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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훈장은 전쟁아닌 식량증산 공로…노동당 가입도 안해"



경남

    "김원봉 훈장은 전쟁아닌 식량증산 공로…노동당 가입도 안해"

    • 2019-06-19 16:25

    [인터뷰] 밀양의열기념관 이준설 연구사

    영화 '암살'에서 배우 조승우가 연기한 약산 김원봉(사진=쇼박스 제공)

     


    친일 노덕술에 수모, 여운형 선생 피살 보며 월북
    여운형 암살범 "다음 차례는 김원봉이다" 진술
    북에서 맡은 국가검열상은 감사원장격...군과 무관
    1952년 훈장은 한국전쟁 아닌 식량증산 기여한 공로
    노동당에 가입도 안해..김일성, 남북화합 활동하는 약산 숙청
    황교안 찾아간 백선엽은 대표적인 친일군인
    친일파 득세, 독립투사로 둔갑하는 엉터리같은 일 반복
    약산은 끝까지 좌우합작, 남북화합 위해 헌신
    이 땅에 계신다면 여야가 싸우는 모습 결코 반기지 않을 것
    정치인들, 약산의 정신 이어받아 남북 평화통일로 나아가야

    ■ 방송 : 경남CBS <시사포커스 경남=""> (창원 FM 106.9MHz, 진주 94.1MHz)
    ■ 진행 : 김효영 기자 (경남CBS 보도국장)
    ■ 대담 : 이준설 학예연구사 (밀양 의열기념관)

    ◇김효영>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식에서 ‘애국 앞에 보수와 진보가 없다’는 말을 하면서, '좌우합작'의 선봉에 섰던 약산 김원봉 선생을 언급한 것을 두고, 김원봉만 떼서 일부 언론에서 크게 확대하고 보수 야당들이 다 덤벼들었습니다.

    오늘 다시 약산 김원봉에 대한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밀양의열기념관의 이준설 학예연구사 만나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이준설 학예연구사> 네, 반갑습니다. 밀양의열기념관의 학예연구사로 있는 이준설입니다.

    ◇김효영> 의열기념관이라는 게 밀양 말고도 많이 있습니까?

    ◆이준설 학예연구사> 아뇨, 없습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처음으로 만들어진 유일한 공간이 바로 의열기념관입니다. 작년 3월 10일에 약산 김원봉 선생의 생가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김효영>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오!’라는 영화대사 기억납니다. 밀양에서 얼마나 사신 겁니까?

    ◆이준설 학예연구사> 약산은 1898년 음력 3월 14일 생입니다. 약산이 중국으로 간 시기는 1916년 즈음 되는데 그 전까지, 19살 무렵까지는 밀양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김효영> 일제 강점기 때 김원봉 선생은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이준설 학예연구사> 22살 때 길림에서 의열단을 만듭니다. 의열단을 만들어서 적 기관 파괴 및 일제요인 암살 등을 통한 항일투쟁에 앞장섰고 특히 1932년 10월에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을 해서 교장으로 또 취임을 합니다. 그래서 이육사라든지, 그 다음에 세계적인 음악가였던 정율성이라든지, 125명의 독립군 간부를 직접 양성을 했습니다.

    ◇김효영> 네.

    ◆이준설 학예연구사> 네, 그리고 1935년 7월에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좌우가 하나 된 가장 큰 독립운동단체인 '민족혁명당'을 만들어서 일제와 싸웠고, 이후에는 또 1938년 10월 10일에 가서는 중국 정부로부터 인정받은 최초의 항일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를 창립해서 항일무장투쟁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그리고 42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에 합류를 해서 부사령관으로 또 취임을 하고, 그리고 또 44년에 가면 지금의 국방부장관 격인 군무부장에 또 취임을 해서 해방 때까지 오로지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던, 독립운동사의 큰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약산 김원봉 선생입니다.

    ◇김효영> 김원봉 선생은 자신의 기반이 조선의용대였던 것 아닙니까?

    ◆이준설 학예연구사> 네.

    ◇김효영> 그런데 그것을 해체하고 광복군에 합류를 한 것이죠.

    ◆이준설 학예연구사> 네, 맞습니다.

    ◇김효영>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이 ‘애국 앞에서는 보수나 진보가 없다.’ 이렇게 강조하신 것, 아닙니까?

    ◆이준설 학예연구사> 네, 맞습니다.

    ◇김효영> 약산의 좌우합작, 이 정신을 높이 평가한 것이겠죠.

    ◆이준설 학예연구사> 네, 그렇습니다.

    ◇김효영> 그리고 그것은 박근혜 정부 때 만들려고 했던 국정교과서에서도 들어있었던 내용입니다.

    ◆이준설 학예연구사> 네, 맞습니다.

    ◇김효영> 그런데, 이게 정치적인 논쟁거리로 변질된게, 월북 때문입니다.

    ◆이준설 학예연구사> 약산의 월북이 자발적이 아니라 그 시대 상황에 있어서 쫓겨 가다시피 했다는 그런 것인데 마치 북이 좋아서 간 것처럼 하는 것은 아쉽습니다.

    ◇김효영> 어떤 상황이었기에 월북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이준설 학예연구사> 당시에 친일파와 손잡은 이승만 세력과 미군정 하에서 약산의 선택지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특히 1947년 7월 19일에 약산의 정치적 멘토라고 할 수 있는 몽양 여운형 선생의 대낮 암살사건은 약산에게 큰 충격을 준 것으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김효영> 여운형 선생이 피살됐던 사건.

    ◆이준설 학예연구사> 네, 맞습니다. 특히 여운형 선생 같은 경우는 약산과도 중국에서 독립운동 시기에 두 번 정도 만났고, 특히 약산이 남경금릉대학 영문과 그쪽에 다녔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 여운형 선생이 남경의 금릉대학 영문과 출신입니다. 거기에서 2년 더 있었고, 광복 이후에도 좌우 합작을 위해서 같이 노력했던 그런 분인데, 자신의 어찌 보면 정치적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분이 대낮에 그것도 11번째의 암살시도 끝에 이분이 돌아가시게 됐습니다. 그게 약산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 같고요.

    ◇김효영> 자신의 멘토였던 여운형 선생이 피살되는 것을 봤으니 약산도 ‘나도 죽을 수밖에 없겠다’는 위기의식을 느꼈겠군요.

    ◆이준설 학예연구사> 네, 맞습니다. 특히 몽양을 암살했던 이분들이 법정에서도 ‘그 다음 차례는 박헌영과 김원봉이다.’ 이렇게 언급한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김효영> 그렇군요.

    ◆이준설 학예연구사> 네, 특히 몽양 선생의 암살 이전에도 46년 10월에 친일파 악질 경찰 노덕술에게 당한 수모는 굉장히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김효영> 두들겨 맞았죠?

    ◆이준설 학예연구사> 네, 맞습니다. 굉장히 큰 수모를 당했죠. 항일운동하면서 일제 세력한테 한 번도 잡히지 않았고, 일제 세력이 가장 두려워했던 분인데 오히려 광복된 나라에서, 그것도 친일파 경찰한테 그런 수모를 당했으니까 이분의 고통이라든지 처참함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고. 특히 47년도에 가면 미군정에서 3월에 구속이 되는 그런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김효영> 그래요.

    ◆이준설 학예연구사> 그리고 또 47년 8월 12일에 약산에 대해서 미군정이 또 수배령을 내려 버립니다. 그러다보니까 약산의 운신의 폭은 더욱 좁아져 버리고.

    특히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과정에서도 항상 좌우 세력의 단합과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서 어떤 세력과도 손을 잡는 약산이었는데, 이런 기치가 광복 이후에도 남북이 하나되게 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의 소신으로 이어졌는데 오히려 미소냉전체제에서 그리고 친일파의 득세로 인해서 약산의 정치적 시련이 더 클 수밖에 없었던 그런 안타까움으로 인해서, 결국 쫓겨 가다시피 해서 이제 북으로 가서 자신의 꿈을 실천하기 위해서 남북 화합을 위해서 가는 것인데 그게 이제 일부 언론에 의해서, 또 일부 정치인들에 의해서 왜곡되는 그런 것이 상당히 안타깝게 저는 느꼈습니다.

    ◇김효영> 김원봉 선생이 북한에 가서의 행적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이준설 학예연구사> 알려진 부분은 48년 8월에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가해서 우리의 국회의원격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사실 선출이 됐습니다. 48년 9월에 가면 우리가 잘 알려져 있는 국가검열상에 취임을 하는데 이것은 지금의 감사원장입니다.

    이후 52년 5월에 국가검열상에서 해임되고 노동상으로 임명이 됩니다.
    그리고 57년 9월에 가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으로 임명되는데 그 이후 58년에 김일성에 의해서 숙청된 것으로 그렇게 지금 알려져 있습니다.

    ◇김효영> 지금 보수 정당이나 보수 언론에서 가장 문제 삼는 것이 '6.25전쟁에서 공훈을 세웠다'는 이유로 북한 정부로부터 훈장까지 받았던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이준설 학예연구사> 네, 하지만 조금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왜냐면 최근 4월 1일에 천안독립기념관에서 약산 서훈 관련 전문가들이 모여서 토론회가 열린 적이 있습니다.

    국가검열상 자체는 감사원장 격이기 때문에 이것도 전쟁 시기에 맡았던 직책인데 거의 군하고는 관계가 없는 그런 것들이고.

    훈장 관련해서는 이 훈장은 52년도 3월 19일에 받습니다. 이것은 기존에 알려진 것처럼 6.25전쟁 시기에 공훈, 이런 것이 아니고 약산이 51년 5월에 공화국군사위원회 평북도전권대표로 임명을 받습니다. 그 때 평북지역에 보리파종을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김효영> 보리파종.

    ◆이준설 학예연구사> 보리파종을 통해서 식량증산에 기여를 했는데 그것 때문에 받은 것이지, 그리고 일각에서는 이 보리파종을 통해 군량미로 쓰인 것이 아닌가 이렇게 나쁜 시각으로 보는 분도 있는데, 전문가들은 이것은 군량미와도 상관이 없는 일반 당시 전쟁 시기에 있어서 일반 사람들이 이제 곤궁에 처하게 된 주민들의 식량으로 쓰인 것이지 군량미로 쓰였다거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특히 또 하나의 훈장은 약산이 태어난 지 60주년을 기념해서 훈장을 하나 줍니다. 이런 것들은, 약산 같은 경우에는 1898년생이고 김일성 같은 경우는 1912년생입니다. 결과적으로 정권 초기에 자신의 정치세력이 미약했던 김일성에게 있어서는 독립운동의 큰 인물인 이런 분들의 후광이 필요했던 그런 시기였고, 그런 것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인데 뭔가 오해가 돼서 와전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효영> 혹시 6.25전쟁에서 공훈을 세워서 훈장을 받았다고 하는 기록은 있나요?

    ◆이준설 학예연구사>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약산 같은 경우에는 북한에 가서도 노동당에 가입을 안 했습니다.

    북한에서는 고위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무조건 노동당에 가입을 해야 하는데 약산은 가입을 하지 않은 것이 이미 전문연구자들에 의해서 이미 다 밝혀져 있는 상황입니다.

    ◇김효영> 그런데 왜 김일성은 약산을 숙청한 겁니까?

    ◆이준설 학예연구사> 결국은 자신의 세력이 50년도 중반 이후에 1인 독재체제로 공고화되니까 기존의 자기 세력과 배척되는 세력을 당연히 제거할 수밖에 없는데 이 약산 같은 경우에는 우리가 6.25전쟁 당시에 북한에서 어떤 게 있었냐 하니까 ‘모시기 작전’이라고 해서 남쪽의 저명한 인사들을 강제로 납북하는 그런 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소앙이라든지 여러 많은 분들이 북으로 강제로 가게 되는데 약산 같은 경우에는 이런 분들과 함께 계속 남북화합을 위한 그런 정치적인 행사를 많이 개최를 했고, 힘을 합쳤다는 것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김일성 세력에 대항하다보니까 그것 때문에 결국은 미움을 사서 연안파 숙청 때 같이 약산도 숙청된 것으로 그렇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김효영> 김일성은 김일성 체제의 국가로 만들려고 하는데 약산은 계속해서 남북 간의 화해, 협력, 하나 된 조국 이런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김일성 눈에는 눈엣가시처럼 보였다는 겁니까?

    ◆이준설 학예연구사> 네, 맞습니다. 특히 약산 같은 경우는 조선의용대가 나중에 의용군으로 바뀌는데 대부분의 세력들은 광복 이후에는 북한으로 대부분 넘어갑니다.
    그러니까 약산이 6.25전쟁에서 전쟁을 반대했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1/3은 이런 광복군으로 들어왔고, 2/3는 북한으로 갔는데 만약에 자기가 전쟁에 찬성한 그런 사람이라면 자신의 군사들끼리 싸우는, 총질하는 그런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에 그것은 약산의 평소의 어떤 성정이라든지 독립운동 과정의 전체를 바라볼 때 전혀 그럴 분이 아니다, 그래서 이제 일각에서 어떤 연구자들은 백연 김두봉과 약산은 전쟁에 반대했다, 이런 얘기도 나오는 것입니다.

    ◇김효영>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문재인 대통령의 약산 언급이 논란이 되자 당장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찾아갑니다. 백선엽은 어떤 인물입니까?

    ◆이준설 학예연구사> 일제 때 만주에서 독립군 토벌에 가장 앞장섰던 대표적인 독립군 토벌자, 일본군 출신인 인물인데 나중에는 영웅으로 뒤바뀌는 그런 뼈아픈 역사적인 사실 자체가 사실은 뭔가 좀 잘못된 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친일 경찰에 노덕술이 있다면 군에 있어서는 백선엽이 그런 역할에 굉장히 좀 충실했던 분인데, 일제 세력과 손잡은 이승만에 의해서 이렇게 흘러가다 보니까 친일파 세력들이 득세를 하고, 이런 분들이 오히려 독립투사, 나라를 위해서 일한 것 인양 둔갑되는 그런 엉터리 같은 일이 반복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김효영> 제1야당 대표가 그런 사람 앞에 가서 머리를 조아리면서 약산 김원봉 선생의 좌우합작 정신을 폄하하는 것을 보시면서 어떤 기분이 드셨습니까?

    ◆이준설 학예연구사> 굉장히 안타까운 생각도 들고. 우리가 역사적인 평가를 할 때 객관적으로,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해야 할 그런 말을 해야 하는데 특히 정치계의 선두그룹에 있는 분들이라든지 사회적으로 저명한 인사들은 그렇게 얘기하고 해야 하는데 가장 편협적인, 그리고 역사를 이제 잘못된 것으로 오인하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부분이 많아서 굉장히 저는 안타까운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김효영> 알겠습니다. 한 말씀 하시고 오늘 인터뷰 마치겠습니다.

    ◆이준설 학예연구사> 약산에 대한 연구업적에 있어서는 우리가 독립운동 부분은 다 인정을 하는 부분들인데, 해방된 조국에서 탄압 때문에 결국 북으로 갈 수밖에 없었고, 북으로 가서도 노동당에 가입을 하지는 않았고, 남북화합을 위해서 끝까지 노력하시다가 결국은 북한정권에서도 숙청당한 인물인데 이런 인물에 대해서는 우리가 나라의 정체성이라든지 친일청산 이런 문제에 있어서 같이 연계를 시켜서 보다 전향적으로 생각할 것은 있고, 결국은 약산이 지금 이 땅에 계신다고 해도 여야가 싸우는 모습을 결코 반기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항상 약산 이 분은 적도 하나씩 끌어들이기 위해서 노력했던 분이기 때문에 정치인들도 진정한 통일 정신을 되살려서 언젠가는 우리가 통일을 이뤄야 하고 남북화합이 되어야만 남과 북의 평화가 나아가 아시아의 평화, 이 평화 자체가 세계의 평화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정신을 염두에 두고 어떤 말을 한다거나 정치를 한다면 행복한 대한민국이 건설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김효영> 알겠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이준설 학예연구사> 네, 고맙습니다.

    ◇김효영> 지금까지 밀양의열기념관의 이준설 학예연구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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