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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8차 범인 분통 "복역 중 경찰관 5명 찾아와서…"



사건/사고

    화성 8차 범인 분통 "복역 중 경찰관 5명 찾아와서…"

    • 2019-10-17 05:25

    "제가 진범이 아닐 수도 있겠다고 해서 온 것도 아냐"
    담당 교도관 "윤모 씨, 교도소에서 재심 계속 알아봐"
    이춘재 자백한 사건 중 2년 옥살이 후 무죄 판결받은 이도
    초등생 실종사건, 시신 아직도 못 찾아…부실 수사 의혹
    용의자 몰려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들도

    (사진=연합뉴스)

     

    "화성연쇄살인사건이 해결이 안 되니까 9차 사건 이후 경찰관 5명이 교도소에 찾아와 아는 거 있으면 얘기해 달라는데 아는 게 있어야 대답을 하죠."

    화성연쇄살인 8차 사건의 범인으로 검거돼 20년간 옥살이를 한 윤모(52) 씨는 CBS노컷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분통을 터뜨렸다.

    윤 씨는 "당시 화성 경찰관들이 연쇄살인사건에 대해 알고 있나 해서 온 것 같은데 엉터리가 없었다"며 "반말을 하길래 그러지 말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제가 진범이 아닐 수도 있겠다 해서 온 것이 아니였다"며 "별 얘기도 없이 그냥 돌아갔다"고 덧붙였다.

    윤 씨가 수감됐던 청주교도소에서 그를 담당했던 교도관 A 씨도 윤 씨의 무죄를 확신했다.

    A 씨는 "며칠 전에도 당시 교도소 동료를 만났는데 윤 씨 얘기를 했더니 걔는 별명이 무죄잖아라고 기억했다"며 "교도소에서는 다들 그렇게 얘기했었다"고 말했다.

    또 "윤 씨가 교도소에 있을 때도 저희한테 재심에 대해 물어보고 계속 알아봐달라고 부탁해서 교도소에 들어오는 변호사들에게 문의해봤지만 똑같았다"며 "진범이나 명백한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려운 문제라고 해서 윤 씨를 많이 위로해 줬었다"고 했다.

    A 씨는 윤 씨가 출소한 뒤에도 지금까지 연락을 유지하며 재심을 돕고 있다.

    윤 씨는 지난 1988년 9월 16일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의 박모(당시 13세) 양 집에 침입해 잠자던 박 양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이듬해 10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 사건 범행을 저지른 바가 전혀 없는데도 경찰에 연행돼 혹독한 고문을 받고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이 이 사건 범행을 저질렀다고 허위로 진술했다"며 항소했지만 기각됐다. 윤 씨는 3심에서 무기징역을 확정받고 20년을 복역하다가 감형받아 2009년 출소했다.

    (사진=연합뉴스)

     

    윤 씨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의 피의자인 이춘재(56)가 8차 사건도 자신의 소행이라고 자백하자 변호사를 선임해 재심을 준비하고 있다.

    이춘재가 자백한 사건 중 과거 용의자로 지목돼 2년 넘게 옥살이를 한 이도 있었다.

    화성연쇄살인 9차 사건 이후인 1991년 1월 27일 충북 청주시의 한 택지조성 공사장 콘크리트관 속에서 방적 공장 직원 박모(당시 17세) 양이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경찰은 3개월의 수사 끝에 현장 주변에 살던 박모(당시 19세) 군을 용의자로 체포했다. 박 군은 2년 넘게 옥살이를 하다 1심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에야 풀려났다.

    1990년 12월 17일 화성 9차 사건의 피해자 김모(13) 양을 살해한 용의자로 지목된 윤모(19) 군은 현장검증에서 "모든 자백은 경찰이 시켜서 했다"며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다.

    윤 군은 일본에서 진행된 유전자 감정 결과 범인이 아니라는 회신을 받아 최종적으로 혐의를 벗게 됐다.

    당시 경찰은 강압수사에 이어 부실수사 의혹도 받고 있다.

    화성 9차 사건 전인 1989년 7월 18일 화성군 태안읍에 살던 김모(당시 9세) 양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실종됐다. 김 양이 실종 당시 입고 있던 치마와 책가방만이 같은 해 12월 화성연쇄살인 9차 사건 현장에서 불과 30여m 떨어진 태안읍 병점5리에서 발견됐다.

    당시 경찰은 김 양의 아버지가 두 차례에 걸쳐 수사를 요청했으나, 이를 묵살하고 단순 실종사건으로 처리했다. 이에 따라 김 양의 시신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발견되지 않았다.

    당시 용의자로 몰려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들도 있었다.

    1990년 12월 18일 화성 9차 사건의 용의자로 조사받은 차모(당시 38) 씨는 화성 병점역 부근 열차 건널목에서 기차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화성 10차 사건과 관련한 수사 대상자인 장모(당시 33) 씨는 1991년 4월 17일 오산의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려 숨졌다. 장 씨는 추행 혐의로 입건된 전력과 환각제를 상습 복용해왔다는 이유로 용의선상에 올랐던 것으로 전해졌다.

    역대 최악의 장기 미제 사건으로 대표되는 '화성연쇄살인사건' 당시 경찰은 단일 사건 가운데 최다인 연인원 205만명을 동원해 용의자 2만 1천280여명을 조사했다. 4만 100여명의 지문을 대조하고 180명의 모발도 감정했다. 그러나 범인을 잡지 못한 채 지난 2006년 공소시효가 모두 만료됐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 관계자는 "공소시효와 무관하게 화성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끝까지 수사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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