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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뒤의 사람들, '그만 무시당하고 싶어' 노조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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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메라 뒤의 사람들, '그만 무시당하고 싶어' 노조 만들다

    [노컷 인터뷰]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김두영 지부장

    지난 5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한 카페에서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김두영 지부장을 만났다. (사진=김수정 기자)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청년 전태일은 △하루 근무시간 10~12시간으로 단축 △휴일을 매달 이틀→매주 일요일(4일)로 연장 △정확한 건강검진 △시다공 임금 하루 70~100원에서 50% 인상 등을 요구했다.

    그로부터 48년이 지났다. 모든 사업장이 지키는 것은 아니지만 주 5일 근무제가 자리 잡았고, 이제는 한발 더 나아가 '주 52시간 근무제'가 화두로 떠올랐다. 하지만 방송가 시계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카메라 뒤의 사람들은 아직도 하루 12시간 노동, 규칙적인 휴식시간과 점심시간, 근로계약서 작성 등을 요구한다. 이처럼 아주 기본적인 것들조차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4일,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지부장 김두영)가 국회 의원회관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탄생'을 알렸다. 노조 출범에 뜻을 같이해 온라인 가입서를 낸 사람만 1천여 명에 이른다. 창립총회 당일에 현장에서 가입한 인원도 60여 명 가까이 됐다. 방송스태프들이 뿔뿔이 흩어져있는 노동자들을 하나로 모을, 정식 교섭단체로서의 '노조'를 얼마나 원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방송스태프지부 창립총회 다음날이었던 지난 5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한 카페에서 김두영 지부장을 만났다. 올해 10월이면 방송 조명 일을 한 지 15년이 된다는 그는 '노조는 처음'인 인물이다. 하지만 방송스태프들의 노동환경을 개선하겠다는 의지만은 뚜렷했다. 올해 안에 실질적인 사용자인 방송사, 제작사와 테이블에 앉아 논의하겠다는 각오다.

    ◇ 오랜 시간 무시당했던 방송스태프들, 용기를 내다노컷 인터뷰

    김 지부장은 지난 2016년 말 다른 직군에 속한 스태프들과 함께 한국드라마스탭협의회를 만들면서 활동을 시작했다. 근로기준법 59조 철폐(방송업의 특례업종 제외)와 최저임금 실현을 목표로 한 협회에는 짧은 기간 800명이 넘는 드라마 스태프들이 모여들었다.

    당시는 방송사가 경영 상황 악화를 이유로 기존에도 충분치 않았던 제작비를 줄일 때였다. 매년 오르는 물가를 생각하면 늘 손해였다. 보통 5명으로 구성된 조명팀의 하루 단가를 240만 원이라고 하면, 당시에는 10~20만 원 깎인 채로 받았다. 몇 시간을 일한다는 게 고정돼 있지 않았기에 장시간 노동은 기본이었고, 셈해 보면 최저임금에도 못 미쳤다. 김 지부장은 "(드라마 현장에서는) 근로시간을 24시간으로 본다. 아까 말한 일당으로 하루를 부릴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부족한 제작비 때문에 해외 촬영 당시 운전까지 직접 하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故 박환성-김광일 PD의 죽음 이후 결성된 독립PD노조추진위원회와 방송가의 부당한 갑질 행태를 세상에 적극적으로 알렸던 방송계갑질 119를 거쳐, 지난 5월 마침내 방송스태프노조 준비위원회가 꾸려졌다. 특정 직군으로만 제한된 게 아니라 방송 전 직종의 비정규직 스태프와 외주제작사 노동자를 대변하는 노조가 필요하다는 데 뜻이 모아진 덕이다.

    지난해 4월 24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CJ E&M 사옥 앞에서 열린 'tvN 혼술남녀 신입조연출 사망사건 대책위원회 기자회견' 참석자들이 손피켓을 들고 있는 모습.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과거에도 노조를 만들려는 시도는 있었다. 지난 2006년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은 외주사 소속이거나 프리랜서인 PD들을 아우르는 연출·감독지부를 창립했다. "외주 연출자들도 스태프의 한 사람인데 권익 보호장치가 전혀 없고, 연출료 기준과 연출자 현황조차 없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제대로 활동하지는 못했다.

    김 지부장은 "이 직종은 특히 한번 찍히면 일하기가 힘들어진다. 방송사들이 (블랙) 리스트를 만들어 공유해 버리니까. 10년 전에도 일부 직군들이 (노조) 하려다 실패한 적이 있다. 그때 이름 올렸던 사람들이 아직도 피해를 보고 있다. 50, 60 먹고도 조명감독 입봉을 못 하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저도 이거(노조) 잘못되면 밥줄이 끊긴다"며 웃었다.

    웃으며 말했지만, 간단한 일은 아니다. 방송가는 노조를 만드는 것 자체가 하나의 도전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그런데 지부장이라는 중책까지 맡게 된 사연은 뭘까. 김 지부장은 "PD, 작가 등이 큰 규모로 합해지면서 저절로 용기가 생긴 것 같다"고 답했다.

    같은 직군끼리 뭉쳐서 목소리를 냈으나 효력이 없었던 과거의 쓰라린 경험도 한몫했다. 그는 "드라마 현장엔 전기를 공급하는 발전차가 1개씩 다 들어간다. 발전차 담당하는 사람들끼리 연합회를 만들어 발전차 단가가 낮다고 계속 목소리를 냈는데도, 전혀 안 먹히더라. 공식적인 단체가 아니니 협상 대상이 아니라는 거였다. 상대 안 하면 그만이란 식이다. 반드시 법적 효력을 가진 단체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만 무시당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희망연대노조와 연을 맺게 된 것에 대해서는 "비정규직 노조 결성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비정규직 노조 문제에 힘을 쏟고 조직해 왔기에, 우리에게 맞는 곳은 여기라고 생각했다. 또 (방송스태프들을) 잘 이해하고 협조할 수 있는 곳이라고 판단해 함께하게 됐다"고 말했다.

    ◇ 방송스태프들이 울분에 찬 이유, 형편없는 노동환경

    방송스태프지부의 요구는 단순하다. 사람답게 일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노조는 △초과노동 중단 및 노동시간 단축 △정당한 임금과 초과노동 수당 지급 △점심·휴식시간 보장 및 안정적 식사 제공 △하루 8시간 수면권 보장 △야간촬영 종료 시 교통비·숙박비 지급 △불공정한 도급계약 관행 타파 및 노동인권 존중 △근로시간과 그에 따른 적정임금 명시된 근로계약서 작성 △모든 방송제작 스태프 차별 금지 및 인권 존중 등 8가지 요구에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최소한의 권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노조가 운영 중인 방송 신문고에는 방송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부당행위가 실시간으로 올라온다. 정부가 주 52시간 노동을 힘주어 말하고 있지만 아직 방송가에선 낯선 개념이다. 김 지부장은 "밥 제때 안 먹은 것, 시간 초과한 것 등 지금도 여전히 그런 짓들을 하고 있다. 밤새기 일쑤"라고 부연했다.

    "이 얘기는 그냥 나오는 게 아니에요. 가슴에서 나오는 겁니다. 스태프들이 진짜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제일 고통스러워하는 문젭니다. 쉽게 꺼내질 못하겠어요. 너무 맺히다 보니까. 진짜 저희는 거지 취급받는 것 같아요. 종도 아니고 거지요. (방송사-제작사가) 너무 그런 행태를 보이니까 그게 울분으로 올라와요."

    지난해 12월 23일, tvN 주말드라마 '화유기'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가 추락사고를 당해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았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은 사고 5일 후인 12월 28일 현장을 찾았으나 여전히 낙상사고와 화재 위험 등에 노출돼 있었다고 밝혔다. (사진=전국언론노동조합 제공)

     

    김 지부장이 인터뷰 중이라 짧게 끊었던 통화 주인공도 드라마 촬영 현장 스태프였다. 김 지부장은 "지금 전화 온 친구도 현장에 있는데, 어제 아침 7시에 출발해서 거의 새벽까지 찍고 사우나 갔다가 또 지역에 내려갔다고 했다"고 말했다. 아침 일찍 모여 다음 날 새벽에 촬영을 마치고 3~4시간 있다 다시 모이는 이런 일정은 어떻게 가능한 걸까.

    김 지부장은 "주 52시간 하기 전에는 초과노동(휴일노동 포함)까지 해서 주 68시간을 하지 않았나. 그건 일주일을 7일 기준으로 한 거다. 그런데 촬영은 4일, 3일씩 하면서 68시간을 맞춰버린다. 이게 꼼수다. 탄력근무제는 정규직들만 가능한 일이다. 저희는 일을 안 하면 (돈을) 못 받는다"고 말했다.

    "노동시간이 준수되면 우리도 저녁이 있는 삶을 살 수 있잖아요. 가족과 같이. 삶의 질을 개선하자는 거죠. 그런데 절대 안 합니다. (하루 노동시간이 줄면) 촬영일수가 늘잖아요. 촬영일수를 줄일수록 이익이 남으니까, (무리한 일정을) 계속 강행하는 거죠. 저희가 하루 12시간 일하자고 하는데, 나눠서 찍으면 돼요. 오전 7시에 출발해서 저녁 7시까지는 낮 씬을 찍고 끝내는 식이에요. 그동안은 (사람들을) 쥐어짜셔 폭리를 취했는데, 그게 줄어들 것 같으니까 반발하는 거예요. 하루 12시간만 찍으면 일수가 많이 나올 거고, 제작비가 올라갈 게 빤하니까요."

    극한으로 모는 빡빡한 일정은 위험의 출발점이 된다.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노동자들은 자주 다친다. 김 지부장에 따르면, 용인 세트장에서 사극을 찍던 한 스태프는 주변이 어두운 까닭에 계단에서 엎어졌고 눈 위를 크게 다쳤다. 그를 대신해 새로 들어온 다른 스태프도 같은 세트장 다른 장소에서 또 다쳤다. 제작비를 최소화해야 하므로, 현장의 안전 역시 방치돼 있다. 김 지부장은 "안전 관리를 따로 하지 않는다"며 촬영 현장은 위험이 도사리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사고가 일어나도 방송사와 제작사는 법적 책임이 없다. 제대로 된 근로계약서도 없이 일할뿐더러, 한 팀을 대표하는 선임이 턴키 방식(단일 계약자가 다른 사람들 것까지 함께 일괄 계약 하는 것)으로 이뤄지는 계약을 한다고 해도 양측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조항은 없기 때문이다.

    ◇ 하루 12시간 노동, 근로계약서 쓰기, 개별계약하기

    하지만 희망을 걸 수 있는 부분들은 분명히 있다. 우선, 일부 직군에서 나타나고 있는 '인력 정체'를 들 수 있다. 잠을 제대로 못 자고, 끼니도 잘 못 챙길 만큼 오래 일하고 단가도 싼 일에 제 발로 찾아오는 이들이 드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새로운 인력은 들어오지 않고, 중견급 이상의 경력자들만 남는 구조로 변해가고 있다.

    김 지부장은 "아직까지는 어떤 사람이 다쳐도 사람을 구할 순 있다. 경력자들이 많으니까. 하지만 앞으로는 좀 힘들어질 거라는 거다. 저희(조명)는 이미 심각해져 있다. 단가에 맞추려면 (가장 저렴한) 막내를 구해야 하는데 올 사람이 없으니까"라며 "감독, 퍼스트, 세컨드, 서드, 막내가 있는데 4~15년차는 엄청 많지만 3년차 이하가 없다. 공청회에 갔을 때 산업 전문가가 그러더라. (인력 정체 현상이) 심각한 수준에 도달했다고"라고 전했다.

    방송가 안팎의 움직임도 있다.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등이 탄생했고, 아직 선언 수준이긴 하지만 KBS-MBC-EBS 등 공영방송 사장들도 비정규직과의 '상생'을 과제로 내건 바 있다. 이전보다 비정규직 정규직화 등 전반적인 노동환경 개선을 추진하는 새 정부가 들어선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김 지부장은 "정부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어서 희망적인 기대를 갖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나마 노동자들을 생각하는 정책을 많이 추진하고 있지 않나"라고 말했다.

    김두영 지부장이 인터뷰 도중 방송스태프들의 계약 형태에 대해 도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모습 (사진=김수정 기자)

     

    방송스태프지부는 온라인으로 가입 신청서를 낸 사람들을 정식 조합원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촬영 현장에서 가입서를 받고 있기도 하다. 5일 기준으로 방송스태프지부에 정식 가입한 노조원은 300여 명에 이른다. 김 지부장은 "당장 자기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공론화하니까 호응이 좋은 것 같다"고 전했다.

    또한, 창립총회 때 밝힌 8가지 요구 중 '하루 12시간 노동 준수', '근로계약서 쓰기', '개별계약' 3가지를 우선 추진할 예정이다. 김 지부장은 "1차적으로는 현장에서 제작사나 연출자가 마음만 먹으면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하려 한다. 지금 스태프들은 12시간만 지켜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일 거다. 밥 시간 제대로 주는 것도 있다. 예전에는 1시간 줬던 걸 이제 40~50분만 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노동환경이 근본적으로 나아지기 위해서는 결국 방송사와 제작사가 나서야 한다. 방송스태프지부는 올해 안에 한 테이블에 앉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방송사-제작사가 상대해주지 않을 위험도 있다. 실제로 KBS-MBC-SBS-JTBC 등 방송사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자사 뉴스에서 방송스태프지부 창립 소식을 11일 현재 단 한 건도 보도하지 않았다. 온라인용 뉴스조차 없다. 김 지부장은 "(저희는) 일을 그렇게 지독하게 해 왔던 근성 있는 사람들이 모인 거라서 단단한 조직"이라며 "지금은 포기할 수 없다는 마음과, 주변의 도움과 격려가 있어서 자신 있게 도전하려고 한다"고 답했다.

    "우리가 이제는 권리를 찾아야 합니다. 몇십 년 동안 변한 게 없어요. 개인이 아무리 목소리 내도 들어주지 않았고요. 노조가 답입니다. 노조로서 모든 걸 해결해야 해요. 모두 누가 노조 좀 만들어줬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고, 그래서 시기가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저희는 3천~4천 조합원 정도를 기대하고 있어요. 각 분야 스태프들이 다 모여서,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근로자로 인정받을 수 있게 요구할 겁니다.

    (개별 근로계약서를 쓰면) 훨씬 나아지겠죠. 그럼 일하는 사람들도 더 책임감이 생겨요. 일도 워낙 힘들고 소속감이 없으니까 첫날 나갔다가 다음 날 안 나가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고용노동부에 문의하니 기간별 노동자로 인정되면, 특정 기간 제작사 소속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제작사에서 주는 월급 받고, 4대 보험도 요구할 수 있고요. 법을 지켜서 환경이 나아지면, 신규 인력도 새로 들어오겠죠. 생산성 면에서도 좋아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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