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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쏜 김재규, 부마항쟁 직접보고 결심"



경남

    "박정희 쏜 김재규, 부마항쟁 직접보고 결심"

    [인터뷰]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지정 추진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고호석 상임이사 (사진=자료사진)

     

    -영구집권 유신체제에 반발 '유신철폐, 독재타도' 외치며 시위
    -예상 못한 시민들의 대대적인 동참으로 마산까지 확산
    -시위 직접 본 김재규, 유화조치 권했지만 거부하자 총으로 쏴
    -부마항쟁 후 다시 등장한 신군부에 항의한 것이 광주항쟁
    -광주는 참혹한 살육...광주진상 밝히는 것이 우선이라 부마항쟁은 묻혀져
    -촛불광장에서 경험했듯이 민주주의는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어
    -부마항쟁 국가기념일로 지정, 계승하고 교육해야

    ■ 방송 : 경남CBS<시사포커스 경남=""> (창원 FM 106.9MHz, 진주 94.1MHz)
    ■ 제작 : 손성경 PD
    ■ 진행 : 김효영 기자 (경남CBS 보도국장)
    ■ 대담 : 고호석(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상임이사)

     

    ◇김효영> 지금으로부터 39년 전에 부산과 마산에서 민주항쟁이 발생했습니다. 부마항쟁이죠. 문재인 대통령의 헌법개정안 전문에 부마항쟁이 담겼고 기념재단이 만들어졌고 이제 국가기념일 제정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당시 부마항쟁에 참여했고 지금은 기념재단의 상임이사를 맡고 계신 고호석 이사의 이야기 들어보겠습니다. 이사님 안녕하십니까?

    ◆고호석> 네, 안녕하세요.

    ◇김효영> 재단이 출범한 게 얼마 되지 않았죠?

    ◆고호석> 네, 그렇습니다. 올해 8월 22일 날 창립총회를 갖고 출범했습니다.

    ◇김효영> 지금까지 이런 기념재단 하나 제대로 없었던 겁니다.

    ◆고호석> 이런 저런 사정 때문에 재단 출범은 많이 늦어졌습니다.

    ◇김효영> 그렇군요. 39년 전 이야기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당시 이사님은 학생이었습니까?

    ◆고호석> 네. 그때 부산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김효영> 부마민주항쟁의 시작이 부산대 아닙니까?

    ◆고호석> 네, 그렇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에 유신헌법이라는 것을 발표하면서 유신체제였죠. 이 유신체제라는 것은 대통령을 직접 국민들이 뽑지 못하고 아주 관변, 정부랑 아주 친한 사람들 한 5천명을 체육관에 모아놓고 대통령을 뽑았어요. 그리고 그 대통령은 연임제한이 없어서 그 체육관 선거를 한번 치르기만 하면 4년 동안 대통령을 할 수 있었고, 뭐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죠.
    거기다가 그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2/3를 임명하기 때문에 국회의 거의 2/3정도는 여당이 그냥 다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거기에다가 특히 유신헌법의 특징은 긴급조치권을 대통령이 마음대로 발령할 수 있는데 그 긴급조치는 일반법보다 더 강한 특별법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긴급조치만 대통령이 내리면 무조건 다 그거에 따라야하고. 그러니까 그 긴급조치구호같은 것이 아예 유신정권이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어떤 비판이나 뭐 부정적인 얘기도 할 수 없도록 그렇게 규정을 했고. 그래서 뭐 술자리에서 대통령 욕 한마디만 하면 바로 고문당하고 잡혀가서 징역 1년 정도를 살아야 되는 그런 상황이었죠.

    ◇김효영>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독제시스템이었습니다.

    ◆고호석> 그렇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나마 대학생들이 목소리를 조금씩 내니까 그나마 젊은 혈기도 있고 아직 직장에 있지 않고 그러니까 비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집단이 대학생밖에 없었잖아요. 그러나 학교에는 모든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인 모임, 토론 이런 것을 전부다 원천적으로 봉쇄를 해버렸고 경찰들을 학교에 쫙 깔아놔서 철저히 감시하는 그런 병영체제 같은 것이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김효영> 그렇군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에서 어떤 일이 발생한 겁니까?

    ◆고호석> 부산은 75년도에 제일동포학생간첩단 사건을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 조작을 하면서 학생들을 싹 쓸었기 때문에 75년 이후에는 79년까지 변변한 교내시위한번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아까 말씀드린 그런 매우 억압적이고 말도 안 되는 반민주적인 체제하에서 대학생들이 시위한번 없이 모든 비판을 그냥 입 밖에 내지도 못하고 살다보니까 '유신대학'이라는 아주 자조 섞인 그런 얘기들을 스스로 하기도 했고요.
    자괴감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79년 여름부터 아 이래서는 안 되겠다. 뭔가 변화가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들이 조금씩 조금씩 나왔고요. 그래서 10월 15일에 원래 이진걸이라는 학생이 시위를 하려고 했는데 좀 안 맞아서 실패를 했어요. 그래서 16일 날. 그 당시 상대에 다니던 정광민이라는 학생을 필두로 한 일단의 학생들과 그 당시에 그래도 학교 내에서 조금 비판적인 모임을 하고 있던 그런 학생들이 같이 협조를 해서 좀 큰 시위로까지 가게 된 것이죠. 물론 저희들이 그 당시 상황에서 그렇게 큰 시위로 갈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안했지만 그만큼 분위기는 무르익어있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김효영> 그렇군요. 시위의 구호는 독재타도였습니까?

    ◆고호석> 네. 유신철폐 독재타도. 이게 가장 핵심적이었죠.

    ◇김효영>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면서.

    ◆고호석> 결국은 박정희는 물러가라.

    ◇김효영> 박정희 물러가라. 그렇게 학교 교문 밖까지 나오신 겁니다.

    ◆고호석> 우리는 몇 백 명도 채 못 모이고 주동자는 잡혀가고 그럴 줄 알았죠. 그랬는데 이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상대에서 시작해서 도서관 앞으로 가고 운동장을 한 바퀴 돌면서 한 2~3천명이 금방 모여 버린 거에요. 그러니까 경찰들이 교내로 치고 들어왔는데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니까 한 5천명까지 모였어요.
    그러니까 경찰들이 그런 규모의 시위를 진압해본 적이 없죠. 부산경찰은, 그 당시에.
    그러면서 여기저기 시위대가 흩어지면서 정문은 봉쇄당하고 이제 후문, 그리고 옆에 사대부고 있던 담장. 이런 쪽을 통해서 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하게 되죠.
    그것도 부산대학교는 사실 부산의 구도심하고는 아주 멀리 떨어져있거든요. 그래서 거기서 학생들이 나오더라도 뭐 시내까지 가는 데는 어려움이 매우 많았는데 워낙 뭐 버스기사님들을 비롯해서 시민들이 막 박수도 쳐주고 막 이런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분위기가 만들어지면서 시청가까이까지 진출을 했고 나중에 밤에는 일반 시민들까지 합세한 그런 명실상부한 시민항쟁으로까지 발생했습니다.

    ◇김효영> 그렇군요. 시민 모두가 마음속에 응어리를 품고 있다가 부산대에서 시작하니까 다들 호응을 해주신 겁니다.

    ◆고호석> 네네.

    ◇김효영> 마산에서도 같이 일어난 겁니까?

    ◆고호석> 아니죠. 16일날 부산에서 시작했고 여기에 부산대학생, 동아대학생, 또는 뭐 고신대학생 이런 학생들과 시민들이 막 붙으면서 16일, 17일까지 시위가 진행되고 18일 새벽 0시에 부산에 계엄령이, 비상계엄령이 떨어집니다. 그러면서 18일 날은 아무래도 탱크와 총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계엄군들이 막 다니니까 시위가 조금 한풀 수그러들었죠? 그런 상황에 18일 날 경남대학생들이 대학에서 치고 나오죠. 원래 경남대학생들도 원래 18일은 아니지만 시위를 한번해야 된다. 더 이상 우리가 참고 있을 수 없다. 그랬기 때문에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부산에서 막 이렇게 대규모로 터지는 것을 보면서 자기들이 갖고 있던 계획을 당겼다고 그래요. 그래서 18일 날 경남대생들이 시위를 시작했는데 역시 대규모 교내시위가 되었고 시가지로 나왔고. 그 당시 또 마산은 수출자유지역 이래서 한참 공원들이 아주 많던, 그리고 그 당시 공원들의 노동조건이라는 것이 아주 열악한 이런 상황이었거든요. 그래서 마산의 시위는 부산시위보다 훨씬 더 격렬한 양상으로 진행이 되었어요.

    ◇김효영> 마산이 좀 더 격렬했다?

    ◆고호석> 네. 그래서 이 시위가 18, 19, 20일까지 마산에서 쭉 진행되는데 그중에 다시 위수령이 마산지역에 내려지면서 마산도 이제 조금 숨고르기에 들어가 있었죠. 20일 경에는.

    ◇김효영> 지금 들어보면 죄송한 표현입니다만 흥미진진하게 들릴수도 있지만,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학생들이나 시민들은 계엄령까지 발령되었으니까 잡혀가는 것을 각오하지 않았겠습니까?

    ◆고호석> 그냥 잡혀가는 정도가 아니죠. 사실 시위를 처음 주동하는 학생들은 자기 인생을 다 걸은 거죠. 사실은. 당시에는 그냥 일반 시위, 비판 한마디만 해도 징역 1년 정도를 살았는데 시위를 주동해버리면 2년, 3년. 그리고 또 그렇게 대규모 시위가 되어버리고 나면 이건 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고요.

    저는 주동은 아니었거든요. 학교에 상주하는 기관들이 좀 있어요. 정부기관들이. 그 기관들한테 좀 눈에 찍혀있었기 때문에 시위가 한풀 수그러들고 나서 22일 날 저를 잡으러 왔더라고요. 잡아가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라는 곳에 가서 고문을 하면서 막 취조를 하는데 보니까 조직표를 그리는 거 에요, 자기들이.

    자기들은 유신정권이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이렇게 홍보를 해온 거잖아요. 그런데 원래부터 비판적인 호남지역도 아니고 부산, 마산 이런 곳에서 그렇게 대규모로 시민들이 합세한 시위가 벌어지니까 이걸 자기들이 국민들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신군부가 광주항쟁 때 북한에서 뭐가 내려왔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처럼 북한의 사주를 받은 집단들이 시민들을 선동해서 그랬다. 이런 막 그림을 그려서, 조직표를 그려서 왔어요. 그래서 저나 이런 사람들을 거기에 막 집어넣으려고 했는데 아마 그 조직표 그대로 갔으면 저는 아마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26일 날 큰 사건이 생기잖아요.

    ◇김효영>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총으로 쏩니다.

    ◆고호석> 네. 시해하는 그런 사건이 생기잖아요. 근데 우리는 또 그것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지만 유신정권이 안으로부터 무너진 것이죠. 물론 안으로부터 무너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부마항쟁입니다. 부마항쟁에 부산시위와 마산시위를 김재규씨가 직접 내려와서 봤거든요, 자기가. 아, 이게 몇 만 명의 시민이 모여서 이런 정도 되면 이제 유신정권은 시간만 남았지 조만간에 끝난다. 그래서 자기는 조금 유화적인 조치를 취해야 된다.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뭐 박정희나 차지철이나 그런 사람들은 꿈에도 생각이 없으니까 결국 총으로 쏴 버리고 말았죠.

    ◇김효영>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10월 26일 김재규를 움직인 것은 부마항쟁이었다, 이렇게 보시는 거죠?

    ◆고호석> 그렇죠. 부산과 마산의 시민이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게 맞죠.

    ◇김효영> 우리가 4.19를 혁명이라 부르는 것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었다. 그러니까 4.19는 혁명이고 그래서 국가기념일로 당연히 지정이 되었는데요.
    이 부마항쟁은 직접적으로 박정희 하야를 이끌어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다라고 분석하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호석> 그것도 하나의 중요한 이유입니다. 어쨌든 한 닷새 만에 계엄령이 내리면서 일단 좀 숨고르기에 들어갔고요. 그런 상태에서 진주나 또 다른 지역에서 시위를 해야 된다 이런 얘기들이 많이 있었거든요. 반유신시위를 해야 된다 이런 분위기가 있었는데 26일 날 내부로부터 그런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유신의 심장이 죽어버린 거잖아요.
    그럼 대부분의 국민들은 아 이제 유신체제는 끝났다. 그러면 민주주의가 올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한 것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제 다들 시위를 안 한 것이죠. 그랬는데 신군부가 들고 나오면서 이제 다시 군부독재를 다시 하겠다고 한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거에 광주시민들이 80년 5월 달에 들고 일어나는 것인데 그 정신은 부마항쟁과 똑같은 것이죠. 군부독재가 대한민국에서 더 이상 존속해서는 안 된다. 이런 면에서 부산, 마산, 광주의 시민은 기본 성격에서는 꼭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광주항쟁은 너무나 참혹하게 살육을 당하잖아요. 그러니까 부마항쟁을 했던 사람들이 그 광주의 그 참상을 보면서 너무 미안하기도 하고 그 이후에는 광주의 진상을 제대로 밝히고 광주를 제대로 알리는 것이 중요하지 우리 부마를 알리는 게 우선순위가 아니다. 똑같은 뜻이기 때문에 이게 그래서 그 이후에는 학생이든 시민이든 다들 광주에 대해서 참 많은 부채의식을 가지게 되고 그거의 진상규명이나 명예회복. 이런 것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다보니까 상대적으로 그냥 부마항쟁은 그 그늘에 갇힌 거죠. 묻힌 것이 되었죠. 그런데 그 이후 어쨌든 광주는 지금 국가기념일로 다 지정이 되었고 그 이후에 사실 부산, 마산, 광주의 이 투쟁이 하나의 승리로 딱 마무리 되는게 6월 항쟁이잖아요.

    ◇김효영> 1987년 6월 항쟁입니다.

    ◆고호석> 네. 87년 6월 항쟁으로 사실은 부산, 마산, 광주의 우리의 싸움이 승리를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 목적이 달성된 것이죠. 그리고 그 이후에는 대한민국에서 군부독재정권이라는 것은 발붙일 수 없게 된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광주항쟁과 6월 항쟁이 다 국가기념일이 되고 제대로 되었으면 이제는 부마항쟁도 정말 그에 걸맞는 제대로 된 위상을 회복해야 되고 이 투쟁의 시작이 정말 이 투쟁의 찬란한 시작이 부마항쟁이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리고 그 정신을 또 우리 후대들에게 제대로 알리는 게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효영> 기념일은 10월 16일로 결정되 것이죠?

    ◆고호석> 네. 16일이 시작된 날이니까요.

    ◇김효영> 그러면 이제 국가 기념일로 지정하는 것이 필요한 단계인데, 대통령이 결심해서 발표하면 되는 겁니까?

    ◆고호석> 네. 국무회의에서만 통과가 되면 되죠. 그런데 대통령이 아무리 그런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국민들의 동의가 없는데 옛날 왕정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할 수는 없는 것이고요. 그래서 저희들이 제단이 만들어졌으니까 관과 민이 마음을 합쳐서 부산시, 그 다음에 경상남도, 창원시, 울산광역시 전부 힘을 합쳐서 지방자치단체와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전문가단체 상공인 이런 분들이 다같이 힘을 모아서 서명운동도 좀 전개하고 또 정치권에서도 좀 지원을 하고 이렇게 해서 아 이게 정말 국민들의 뜻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고 그런 상태에서 국무회의로 가는 것이 맞지 않겠냐고 생각을 하고요. 그래서 그런 과정을 밟아가려고 합니다. 시민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참여가 필요하죠.

    ◇김효영> 제일 핵심이 그거군요.

    ◆고호석> 그게 제일 중요하죠.

    ◇김효영> 그러면, 마지막으로 부마항쟁이 왜 국가기념일로 지정이 되어야 하는지, 끝으로 다시한번 호소를 해 보시죠.

    ◆고호석> 4.19혁명이 이승만의 그 무능하고 부패한 독재를 끝냈다고 하면 그때부터 18년간 진행되었던 군부독재, 유신독재정권을 무너뜨려야 된다. 그리고 진정한 민주체제로 가야한다고 한 게 부산과 마산시민들이었고 또 그것을 다시 뒤집으려고 하는 군부세력에 항거한 것이 광주항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산과 마산, 광주의 항쟁을 정말 하나의 승리로 이끌어낸 것이 87년 6월 항쟁이었는데 이 일련의 사건들은 대한민국 현대사에 있어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리 잡는데 있어서 정말 결정적인, 기념비적인 역할을 한 사건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마음을 우리가 제대로 기억하고 계승하지 못하면 또 언제 우리가 몇 년 전에 또 제작년에 그 추운 겨울에 촛불을 들고 길거리로 나가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처럼 민주주의는 언제든지 위협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을 우리가 제대로 지키고 또 후대들에게 제대로 알려서 다시 그런 가슴 아픈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부마항쟁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해서 두고두고 대대로 기념하고 계승하고 교육하고 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효영> 한 마디도 더하거나 뺄 필요가 없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민주주의가 사실은 39년 전 선배들의 희생위에서 가능했다는 점을 오늘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요. 국가기념일 지정까지 열심히 활동해주시기 바랍니다.

    ◆고호석> 네, 고맙습니다.

    ◇김효영>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부마민주항쟁 기념재단의 고호석 상임이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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