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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이 피하려고 했던 것, 낙인찍기와 선 긋기



영화

    '이태원'이 피하려고 했던 것, 낙인찍기와 선 긋기

    [노컷 인터뷰] 다큐멘터리 '이태원' 강유가람 감독&김혜정 프로듀서 ②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 KT&G 상상마당 시네마에서 다큐멘터리 '이태원'의 강유가람 감독과 김혜정 PD를 만났다. (사진=황진환 기자)

     

    용산 미군기지에 인접한 기지촌으로 성장해 온 이태원. 오랫동안 이태원에 살면서 동네의 변화를 온몸으로 겪어낸 세 여성 삼숙-나키-영화에게 카메라를 대려고 했을 때, 강유가람 감독이 예상한 서사가 있었다. '기지촌 여성'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며 피해자성이 강조되지 않을까 예측했지만, 아니었다.

    지난 5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이태원'(감독 강유가람)에 나오는 여성들은 자신을 낮추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태원에서 보낸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매사에 감사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미군들이 드나드는 클럽을 운영한다고 해서, 혹은 미군에게 성을 파는 일을 했다고 해서 자신을 부정하거나 지우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강유가람 감독은 '이태원'을 찍으면서 등장인물들을 향해 섣불리 낙인찍지 않으려고 애썼다. 또 '우리'와 '그들'이라는 이분법적인 선 긋기도 피하려고 했다. 자기 삶을 인정하고 긍정하는 세 여성의 이야기는 가감 없이 전달됐고, 관객은 각자의 역사를 지닌 '이태원 주민' 셋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갈 수 있었다.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KT&G 상상마당 시네마에서 '이태원' 강유가람 감독과 김혜정 PD를 만났다. '이태원' 오프닝 장면의 탄생 배경과 촬영하며 들었던 인상적인 이야기를 물었다. 또한 예측할 수도 없고 도무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서 힘들지만, 동시에 그 점이 재미있는 '다큐멘터리'를 계속하겠다는 그들의 다음 작품 계획도 들었다.

    ◇ 이태원 오프닝 시퀀스는 '우연'

    파란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과 독특한 앞머리가 눈에 띄는 나키는 거리에 앉아 있다. 방역차가 지나가고 뿌연 연기로 화면도 뿌옇게 변한다. 그때 나키는 누가 부르기라도 한 듯 벌떡 일어선다. 제목 '이태원'이라는 글씨가 나타난다.

    '이태원'의 이 오프닝 시퀀스는 메르스 사태 때 방역차가 돌아다닐 때 우연히 잡은 장면이다. 평소 동네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장소에 앉아 있던 나키가 일어선 것 역시 연출이 아니었다. 강유가람 감독은 "탁 앉았다가 일어나서 얼굴이 나오며 등장하는 게 너무 강렬해서 이걸 어떻게 할까 싶었다"라며 "한국사회가 뭔가 여성을 소거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나키가) 그래도 튀어나오려고 하는 것 같아서 그 이미지가 좋았다"라고 설명했다. 오프닝이 좋았다고 얘기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김혜정 PD는 주의 깊게 봐야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을 귀띔하기도 했다. 그는 "(방역차 연기 때문에) 주변에 '성인용품'이라는 글자만 남는다. 그게 되게 이태원답다고 생각했다, 여러 가지로. 안개 속에 묻혀서 모든 사물이 모호해 보이는 때, 그 안에 어떤 존재가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성인용품)만 남았으니까"라고 설명했다.

    촬영 시기가 지금보다 이태원이 더 '힙했던' 2014년이었기에 겪은 예상 밖의 일도 있다. 바로 '할로윈'이었다. 서양에서 유래된 할로윈 문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이들은 이태원으로 모였다. 상상을 뛰어넘는 인파에 제작진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김혜정 PD는 한강진역까지 걸어갔는데도 택시가 안 잡혀서 심야 버스 타고 귀가한 일화를 들려줬다. 강유가람 감독은 사무실 근처가 평소 한적했는데, 맞은편에 귀신의 집이 생겨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고 전했다.

    "정말 정해지지 않는 길로 가는 게 (다큐멘터리의) 힘든 점이자 매력인 것 같아요. (웃음) 예측 불가능성이 있어서 거기서 얻는 깨달음이 굉장히 커요. 다큐멘터리도 구성안, 시나리오 다 쓰는데 이렇게 가면 다 잘될 것 같다는 거로 시작하거든요. 근데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요. (웃음)" _ 강유가람 감독

    "한 번도 제대로 된 적이 없는! (웃음)" _ 김혜정 PD

    '이태원'은 30년이 넘도록 격동의 이태원에서 살아온 삼숙, 나키, 영화 세 여성의 목소리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왼쪽부터 삼숙, 나키, 영화 (사진=KT&G 상상마당 제공)

     

    ◇ 처음엔 피해자 서사를 예상했으나…

    세 명의 서로 다른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태원'은 자연스럽게 이들의 굴곡진 삶을 드러낸다. 한 인물에서 다른 인물로 넘어가고, 이야기가 자주 교차되지만 산만하거나 혼란스럽지 않다. 편집 포인트가 궁금했다.

    강유가람 감독은 "하나의 서사로 다가가야 했다. 이분들의 일상을 보여주되 과거의 역사와 현재를 조화롭게 보여줘야 했고. 그 처음 축을 저는 재개발이나 이런 시간의 흐름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조금씩 동네가 변화해가는 것에 따라 여성들의 일상이 펼쳐지는 방식으로. 그땐 되게 급격히 (변화) 될 것 같은데 생각보다 천천히 됐다. 이해관계가 물려 있어서 느리더라. 또, 할로윈이나 축제가 있을 때와 조용한 일상을 대비하면서 (이태원이)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라고 밝혔다.

    기지촌에서 살며 일했고, 지금도 산다는 건 이들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그래서 삼숙-나키-영화는 '피해자'로 그려지지 않는다. 강유가람 감독은 "구조적인 피해자인 건 분명하지만, 그분들을 어떻게 보는지는 사회적 시선이 영향을 많이 주는 것 같다"라고 운을 뗐다.

    "자기 인생을 표현하는 걸 동정하지 않고 낙인찍지도 않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구체적인 피해 서사를 얘기하지 않아서 그렇지, (상처받는 경험이) 많았을 것 같아요. 세 분의 말 안에 한국사회에 대한 비판이 담겼죠. 역설적으로 얼마나 낙인을 찍으면 저렇게 얘기할까 싶었어요. 삼숙 사장님이 남편(백인)이랑 다시는 같이 안 다닌다고 하잖아요. 근데 이태원이라는 공간에 그런 역사가 있었는지 잘 모르잖아요. 그것도 이분들의 삶을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났으면 좋겠어요. 저희도 많이 놀랐지만, 뭔가 도와줘야 한다는 느낌보다는 우리를 돌아보는 방식으로 이 이야기를 풀어가고 싶었어요." _ 강유가람 감독

    "기지촌 여성 하면 딱 선이 그어지는 것 같아요. 우리가 있고 그들이 있는 거죠. 다른 존재, 낯선 존재, 사회적 낙인을 찍은 존재. 그런 거리감이 있는데 이번에 이태원에 왔다 갔다 하면서는 그냥 정말 이웃이구나, 하게 됐어요. 일상생활을 하면서 지나치는 사람들인 거예요. 우리 주변 이웃들이 본인 각자의 역사가 있듯, 이분들도 그런 역사를 갖고 사는 분들이죠. 선 긋기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전에는 있는지조차 몰랐던 선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어요." _ 김혜정 PD

    강유가람 감독은 "저도 처음에 그 거리(이태원)에 갔을 때 너무 무서웠는데 점점 왔다 갔다 하면서 그 무서움의 원인은 나였다는 걸 알았다. 어떤 일에 종사했다고 해서 그 정체성만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양육자, 생계 부양자, 주민, 옆집 친구 등 그런 것들이 좀 알려져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한 번 그런 정체성을 가졌다고 너무 낙인찍는 게 심하니 잃는 게 굉장히 많아졌던 것 같다"라고 부연했다.

    세 여성이 들려준 다양한 이야기 중 가장 안타까웠던 게 무엇이냐고 질문했다. 강유가람 감독은 "삼숙 님은 딱 봐도 명철하고 말씀도 잘하시지만,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고 계속 가족을 건사해야 하는 생계 부양자로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게 마음이 안 좋았다. 나키와 영화 님은 이태원이 융성하던 시기에 되게 열심히 일했던 것 같은데, (동네를) 흥하게 했던 돈들이 여성들한테 남지 않고 주변화되는 것. 그게 제일 안타까웠다"라고 답했다.

    '이태원' 스틸 (사진=KT&G 상상마당 제공)

     

    김혜정 PD는 영화가 들려준 미국 생활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다. 김 PD는 "영화 언니는 본인의 얘기를 불행 서사로 전혀 얘기하지 않고 되게 쿨하게 말해서 저희가 행간을 읽어야 했다. 결혼해서 미국에 잠깐 갔다 왔을 때 그냥 '갑갑했어'라고만 하셨다. 미국 갔을 때 풍경을 얘기해 준 게 기억에 남는다. 너무 무서웠다고. 가도 가도 인가가 없고 폐타이어만 쌓여 있었다고. 아무 연고도 없는데 여자 홑몸으로 가서 있었으니까 '그냥 무서운' 정도가 아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소통할 사람도, 마음 나눌 이도 없는 그 삶의 막막함이 너무 짐작이 갔다"라고 설명했다.

    ◇ 날카로운 문제의식-따뜻한 뚝심, 두 사람이 펼칠 세계

    강유가람 감독과 김혜정 PD는 문화기획집단 영희야놀자 소속이다. 영희야놀자는 김혜정 PD의 연출작 '왕자가 된 소녀들'(2013) 제작을 계기로 설립됐다. '여성주의적인 시선으로 콘텐츠를 만드는 집단'을 목표로 출발했다. 두 사람과 여성학 연구자, 웹툰 및 드라마 종사자 등 5명 정도로 시작해 영상, 책 등 다양한 작업을 하려고 했으나, 영상 하나 만드는 것만도 너무 힘이 들어 지금은 영상에만 집중하고 있다고.

    강유가람 감독은 "저희는 연분홍치마 같은 쫀쫀한 제작집단이라기보다는 약간 느슨한 연대체라고 보시는 게 이해하기 편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분홍치마는 2004년 '성적소수문화환경을 위한 모임'으로 발족한 인권단체이자 창작집단으로, '종로의 기적', '두 개의 문', '노라노', '공동정범', '안녕 히어로', '플레이온' 등을 만든 곳이다. 강유가람 감독은 "초반에는 그렇게(연분홍치마처럼) 시작하려고 했는데 각자 분야가 다르다 보니 기획할 때 의견을 받는 정도로 운영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왕자가 된 소녀들', '이태원'을 함께하며 서로를 어떤 창작자로 느꼈는지 묻자 두 사람은 매우 쑥스러워했다. 잠시 멋쩍어하다가 강유가람 감독이 먼저 입을 열었다.

    "김혜정 감독은 되게 날카로운 문제의식, 세심한 시선이 있는 것 같아요. '이태원', '왕자가 된 소녀들'에서도 그런 부분 잘 캐치하고 작품에 잘 녹여주셨어요.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코멘트를 많이 해 주셨어요. 가끔 너무 냉철할 때가… (웃음) 근데 뼈 때리는 말이 작품에 되게 많이 도움이 되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되게 의지하는 조언자, 협력자이자 좋아하는 감독입니다. 그리고 유머가 있어요!" _ 강유가람 감독

    "강유가람 감독 개인을 봤을 때는 정말 성실하고 뚝심 있어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하고자 하는 건 끝내 이루는 추진력으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죠. 작품 관련해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문제의식을 놓지 않으면서도 인간적인 걸 감싸 안아요. 다른 시선이지만 뾰족뾰족하지 않아서 인간적으로 위안을 얻을 수 있어요. 따뜻함이 녹아 있는 점이 좋다고 생각해요." _ 김혜정 PD

    강유가람 감독과 김혜정 PD는 앞으로도 그동안 잘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작업을 해나갈 예정이다. "다큐를 통해서 인생의 어떤 한 단면을 배우고 모르는 세계와 접속하는 것 같다"는 강유가람 감독은 "주변화돼 있고 잘 몰랐던 목소리를 찾아 담아낼" 계획이라고. 그는 "그런 순간에 제가 많이 배우는 것 같다. 그래서 더 찾게 되는 것 같다"라며 "저는 극영화도 해 보고 싶어서 그 부분도 준비하고 있고, 다큐를 하게 된다면 '미투' 이후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라고 밝혔다.

    김혜정 PD는 "제 입장에서, 제 시선에서 바라본 세상을 계속해서 얘기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시대와 제 나이에 맞는 얘기가 계속 (눈에) 들어온다. 갈수록 나이 든 분들의 얘기가 다가온다"라며 "일상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여성의 시선으로 담아내는 데에 관심이 있다"라고 전했다. <끝>

    '이태원' 강유가람 감독 (사진=황진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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