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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프로농구 10년간 女지도자 없는 건 구조적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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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女프로농구 10년간 女지도자 없는 건 구조적 문제"

    • 2007-12-10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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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한국농구 100년사를 빛낸 농구인, 박찬숙

    우리나라에서 농구가 시작된 지 올해로 100년이 됐습니다.100년 농구사에 가장 기억에 남는 명승부하면, 어떤 경기가 떠오르세요? 아마 많은 분들이 1984년 LA올림픽에서 여자농구팀이 중국(당시, 중공)과 벌였던 눈물의 경기를 기억하실 겁니다. 만리장성의 높은 벽을 넘어, 올림픽 출전 사상 최초로 구기 종목에서 은메달을 획득하던 순간, 기쁨에 넘쳐 선수들과 감독은 코트 위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했죠. 그 가운데, 우리에게 영원한 농구스타로 기억되는 선수가 있습니다.

    최연소 농구국가대표선수, 아시아 여자농구대회 4연패를 기록한 선수,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최고의 센터, 또 우리나라 최초 여자농구대표팀 감독, 대한체육회 부회장까지 농구인 박찬숙 씨에게는 ‘최고’와 ‘최초’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니는데요.농구의 살아있는 전설로 1970 · 80년대 코트를 화려하게 누비던 박찬숙 씨를 12월 4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아이들과 함께 하는 ‘농구교실’로 행복한 시간

    ▶ 오랜만이신데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요즘 아주 바쁘게 지내고 있고 특히 ‘박찬숙 농구교실’을 시작하게 돼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아이들한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시간이거든요.

    ▶ 박찬숙 농구교실은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시작은 올해 8월 4일부터 개점했는데 지금 줄 서 있어요. 한 호점에 정원이 210명인데 더 들어오겠다고 하고 있거든요.

    ▶ 부모들이 자식을 스포츠 스타로 키우겠다는 생각도 있지만 스포츠를 어려서부터 즐기게 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 같은데요

    요즘 아이들이 동적인 활동보다는 책상에 앉는 시간이 많잖아요. 저희 농구교실이 농구만 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실제로 오셔서 보면, 저 혼자만 하는 게 아니고 대학원 교수님도 계시고 농구과학연구소의 연구원들도 있어요. 회의를 통해서 아이들이 성장하는데 운동을 통한 자신감이라든지 협동심 등의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해서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학부형들의 관심과 인기가 대단해요.

    ▶ 농구를 하면 키가 커진다는 말도 있어요.

    맞습니다. 농구는 자세를 낮춰서 높이 뛰는 운동이기 때문에 성장판 발육을 도와줘요. 저도 키가 크다는 이유로 농구를 시작했지만 농구를 통해서 더 많이 컸어요.

    ◇ 큰 키는 집안 내력, 유전적 잠재력도 한 몫

    ▶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농구를 시작하셨는데 키가 얼마나 되셨어요?

    170이었어요.(웃음) 아이들과 하교할 때는 다른 아이들이 선생님인 줄 알고 인사도 하고 그랬어요.

    ▶ 키가 커서 불편하셨어요, 아니면 좋으셨어요?

    지금은 자신의 콤플렉스를 교육적인 측면에서 좋은 쪽으로 이야기해주는데 저희 때는 키가 크거나 뚱뚱하거나 마르거나 작거나 하면 놀림을 받았어요. 저를 키다리, 꺾다리 그러면서 많이 놀렸어요. 그때는 내성적이라 표현도 못하고 마음속으로 끙끙 앓다가 엄마한테 가서 엉엉 울면서 학교 가기 싫다고 땡깡을 많이 부렸어요. 농구하기 전에는 많이 놀림을 받았죠.

    ▶ 키가 크신 게 부모님의 영향인가요?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크세요. 아버지는 173정도 되시고 어머니가 180 가까이 되셨으니까요. 오빠도 저와 키가 비슷하고 밑의 여동생 둘은 174 정도 돼요.

    ▶ 태어나신 곳이 동대문이라서 동대문 철거 반대운동에도 참여하셨나 봐요.

    스포츠의 유적지가 사라진다는 건 체육인의 한 사람으로서 굉장히 안타깝고 슬픈 일이에요. 체육인을 무시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물론 서울시의 행정도 이해가 가지만 유적지가 사라진다잖아요. 제가 농구하기 전에 키가 크다는 이유로 체육선생님이 학교 대표로 육상선수로 나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육상대표로 나갔던 기억이 있는데 처음 육상경기를 치룬 곳이 동대문운동장이었거든요. 그걸 계기로 제가 농구에 첫발을 디딘 게 아닌가 생각해요.

    ▶ 중학교 때는 어떠셨어요?

    중학교 때까지는 계속 농구를 했었어요. 제 키가 중학교 3학년 때 키인데 운동하면서 계속 커서 190 가까이 되었어요. 그리고 부모님이 학창시절에는 육상을 하셨대요. 그래서 유전적으로 잠재적인 부분이 있었고 농구를 시작하게 되니까 그게 발휘된 거예요. 같이 농구를 시작했거나 먼저 시작했던 선배들보다 제가 자꾸 앞서가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러면서 매스컴에 자주 나오게 되고 앞으로 여자농구의 미래를 짊어질 선수라고 하니까 부담도 되었지만 또 그것 때문에 발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숭의여고에 입학하자마자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이 되고 고생문이 열린 거죠.(웃음)◇ 2m 20cm 장신과 맞대결, 앞이 하나도 안 보여

    ▶ 국제경기 첫 데뷔는 언제 하신 거예요?

    최연소 국가대표가 되자마자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가 남미의 콜롬비아에서 있었어요. 이틀을 비행기를 타고 콜롬비아에서 데뷔를 했었죠. 엔트리 12명에 들어갔는데 제일 막내였어요. 그래서 선배언니하고 나이 차이가 만 10년이었어요. 1년 차이만 나도 어렵고 부담스러운 자리인데 나가게 된 거죠.

    ▶ 어느 팀과 경기를 치렀어요?

    소련이었는데 세미노바라고 소련에 유명한 센터가 있었어요. 이 선수키가 2m 20cm였어요. 제가 최연소 국가대표가 된 것은 실력이 월등해서가 아니라 당시에 국내선수 중에 저만큼 큰 선수가 없었기 때문에,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장신선수가 나왔다고 해서 미래를 키워줘야 한다고 국제대회를 경험하게 한 거예요.

    실력은 둘째 치고 국내에서 가장 크니까 세계에서도 크지 않을까 하고 약간 우쭐해있었는데 제가 키가 크니까 포지션이 센터였어요. 그런데 경기를 치른 상대편 선수들은 모두 2m가 넘었어요. 그래서 깨달았죠. 자만하면 안 되겠구나, 나보다 키가 큰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더 발 빠르게 움직여야겠구나 하고 말이죠. 그리고 돌아와서는 저와 비슷한 파트너하고는 절대로 같이 운동 안 했어요. 움직임이 재빠른 선수와 같이 했죠. 롱다리가 발이 빠르면 더 능률적이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 ‘미스 월드 바스켓’에 선정된 건 몇 살 때였어요?

    최연소 국가대표가 되고 세계여자선수권대회에 출전하면서 그런 큰 영광을 받았는데 사실 그때는 선생님이 뛸 수 있는 기회만 주시면 너무 감사해서 열심히 뛰었어요. 하지만 호흡을 맞추는 선배언니들은 마음에 안 들었을 거예요. 그래서 게임 밖에서는 언니들 뒷바라지를 열심히 한 기억밖에 없는데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개인에게 주는 상이 있어요.

    기자들이 뽑은 포토제닉, 베스트5 등, 저는 미스 월드 바스켓이라는 상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모든 경기가 끝나고 폐회식을 할 때 저희 한국 선수들은 한국을 알리기 위해서 유니폼 대신에 한복을 멋지게 차려입었어요. 그때 주최측과 기자단이 뽑은 미스 월드 바스켓이 제가 선정돼서 정말로 얼떨결에 받았는데 얼마나 기뻤겠어요? 하지만 언니들을 제치고 막내가 받은 거라서 이걸 표현도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담고 한국에 돌아왔죠.

    ▶ 대회 결과는 어떻게 됐어요?

    당시에 세계 5위를 했어요.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었고 목표는 세계 3위 이상이었어요.

    ▶ 세미노바 선수가 2m 20cm라고 하셨는데 막상 맞서니까 느낌이 어땠어요?

    맞서는 순간 제가 뒤에 섰는데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 거예요. 등밖에 안 보여요. 그래서 국내에서 경기를 할 때 선수들이 나를 짓궂게 굴고 꼬집고 귀찮게 하는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앞이 안 보이니까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그러니까 귀찮게 하면 득점을 덜하게 되잖아요.

    ◇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은 1984년 LA올림픽 중국 이겼을 때

    ▶ 박찬숙 선수에게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은 아마도 84년 LA올림픽 때가 아닌가 싶은데요. 은메달을 땄는데 대단한 성과였어요.

    구기 종목에서 여자 농구가 은메달을 획득했죠. 75년도에 최연소 국가대표선수로 시작해서 84년에는 박찬숙의 농구인생을 잘 마무리할 수 있는 완숙기였어요. 주장으로 출전해서 올림픽에 가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생각했는데 당시에는 중국을 중공이라고 했는데 여기를 이겨서 은메달 확보가 됐어요.

    중공은 항상 저희에게 숙적이었어요. 2m 10cm 진월방 선수, 2m 5cm 정하이샤 선수, 이 선수들은 키도 크고 덩치도 커서 이들을 막으려면 제가 수십 번은 뒤로 넘어져요. 나중에 중공하고 경기가 끝나면 하도 부딪치고 넘어져서 엉덩이에 감각이 없어요.

    그리고 제가 막고 있는데 그 선수들이 돌아서면서 날아오는 팔 뒤꿈치에 얼굴을 맞으면 입가나 입속이 찢어져서 꿰매는 경우도 많았어요. 그래서 중공하고 경기를 하게 되면 전날은 잠을 못 자요. 또 그런 고민 없이 중공을 이길 수도 없었고요. 당시에 중공은 아시아의 최고였고 세계에서도 상위권에 들었거든요.

    ▶ 7,80년대가 우리 여자농구에서 가장 화려했던 시기로 평가받고 있어요.

    올림픽이며 세계선수권대회, 그리고 79년도에는 세계선수권대회를 한국에서 치렀어요. 이때는 세계 2위를 했죠. 75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소련이 거의 30점 이상 차이 날 정도로 막강했고 80년대는 미국이 거의 압도를 했어요. 저희도 경기를 앞두고 남자 고등학생들과 연습을 해요. 그런데 미국과 할 때는 거의 남자와 하는 것 같아요. 신장, 탄력, 기술면까지 압도적이죠. 그래서 1위로 등극하지는 못했지만 한국 여자농구를 세계권으로 끌어올렸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 얼굴도 예쁘셔서 팬레터도 많이 받으셨겠어요.

    만나주세요, 결혼해주세요. 안 만나주니까 나중에는 집 담을 넘는 사람도 있어서 부모님이 당황해하시고 그러셨어요. 지금은 문자나 컴퓨터 이메일로 보내는데 그때는 그런 게 없으니까 하루에 라면박스에 한 가득씩 팬레터를 받아봤어요. 그리고 1년 365일 중에서 합숙이나 대회전지훈련, 세계대회 등에 참가하면 집에는 평균 50일 정도밖에 안 와요. 저를 만나겠다고 태릉선수촌에 가도 면회 안 되고 하니까 집으로 찾아오는 팬들도 많았어요.

    ◇ 은퇴 후 바로 결혼, 남편은 가장 든든한 팬

    ▶ 태평양에서 실업선수로 활동하신 건 언제인가요?

    고등학교 3학년을 졸업하면서 실업팀으로 가게 됐어요. 드래프트로 태평양화학에 입단을 하게 된 거예요. 그게 78년도에요. 1억 원을 제시한 곳도 있었는데 그곳에는 못 갔고 태평양화학의 신동파 감독님이 저를 뽑으셔서 신동파 감독님 밑에서 선수로 뛰었어요. 지금도 그 기록을 못 깨고 있는데 태평양에 들어가서 35연승을 했어요.

    태평양에 들어가서 더 매스컴화가 되고 제 이름 석자가 한국여자농구의 대들보, 간판스타, 박찬숙이 이끄는 태평양화학 등 이런 식으로 타이틀이 나니까 저절로 어깨가 무거워지고 팬들한테 실망을 안겨줘서는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더 많이 노력했어요.

    ▶ 올림픽 끝난 이후에 85년도에 은퇴를 선언하셨어요.

    그때 나이가 28이었는데 은퇴할 시기라고 생각했었어요. 당시에 그 나이면 물러나라, 시집도 안 가냐, 이런 식으로 물러나야 하는 압력이 있었어요. 그리고 일찍 국가대표가 되면서 합숙 등 너무 혹사를 한 거예요. 나만의 시간을 가져본 적도 거의 없고요.그래서 단순하게 시집을 가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후딱 가버렸어요.(웃음)

    ▶ 결혼하신 남편은 어떤 분이세요?

    그냥 평범한 사람이에요. 제가 운동하다가 간혹 몸이 아프거나 다치면 다니는 병원이 있었어요. 자주 다니니까 병원 원장님도 관리를 자주 해주시곤 하셨는데 동생분이 병원에 놀러오셨다가 제가 치료받는 것을 보고 너무 반가워하시면서 팬이라고, 이렇게 만나게 돼서 너무 반갑다고 말을 자연스럽게 붙이시는 거예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그분이 그러면 국가대표 선수들과 자기 멋진 친구들이 있으니까 미팅을 한 번 하자고 하세요. 그래서 우리는 주말에 한 두 시간밖에 시간이 없으니까 그때 보자고 그랬지요. 굳이 사양할 이유가 없어서 만났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었어요. 원장 동생분의 친구인 거죠.

    ▶ 어떤 점이 가장 마음에 드시던가요?

    세월이 흐르면서 좋아지고 정이 들었던 것 같아요. 저도 한참 운동할 때라서 결혼할 생각이 아니었고 남편도 그걸 아니까 팬 입장으로서 저를 항상 보호해줬어요. 자주 만나지 못하니까 주로 편지나 전화를 많이 했는데 부담되는 편지라던가 그런 게 없었어요.그래서 죽도록 사랑해, 너 없으면 안 돼, 우린 이런 거 없이 결혼했어요.(웃음)

    ◇ 프로구단 10년 동안 여성 지도자 없어

    ▶ 두 달 전인가요, 여성이라는 이유로 감독선발에서 탈락됐다, 고용차별에 대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냈다... 이런 일이 보도됐는데요.

    제가 활동할 때는 순수 아마추어였는데 지금은 프로화가 됐어요. 한국여자프로농구가 탄생한지 만 10년이 됐는데 그 동안 여성감독이 단 한 사람도 나오지 않고 있어요. 박신자 감독도 실업팀의 감독을 했지만 그때는 아마추어였고 오래 하시지는 못했어요.

    만 10년 동안 여자프로농구가 이어진 동안 여성 지도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여성 지도자를 꿈꾸며 준비하고 공부하는 여성들은 있거든요. 제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낸 상황도, 제가 제안을 한 게 아니고 감독자리가 비어 있으면 선발을 하잖아요.

    예전부터 객관적인 기준이 아닌 학연, 지연 등의 인맥을 통해서 감독을 뽑는 게 관행이었어요. 프로가 되면서 더구나 6개 구단밖에 안 되기 때문에 경쟁적으로 치열해지니까 면접을 본다고 하는데 사실 저한테 제안이 왔어요. 그래서 정말 준비된 감독이라는 제안서를 100페이지 정도 제출하고 풍부한 경험으로는 남들보다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요. 거기에 지도할 수 있는 이론적인 방법론을 공부를 해서 1000페이지가 넘는 전술, 작전 등을 짜서 직접 들고 가서 면접을 봤어요.

    면접을 보는 순간까지는 못 느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여성 지도자를 대상에 포함한 건 구색 맞추기일 뿐 짜고 치는 고스톱이어서 실망을 많이 했어요. 프로구단이고 중요한 돈과 연결이 된 상황에서는 승부가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그랬을 때 정말 능력 있고 준비된 감독을 선발해야 하는데 그런 관행, 관습이 무섭더라고요. 구조적으로 잘못된 모습을 많이 봤어요.

    ▶ 예전만큼 여자농구가 인기를 얻지 못하는 부분에서 많이 아쉬울 것 같아요.

    화나죠. 제가 현역시절만 해도 남자농구 같은 경우는 여자농구 덕분에 덕을 많이 봤어요. 그만큼 여자농구의 인기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하늘을 찔렀거든요. 특별한 홍보 없이도 장충체육관에 사람들이 꽉 찼어요. 그런데 지금 여자농구의 인기가 하락을 한 걸 보면 저도 농구인으로서 너무나 안타깝고 아쉬운 거죠.

    그래서 박찬숙 농구교실을 통해서 꿈나무들을 길러서 박찬숙을 능가하는 스타들이 많이 나와야 농구팬들이 찾아가서 보고 격려하게 해야 하는데 그동안 이런 준비들이 부족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저라도 노력해서 팬들이 스스로 농구장을 찾아오시도록 앞장서서 노력하겠습니다.

    ▶ 여성선수를 성폭행한 일도 있었는데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신고전화도 개설하셨어요.

    제가 국가인권위원회에 고용불평등으로 진정서를 내기도 했는데 저도 농구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구단에서 선수를 성폭행한 사건에 대해서는 굉장히 놀랐고 실망스러웠어요. 만약 6개 구단 중에 여성 지도자가 1,2명이라도 있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방치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 일이 있기 전에 선수들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여성 지도자가 없었다는 점, 그리고 요즘은 선수들을 트레이드도 할 수 있거든요. 내가 이 감독한테 이런 위협을 받고 있다고 하면 여성 지도자한테 찾아와서 고민을 털어놓고 트레이드할 수 있는지 물어봤을 거예요. 그래서 더 안타깝고 이런 일은 절대적으로 없어야 합니다.용기를 가지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내지 않으면, 큰 소리를 내지 않으면 더한 불미스러운 일들이 일어날 겁니다.

    ◇ 농구를 통한 인생경험, 꿈나무들을 키우고파

    ▶ 가정에서는 어떠신가요?

    저렇게 바쁘니까 가정에서는 빵점엄마가 아닌가 생각하실 거예요. 그런데 사회적으로 바쁜 사람은 가정에서도 잘 한다고 봐요. 집에 들어가면 최선을 다해요. 일단 앞치마 두르고 아이들이 원하는 요리는 바로 나옵니다. 그리고 아내로서도 마찬가지고요.잘한다기보다는 가정에 들어가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이들한테나 남편에게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요.

    ▶ 자녀분들이 농구하겠다고 안 하던가요?

    많은 분들이 농구하는 자녀 없느냐고 물어보세요. 지금 큰 딸이 대학교 3학년인데 영화예술학과 전공이에요. 엄마를 닮아서 끼가 있는 것 같아요.(웃음) 그리고 아들은 운동을 굉장히 좋아하고 태권도를 계속했으면 좋겠다고, 형들하고 시범반에 들어가서 까불고 있는 것 같아요. 적당히 했으면 좋겠다고 제가 말릴 정도에요.

    ▶ 농구인생을 뒤돌아보시니까 어떤 느낌이 드세요?

    농구를 한 게 너무나 다행스럽고 감사하고 또 영원한 농구인이라고 생각해요. 농구를 통해서 인생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도 열심히 지낼 생각입니다.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박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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