있던 트럭이 중간에 고장 나는 바람에 한림지역 희생자들보다 학살 시간이 늦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류도성> 자신의 가족들이 섯알오름으로 끌려가 총살당했지만, 유족들이 그 시신을 바로 수습할 수 없었다고 말씀해 주셨었는데요.
     
    ◆양성주> 유족들은 사건 발생 당일부터 유해를 수습하려고 했으나, 군·경의 방해로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56년 3월 한림지역 유족들이 시신 수습을 위해 사전 답사를 미리 마치고 유해수습을 준비합니다.
     
    ◇류도성> 한림지역 유해 발굴은 비밀리 이루어진 건가요?
     
    A. 한림항 어업창고 희생자 유족들은 1956년 3월 30일 칠성판, 광목, 가마니 등을 준비하고 새벽 2~3시경에 섯알오름에 가서 유해 62구를 수습했습니다. 유족들은 이를 위해 각자 회비를 걷어서 운구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했고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 회비를 더 걷었다고 합니다.
     
    수 년이 지난 뒤 찾아간 학살 현장에는 많은 유골들이 뒤엉켜 있어 신원 확인이 쉽지 않았습니다. 희생자의 머리 모양, 치아, 옷과 같은 유품으로 일부의 시신을 구별했습니다.
     
    ◇류도성> 한림지역 희생자들 또한 신원 확인이 쉽지 않았군요.
     
    ◆양성주> 그렇습니다. 신원 확인이 쉽지 않아 유골의 머리 모양이나 치아, 유품 등으로 '추측'하여 시신을 구분한 유족들이 대부분입니다. 반면에, 자신의 가족 유골임을 확신한 분도 계셨습니다.
     
    당시 유해 발굴 현장에 계셨던 양병익 어르신 자신의 아버지께서 예비검속되시고 나서 한 10일 정도 지나서 한림항 어업창고에 면회를 가셨다고 합니다. 그때 당시 무더운 여름이었고, 모기가 많아 수감생활이 힘드신 아버지를 위해 고무베개 안에 얼음을 가득 넣어 아버지께 드리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한 10일 정도 후에 꿈에 나타나셔서 자신의 시신이 어디에 묻혀 있으며, 시신을 얼른 찾아서 안장시켜달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3개월 후에 꿈을 꿨고, 또 3개월 후에 똑같은 꿈을 꾸셨다고 합니다.
     
    만벵듸 공동장지 모습.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 제공만벵듸 공동장지 모습.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 제공
     ◇류도성> 아버지께서 꿈속에서 자신의 시신이 묻혀있다고 한 곳에 실제로 시신이 발견된 건가요?
     
    ◆양성주> 양병익 어르신은 똑같은 내용의 꿈을 연거푸 꾸니까 이게 아버지의 영혼이라고 확신하셨다고 합니다. 실제로 수년이 흐른 뒤 시신 수습 현장에서 발견된 아버지의 시신과 아버지가 꿈에 나타난 지경하고 거의 일치했다고 합니다. 수감되셨을 때 사용하셨던 고무베개가 발견되었고 고무베개 안에는 아버지의 명함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로 그대로 있었다고 합니다.
     
    ◇류도성> 그렇군요. 신원이 확실히 밝혀진 시신들은 만벵디 공동장지에 묻지 않았겠네요?
     
    ◆양성주> 양병익 어르신은 아버지 유골을 모시고 고향으로 가서 어머니하고 쌍묘로 고향에 모셨다고 하셨습니다. 시신 수습 현장에서 일부의 시신을 구분한 나머지 유족들은 유족 중 한 분이 무상으로 내놓은 부지인 지금의 만벵디 공동장지에 시신들을 안장했다고 합니다.
     
    당시는 묘지를 구입할 돈도 없었고, 사회적 분위기도 좋지 않아 희생자의 시신을 멀리하려고 할 때였지만, 유족 중 한 분이 땅을 쾌척해 주셔서 시신들을 안장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류도성> 현재 이 묘지에는 몇 위가 안장된 건가요?
     
    ◆양성주> 현재 이 묘지에는 62위 희생자 중 현재는 46위가 모셔져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한 유족이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개인묘지로 이장을 해서 현재는 45위가 묻혀있다고 합니다.
     
    ◇류도성> 백조일손유족회와는 별도로 유족회가 결성된 건가요?
     
    ◆양성주> 한림지역 예비검속 희생자 유족들은 1956년 3월에 이곳으로 이장을 하긴 했지만 별다른 활동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1999년 10월 되어서야 만벵디유족회를 발족하고 2001년 되어서야 비로소 위령제를 지내게 됩니다.
     
    반세기가 지나서야 처음 위령제를 지내게 된 유족들은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후 매년 음력 7월 7일 만벵디 공동장지에서 위령제를 봉행하다가 2008년부터는 섯알오름학살터에서 백조일손유족회와 합동위령제를 지냈었습니다.
     
    그러다가 2016년부터 다시 백조일손유족회와 분리해서 현재 만벵디 공동묘역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류도성> 그리고 오늘 유지사건에 대해서도 소개해 주신다고 하셨죠?
     
    ◆양성주> 1950년 8월 초에 제주지역 법원장, 검사장, 제주읍장, 변호사 등 16명의 지역 '유지'들이 군에 잡혀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류도성> 왜요? 아무리 전쟁 중이라고 하지만 제주지역 최고의 권력기관장들이 한꺼번에 잡혀가는 건 보통 일이 아니잖아요?
     
    ◆양성주> 이들은 '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계엄사령부에 연행되는데요. 제주해병대 신인철 대위 등이 수사한 내용에 따르면 1950년 7월 10일 제주도 총무국장인 홍순원의 집에서 비밀집회를 열어 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 및 가입금을 받고 군·경·관 요인 암살대를 조직하고 암살자를 선정했다는 내용입니다.
     
    한림항 어업창고 옛터 현재 모습.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 제공한림항 어업창고 옛터 현재 모습.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 제공
    ◇류도성> 잡혀간 사람들은 어떻게 됐나요?
     
    ◆양성주> 구금된 후에 자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물고문, 곤봉 구타, 총살 위협 등을 가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8월 14일에 고문을 받던 장용문이 사망하게 됩니다.
     
    ◇류도성> 고문을 받다가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군요?
     
    ◆양성주> 이 사건에 대해서는 미국 측에서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제주지역사회를 대표하는 법원장, 검사장, 제주읍장이 구속되자 당시 김충희 도지사가 이 사건이 특정인을 구속하기 위한 모함으로 보고, 신성모 국방장관과 조병옥 내무부장관에게 진정서를 보냅니다.
     
    ◇류도성> 인민군환영대회를 준비한 게 사실이 아니었던 건가요?
     
    ◆양성주> 군경합동수사대의 수사 결과 소위 제주도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는 실재하지 않는 조작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사건은 신인철 대위가 7월 27일 발생한 '불온삐라 살포 사건' 피의자로 검속된 최남식으로부터 인민투쟁위원회 조직 사실을 허위 자백을 받고, 유지급 인사들의 이름을 유도 신문하여 사건을 조작했던 것입니다.
     
    ◇류도성> 제주지역 분위기가 아주 싸늘했겠는데요?
     
    ◆양성주> 신인철 대위가 조작한 것이 밝혀지면서 신인철 대위 등은 구속이 되고 지역 유지들은 풀려났지만 이미 고문을 받다가 한 사람이 사망하기도 했고, 김재천 제주지방법원장은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착란을 일으켜 일찍 사망하게 됩니다.
     
    제주도민들은 제주지역 최고의 권력자들도 계엄군에 의해서 구속되고 죽음에 처한 사태를 직접 보게 된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예비검속에 대한 총살집행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1950년 8월의 제주지역 분위기는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던 거죠.
     
    ◇류도성> 유지사건에 대해서 잘 들었습니다. 앞서 설명해주신 한림항 어업창고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나요?
     
    ◆양성주>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으로 분류된 한림지역 거주 민간인 수십 명이 수감되었던 장소이지만, 현재는 흔적이 남아있지 않고 식당과 숙박업소가 있는 3층 건물이 세워져 있습니다. 당시 희생자들이 수감되어 있다가 학살터로 끌려간 장소로 역사적 의의가 크지만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는 안내판이 없습니다.
     
    섯알오름이나 만벵듸 공동장지 등 당시 이곳에 갇혀있다 희생된 사람들의 경로를 따라갈 수 있는 유적지들이 조성 및 보존되어 있는 만큼, 한림항 어업창고 옛터도 방문객들이 이를 맥락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관련 내용이 구성된 안내판 설치가 필요해 보입니다.
     
    안내판을 설치할 경우 휠체어 접근성을 보장하고, 시각장애인 등을 위한 음성변환용코드나 점자 안내판 설치도 해야 합니다.
     
    ◇류도성> 만벵듸 공동장지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나요?
     
    ◆양성주> 안내판이 세워져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만벵듸 공동장지 입구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과 내부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의 내용이 서로 상이합니다. 입구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에는 '62명이 희생됐고 46명이 장지에 안장되었다'고 기재되었으나, 공동장지 안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에는 '61명이 영면'하고 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정확한 정보를 확인 후 기재할 필요가 있겠고요. 시각장애인 등을 위한 음성변환용코드나 점자 안내판을 추가로 설치하고 외국인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외국어 안내판을 추가로 설치해야 합니다.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 양성주 대표. 제주다크투어 제공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 양성주 대표. 제주다크투어 제공
    만벵디 – 강덕환
    그대, 기억하는가 섯알오름
    듣도 보도 못한 골짜기
    모진 광풍에 스러지던 칠석날 새벽
     
    부모형제 임종 지키지 못한 불효
    천년을 가도 지워지지 않는다는데
    뼈마디 하나 겨우 추스른 주름진 세월
     
    몇 번이나 새로 돋았을까 저 풀들
    시퍼렇게 날 세우고, 진초록 물결로
    그 새벽 이슬길 몇 번이나 밟아왔을까
     
    옷은 얻어서 옷이고
    밥은 빌어서 밥인데
    얻지도 빌지도 못한 혼백
    견우별, 직녀별로 피어올라
    인연의 질긴 끈 놓지 못하는 사이
    기다림에 지쳐
    살과 뼈는 흙으로 돌아가고
    체온은 햇볕에게 보태어
    야만의 땅엔 날줄과 씨줄로 곱게 엮은
    저토록 고운 벌판인데
    가진 것 비록 없어도
    더불어 나누는 넉넉함으로
    평화의 불씨 당겨 점화하오니
    애원의 향으로 타오르십서.
    상생의 촛농으로 흘러 내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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