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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3·1 운동의 선봉장 '숭일학교'



광주

    호남 3·1 운동의 선봉장 '숭일학교'

    [3·1 운동 100주년 특별 기획]<광주 3·1 운동의 빛이 된 기독교인> 3편

    광주 3·1 운동에 참여해 복역한 103명 중 24명이 숭일학교 학생
    1919년 3월 10월 집회 등서 유인물 배포에 앞장서

    1908년 현 광주시 남구에 세워진 숭일학교 모습(사진=광주숭일고등학교 제공)

     

    현 광주숭일중·고등학교의 전신인 숭일학교는 광주 3·1 운동에 100여 명이 넘는 교사와 학생들이 참여하는 등 3·1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역이었지만 두 차례에 걸친 학교 이전 등으로 관련 자료가 분실되면서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숭일학교는 수피아여학교와 함께 미국인 선교사 유진벨(한국명 배유지) 선교사의 집에서 시작됐다. 이후 1908년 남학생 선교부는 숭일학교로, 여학생들 선교부는 수피아 여학교로 나눠졌다.

    박해현 초당대 초빙교수에 따르면 일제의 눈을 피해 광주 3·1 운동을 준비하던 10명은 1919년 3월 6일 현 광주시 남구 양림동 남궁혁의 집에 모여 거사를 논했다. 여기에는 숭일학교 교사 손인식·최병준, 농감 송흥진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광주 3·1 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3·1 독립선언서 등을 인쇄해 시위에 참여한 군중들에게 배포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송흥진과 손인식은 숭일학교 소유 등사판 2개를 남궁혁의 집으로 가져왔다. 당시 판결문을 통해 이들은 독립선언서는 1500장을, 경고문과 독립가 등 200여 장을 인쇄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렇게 인쇄된 인쇄물 가운데 상당수는 광주 3·1 운동 첫 집회를 앞둔 3월 9일 최병준에 의해 숭일학교 학생들에게 전해졌다. 숭일학교 학생들은 3월 10일 집회에 참여한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와 격문 등 약 1000장의 유인물을 배포하는 역할을 맡았다. 최병준은 숭일학교 각 학년 대표인 정두범, 김철주, 김성민, 김판철, 김정수 등에게 유인물을 각각 100여 장씩 나눠주고 배포 구역까지 미리 정해준 것으로 알려졌다.

    거사를 하루 앞둔 9일 최병준과 송흥진은 숭일학교 기숙사를 찾아 "경성 기타 각지에서 이미 독립운동을 개시했는데 유독 우리 광주에서 무시하면 다른 날 동지의 조소를 어떻게 할 것인가. 부디 우리 지역에서도 똑같은 운동을 개시하자"고 말하며 숭일학교 학생들이 광주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제안한다.

    3월 10일 집회 당일 군중들이 광주천을 따라 부동교를 거쳐 모여들자 장총과 일본도로 무장한 일본군 기마 헌병대가 이들의 앞을 막아섰고 주동자 상당수가 검거됐다. 하지만 11일에도 숭일학교 학생들은 수백 명의 시위 군중의 가장 앞에서 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광주 3·1 운동으로 구속된 103명 중 숭일학교 학생이 24명으로 가장 많았던 이유다.

    숭일학교 출신으로 3·1 운동에 참여한 송광춘은 시위에서 일본 경찰로부터 입은 타박상 탓에 복역 중 숨을 거뒀다. 박해현 초당대 초빙교수는 "숭일학교는 수피아 여학교만큼이나 광주 3·1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학교 이전 과정에서 관련 자료가 분실되면서 그 역할에 대해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며 "광주 3·1 운동에 참여한 숭일학교 관계자들의 용기를 기억할 수 있는 표지석 제작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당시 재판 기록에 따르면 3·1 운동에 참여했다 일제에 붙잡힌 숭일학교 교사 손인식은 등사기를 제공해 유인물을 제작하도록 했다는 이유 등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특히 최병준에게는 광주 3·1 운동 주동자 가운데 가장 무거운 형인 징역 3년형이 선고됐다. 당시 광주 3·1 운동과 관련해 재판을 받았던 7명의 교사 중 최병준, 손인식, 강대년, 신의구 등 4명이 숭일학교 교사였다. 숭일학교 교사 강대년, 신의구는 학생들에게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독려했다는 혐의로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이밖에 3·1 운동에 참여한 숭일학교 학생 20여 명에게는 징역 4개월에서 10월까지가 선고됐다. 이후 전국 최초로 신사 참배를 거부한 숭일학교는 1931년 고등과가 폐과됐으며 급기야 1937년에는 폐교되기에 이른다. 이같은 사료를 살펴볼 때 아직까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숭일학교가 광주 3·1 운동의 선봉장 역할을 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글 싣는 순서
    ※광주CBS의 [3·1 운동 100주년 특별 기획]<광주 3·1="" 운동의="" 빛이="" 된="" 기독교인=""> 오늘은 세번째 순서로 호남 3·1 운동에 100명이 넘는 교사와 학생들이 참여한 숭일학교에 대해 보도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광주전남 3·1 운동 기폭제 '조선독립광주신문'
    ②호남 3·1 운동의 구심점 '광주제중원'
    ③호남 3·1 운동의 선봉장 '숭일학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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