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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푹 팬 눈에서 눈물 뚝뚝…베트남전 한국군 학살, 그 이후



사건/사고

    움푹 팬 눈에서 눈물 뚝뚝…베트남전 한국군 학살, 그 이후

    [베트남의 눈물①] "불바다 뚫고 나왔지만…평생 다리절며 정신질환까지"

    1960~70년대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 일부는 전쟁과정에서 대규모학살과 성폭행 등으로 민간인 수천 명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후 50년이 흘렀으나 생존자들에게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며 나아가 희생자 2세에까지 대물림되고 있다. CBS노컷뉴스는 한베평화재단과 한국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가 주최한 '베트남 평화기행'에 동행해 피해의 흔적을 따라가며 가해자로서 한국의 책임 역시 여전하다는 것을 되짚어 본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움푹 팬 눈에서 눈물 뚝뚝…베트남전 한국군 학살, 그 이후
    (계속)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이 민간인학살을 자행한지 50년이 지났지만 이를 경험했던 생존자와 희생자 2세 등 피해자들의 몸과 마음에는 전쟁의 상처가 오롯이 남아 있었다. 외려 덧나고 있었다.

    ◇ 한국인 시선 회피하는 하미학살 생존자

    지난 4일 베트남 중부 꽝남성에 위치한 하미마을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위령비에서 평화기행단을 만난 쯔엉티투(79) 씨. (사진=김광일 기자)

     

    해병대 청룡부대가 베트남 중부 꽝남성 하미마을을 휩쓸고 지나간 건 지난 1968년 1월 24일(음력). 당시 28세이던 쯔엉티투(79) 씨는 이날 총과 수류탄 파편에 맞아 두 다리, 엉덩이, 허벅지 등을 크게 다쳤다.

    평화기행단이 찾은 지난 4일 만남에서도, 쯔엉티투 씨는 취재진과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한국군이 가족을 죽이고 자신을 불구로 만든 날이 생생하다 못해, 여전히 그 피해가 자신과 자식의 몸에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당시 쯔엉티투 씨는 생후 3~4개월 된 막내딸과 함께 자택 안방에 있었다고 한다. '따이한(대한)'으로 불리던 군인들이 마을 한쪽으로 주민들을 불러냈지만 출산 직후의 여성이 아이 셋을 데리고 나가기는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별안간 집으로 들이닥친 군인 몇 명이 다짜고짜 총을 쏘기 시작했다. 큰딸(7)과 아들(4), 쯔엉티투 씨의 새언니 2명, 올케 1명, 조카 7명이 순식간에 싸늘한 주검으로 변했다. 난사를 마친 군인들은 곧이어 불을 질렀다.

    한쪽에 특수제작한 신발을 신고 있던 쯔엉티투 씨의 발(사진=독립PD 길바닥저널리스트 제공)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쯔엉티투 씨는 막내딸을 둘러업고 허겁지겁 집 밖으로 도망쳐 간신히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지만, 다친 오른발을 잘라내야 했다. 끊어진 발목 쪽 통증은 50년간 이어졌다. 그는 특수제작한 신발을 신고서도 부축 없이는 걷지 못하는 처지다.

    그의 품에 안겨 있었던 막내딸 역시 평생 다리를 절며 살아왔다고 한다. 쯔엉티투 씨는 "아이는 이때 큰 충격을 받고 정신에 이상이 생겼다. 다른 아이와는 달리 정신질환까지 갖고 살아야 했다"고 말하며 고개를 떨궜다.

    ◇ 가족 모두 학살 피해…움푹 팬 눈으로 울며 "한국군 원망"


    하미학살 생존자 故 팜티호아 씨의 아들 럽 씨(사진=김광일 기자)

     

    당시 한국군들에 이끌려 하미 마을 3곳으로 각각 모였던 주민들은 M60 기관총과 M79 유탄발사기 등의 중화기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대부분은 여성이나 어린아이, 노인 등으로 영문도 모르고 희생된 사람들이었다.

    이후 일주일쯤 뒤 한국군이 마을을 떠나면서 주민 135명의 시신은 참혹하게 훼손된 채 발견됐다. 일부는 불도저에 밀려 짓밟혀 있었고 화염이 휩쓴 자리는 잿더미로 변했다. 소수의 생존자와 주변 마을 주민들은 그제야 흩어진 살점과 뼛조각을 주워 모았다.

    학살 당시 다른 도시에 있어 겨우 화를 면했던 럽 씨의 경우 다섯 살배기 여동생을 비롯해 6명의 가족을 잃었다. 어머니인 팜티호아 씨는 현장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양쪽 발목을 모두 잃고 지난 2013년 87세의 나이로 숨졌다고 한다.

    가족을 덮친 불행은 럽 씨마저 집어삼켰다. 전쟁 후 황무지로 변해버린 고향 땅을 개간하다 불발탄에 두 눈을 잃게 된 것이다. 움푹 팬 한쪽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연신 쓸어내리던 럽씨는 "그동안 한국군을 정말 원망했고 화도 많이 내고 살았다"며 "이제는 용서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 "엄청난 통증…부모형제 없어 식모살이"

    퐁니·퐁넛학살 생존자 응우옌티 탄(57) 씨(사진=조우혜 작가/한베평화재단 제공)

     

    같은 해 2월 12일(양력) 다낭에서 남쪽으로 25㎞ 떨어진 퐁니·퐁넛마을에서는 주민 74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주월 미군사령부와 베트남 당국 등은 이날 마을을 지났던 해병대 청룡부대가 학살을 자행한 것으로 지목하고 있다.

    마당에서 놀던 6명의 아이는 요란한 총성을 듣고 깊이 1m, 폭 4m의 작은 동굴에 숨었지만 곧바로 발각돼 온몸으로 총탄을 받아내야 했다. 당시 8세이던 응우옌티 탄(57) 씨는 배 밖으로 튀어나온 창자를 부여잡고 도망쳐 미군에 구조됐다. 그의 동생은 입이 다 날아간 채 숨졌고 함께 있던 아이들도 총·칼을 맞아 즉사했다. 어머니는 마을 어귀에 있던 시신 더미에서 뒤늦게 발견됐다.

    현지 기상 악화로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한베평화재단을 통해 "비가 오면 총상을 입었던 부위에 장이 꼬이는 것 같은 엄청난 통증"을 느낀다는 탄 씨의 증언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는 "부모형제 없이 사는 게 너무 힘들었다"며 식모살이부터 공사장에서 벽돌을 나르는 일까지 안 해본 일이 없는 자신의 삶을 고통스럽게 회고했다. 특히 그는 "먼저 간 엄마를 오래 원망하며 살았다"고 한다.

    이달 초 태풍 '담레이'가 덮쳐 침수된 베트남 중부(사진=김광일 기자)

     

    이처럼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은 약 80건, 희생자는 모두 9천여 명으로 지난 2000년 집계됐으나 추정규모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한베평화재단 구수정 상임이사는 "새로 학살목록을 만들고 있는 꽝남성의 경우만 해도 이미 2000년 발표된 것의 2배가 넘는다"며 "자료를 단서로 새로운 마을에 들어가면 기록되지 않은 새로운 학살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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