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배너 닫기

전체메뉴보기

무고한 주민 희생된 '죽음의 길', 지금은 제주 올레길로



제주

    무고한 주민 희생된 '죽음의 길', 지금은 제주 올레길로

    [4.3, 기억과 추억 사이 ⑥] 서귀포 섯알오름
    올레길 10코스 일부 구간…서부 예비검속자 총살 뒤 암매장
    직후 유해 수습도 못한 유족들…6년 지나서야 백조일손묘역 조성
    유족들의 기억 투쟁…"더는 우리 가족과 같은 비극 되풀이 않길"

    올레길 10코스 일부 구간이자 4.3 당시 제주 서부지역 예비검속자 100여명이 희생된 섯알오름. 올레길 표식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사진=고상현 기자)

     

    제주에서도 보기 드문 넓은 들판과 해안 절경을 자랑하는 올레길 10코스. 해마다 많은 올레객이 걷는 10코스 중간에는 송악산 인근 세 오름 중 서쪽에 위치한 달걀 모양의 오름인 섯알오름이 있다.

    지금은 사랑받는 올레길 코스 중 일부 구간이지만, 4.3 당시엔 195명의 양민이 영문도 모른 채 군경에게 끌려가 총살된 뒤 암매장된 '죽음의 길'이었다.

    현재 제주지역 4.3 학살 터 대부분이 관광지로만 기억되고 있지만, 섯알오름 학살 터는 유족들의 노력으로 4.3 비극의 역사 교육 현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올레객들 찾는 섯알오름…예비검속자 100여명 암매장

    18일 오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위치한 섯알오름. 이곳은 모슬포와 알뜨르비행장을 거쳐송악산에 이르는 올레길 10코스 (17.3㎞) 중 일부 구간에 해당한다.

    주변에는 제주에서도 보기 드믄 넓은 평지와 함께 화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송악산이 있어 올레객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현재 섯알오름 인근에 중국 자본이 투입돼 대규모 호텔과 관광시설 등이 조성되는 뉴오션타운 개발사업이 추진되고 있기도 하다.

    특히 주변에는 일제가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해 구축해 놓은 자살폭격기 격납고, 고사포진지 등 군사유적이 남아있는 역사 공간이기도 하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의 탄약고였던 섯알오름 능선에서 4.3 당시 제주 서부지역 예비검속자 100여명에 대한 총살이 이뤄졌다. (사진=고상현 기자)

     

    이날도 섯알오름에는 많은 올레객과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수시로 이곳을 지났다. 지금은 이처럼 제주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변했지만, 4.3 당시엔 제주 서부지역 예비검속자 195명이 집단으로 총살된 뒤 암매장이 이뤄진 곳이었다.

    '예비검속'은 범죄 방지 명목으로 범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사람을 사전에 구금하는 것으로 일제의 악습이었다. 4.3 당시엔 무장대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군경에 밉보이거나 중상모략 등으로 구속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한국전쟁 직후 인민군에게 밀려 경남‧부산 지역이 점령될 위기에 놓이자 제주도를 반공기지로 삼고자 예비검속자를 처리했고, 섯알오름에서도 학살이 이뤄졌다.

    ◇ 유해 수습도 못한 유족들…후에 백조일손묘지 조성

    섯알오름에서 큰형을 잃은 양신하(81)씨가 18일 오후 취재진에게 4.3 당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진=고상현 기자)

     

    이날 이곳에서 만난 양신하(81)씨의 큰형도 1950년 8월 20일 새벽 일제의 탄약고가 있었던 섯알오름 능선 부근에서 희생됐다. 4.3 직전 사촌형인 양은하(당시 27살)씨가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를 외치다 경찰서에서 고문을 받고 죽자 항의했던 전력이 원인이 됐다.

    7남매 중 막내였던 양 씨는 맏형인 양기하(당시 42살)씨를 아버지처럼 따랐던 터라 큰형의 죽음으로 충격이 컸다.

    "음력으로 6월 보름날(7월 29일) 형님이랑 영락리 집 지붕을 수리하고 인근 바닷가에 보말 잡으러 왔는데, 마을 사람들이 경찰서에 갔다고 해서 형님이 따라갔다가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자상했던 형님이었는데…."

    당시 중학생이었던 양 씨는 학살 소식을 듣고 가족과 함께 이곳을 찾았지만, 큰형의 유해를 수습할 수 없었다. 군경이 시신을 찾지 못하도록 막아섰기 때문이다.

    양신하(81)씨가 학살 직후 군경이 희생자들의 고무신 등을 태우고 난 뒤 녹아내린 모습을 재현한 조형물을 가리키고 있다. (사진=고상현 기자)

     

    "오름 입구부터 희생자들의 고무신과 허리띠가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어요. 유가족 300여 명이 유해 수습을 하려고 했지만, 군경이 공포탄을 쏘아대 하지 못했습니다."

    학살 이후 한동안 이곳은 시신을 노리고 날아온 까마귀들로 가득했다. 군인들이 보초를 선 가운데 가족의 유해를 수습하지 못한 유족들의 통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6년 만인 1956년 5월 18일 유해 수습이 비로소 이뤄질 수 있었다. 유족들의 꾸준한 탄원 덕분이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유해가 방치된 터라 훼손 상태가 심했다.

    "암매장 터는 물구덩이로 변해서 그 안에 유해들이 서로 엉켜 있었어요. 유가족들이 두건으로 유해를 정성스레 닦아서 칠성판에 놓는데 어떤 유해가 자신의 가족 것인지는 몰랐죠…."

    유해의 신원을 구분할 수 없어 유가족들은 대강의 뼈를 추슬러 무덤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동묘지가 '백조일손묘지'다.

    백조일손묘역. (사진=고상현 기자)

     

    '100여 분의 조상들이 한날, 한시, 한곳에서 죽어 뼈가 엉기어 하나가 되었으니 그 후손들은 이제 모두 한 자손'이라는 뜻이다. 현재 섯알오름 학살 터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

    ◇ '백조일손' 유족들의 기억 투쟁…"더는 비극 되풀이 않길"

    섯알오름 학살 터는 안내 표석조차 없는 다른 지역의 4.3 학살 터와는 다르게 희생자 위령비와 학살의 비극을 설명하는 안내판 등이 잘 마련돼 있다.

    이는 '백조일손' 유족들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끈질긴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5.16군사정권을 거치며 한 차례 백조일손 묘역에서 묘비가 파괴되고 23위가 타 지역으로 강제 이장되기도 했지만, 유족들은 묘역을 끝까지 지켜냈다.
    백조일손묘역에 보관 중인 5.16군사정권에 의해 파괴된 묘비의 파편. (사진=고상현 기자)

     


    그 중심에는 양 씨가 있다. 그는 큰형이 죽고 난 뒤 4.3과 관련된 자료를 찾고 정리하면서 끈질기게 진상을 파헤쳤다. 현재 서귀포시 대정읍 양 씨의 자택 서재에는 4.3 관련 자료로 가득 차 있다.

    "형님은 국가로부터 무장대와 아무런 상관없다는, 일종의 증명서인 양민증을 받았는데도 억울하게 돌아가셨어요. 형님뿐만 아니라 사촌형제 17명 중 11명이 4.3 때 희생됐어요. 후손들이 '할아버지들은 폭도였습니까' 할까봐 막내인 제가 달려들었습니다."

    그런 노력으로 2000년대 들어 섯알오름 학살 터 성역화 사업이 진행됐다. 또 2015년에는 대법원으로부터 섯알오름 학살사건과 관련해 국가가 유족에게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얻어냈다.

    "제가 평생을 수집하고, 정리한 자료는 살아있는 역사가 될 것입니다. 후대 사람들이 이를 통해 아픈 역사를 잘 기억해서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교훈을 얻기를 바랍니다."
    섯알오름 학살 터에 조성된 희생자 추모공원. (사진=고상현 기자)

     



    제주 4.3 당시 수많은 사람이 군경의 총칼 앞에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주 땅 곳곳이 이들의 무덤으로 변했습니다. 현재 관광지로 변한 그 무덤엔 4.3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많은 이가 제주에서 즐거운 추억을 남기지만, 71년 전 아픔을 기억하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요? CBS노컷뉴스는 매주 한차례씩 제주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4.3 학살터를 소개하며 4.3의 비극을 기억하겠습니다. 여섯 번째로 4.3 당시 190여 명의 주민이 희생된 곳이자 올레길 10코스의 일부 구간인 섯알오름을 찾았습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오늘도 어머니 유해 위로 비행기 뜨고 내린다
    ② 피로 물들었던 모래사장 지금은 제주 관광명소로
    ③ 대량학살 자행된 제주 정방폭포…지금도 울음 쏟아내다
    ④ 4.3 학살 흔적 지워지는 제주 성산일출봉
    ⑤ '마을 청년 한꺼번에 학살'…한(恨) 많은 제주 표선백사장
    ⑥ 무고한 주민 희생된 '죽음의 길', 지금은 제주 올레길로
    계속

    이 시각 주요뉴스


    Daum에서 노컷뉴스를 만나보세요!

    오늘의 기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댓글

    투데이 핫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