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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다름'을 묻는 뮤지컬 '그림자를 판 사나이'



공연/전시

    '욕망'과 '다름'을 묻는 뮤지컬 '그림자를 판 사나이'

    [노컷 리뷰] 뮤지컬 '그림자를 판 사나이'(2019, 연출 오루피나)

    (사진=알앤디웍스 제공) 확대이미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다름'의 경계를 구분 짓는 기준이 될까. 나와 다른 모습을 가진 인간, 인간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지 않은 요소가 결핍된 인간을 우리는 왜 배척하고 혐오할까.

    뮤지컬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주인고 페터 슐레밀이 사업 투자를 제안하기 위해 찾아선 토마스 융의 집에서 신비한 능력을 지닌 그레이맨을 만나게 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레이맨의 제안으로 페터는 그림자를 팔고 금화가 마르지 않는 주머니를 얻는다. 부를 얻은 페터는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지만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도시에서 추방당한다.

    여러 도시를 전전하던 페터는 과거의 연인 리나를 만나 다시 사랑에 빠지고, 리나를 위해서라도 그림자를 되찾아야 할 상황에 놓인다. 일 년 뒤 페터는 다시 만난 그레이맨에게 그림자를 돌려 달라고 요구하고, 그레이맨은 그림자를 되찾을 수 있는 두 번째 거래를 제안한다. 바로 '영혼'을 달라는 것이다.

    악마인 '그레이맨'은 자본주의 시대 '자본', 다시 말해 '돈'을 상징한다. 벤델 호프만일 때 그레이맨은 자본이라는 권력을 가진 인간을 위해 뭐든 다 하고, 뭐든 만들어 내며 그의 욕망을 충족시켜 준다. '그레이맨'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자본은 자본가의 인간성, 즉 '영혼'을 탐낸다. 결국 그레이맨의 최종 목표는 인간성 혹은 영혼을 빼앗는 것이다. 이는 경계심 없이 자본이 주는 달콤한 유혹에 빠진 인간의 말로는 인간성의 상실임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사진=알앤디웍스 제공) 확대이미지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지점은 '다름'이다. 우리는 사소한 다름을 가진 사람을 향해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편견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 편견의 시선을 바탕으로 '정상성'을 논하고, 정상성을 벗어났다고 판단되는 사람에게는 '사회적 추방'이라는 폭력을 행사한다. 여기서는 그러한 정상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그림자'다.

    이는 원작 소설 작가인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삶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프랑스 귀족인 샤미소의 집안은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재산을 몰수당하고 독일로 망명해야만 했다. 샤미소는 평생 망명지 독일을 구원의 국가이자 제2의 고향으로 여기며 독일인으로서 살았다. 그러나 다른 말로 샤미소는 평생을 프랑스와 독일의 사이에서 '경계인'으로 산 것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인'을 향한 시선은 곱지 못하다. 나와 다른 것을 '다름'이 아닌 '틀림'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이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도 담겨 있다. 그림자가 없는 페터 슐레밀을 향해 그림자가 있는 사람들이 '악마'라고 부르며 이 땅을 떠나라고 외치는 것을 보면 '경계인'을 향한 차별과 혐오의 시선을 엿볼 수 있다.

    평소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신경 쓰지도 않던 '그림자'라는 존재가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이 되며 인간성을 묻는 것은 현실에서도 볼 수 있다. 현실의 그림자는 인종일 수도, 국적일 수도, 장애일 수도, 외모일 수도 있다. 그림자와 그림자의 결핍은 다양한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림자가 없는, 이른바 '정상성'을 벗어난 사람 혹은 우리와 사소한 부분에서 다른 사람을 향해 현실은 혐오와 차별이라는 폭력을 행사한다. 이를 뮤지컬에서는 '그게 대체 뭐라고'라는 넘버를 통해 관객에게 강하게 질문을 던진다. 그것이 무어라고, 사소한 다름이 무어라고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한 사람을 쫓아내려 하는지 말이다.

    (사진=알앤디웍스 제공) 확대이미지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이 같은 주제 의식을 초현실적인 무대 연출을 통해 구현해 낸다. 천장에 달린 총 10개의 판으로 구성된 거대한 미로, 무대를 둘러싼 LED 스크린의 영상 등은 현실과 초현실을 오간다. 무대 연출을 통해 보이는 현실과 초현실의 혼란스러운 경계는 페터 슐레밀의 상황 그 자체이자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현실 그 자체다.

    이러한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인 연출이 다소 어렵게 다가올 수 있다. 그럴 경우 뮤지컬의 원작 소설을 읽어본다면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1막 초반 토마스 융의 집에 초대된 손님들이 원하는 물건 등을 그레이맨이 만들어내는 장면에서 극 중의 시대 상황에 맞지 않게 21세기의 욕망이 구현되는 장면이 조금은 어색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극 중 인간들의 욕망은 현재에도 들끓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는 현실과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읽힌다.

    이러한 주제를 향해 관객을 이끄는 것은 '그게 대체 뭐라고', '진짜 악마가 되어줄까', '세상에 이토톡 멋진 그림자가' 등 뇌리에 강렬하게 남는 뮤지컬 넘버와 이를 표현해내는 배우들의 열연이다. 이를 통해 뮤지컬은 관객에게 다시금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욕망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다름에 대한 사회의 시선에 관해서 말이다.

    뮤지컬 '그림자를 판 사나이'(2019, 연출 오루피나), 140분, 2019년 11월 16일~2020년 2월 2일, 서울 종로구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
    (사진=알앤디웍스 제공) 확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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