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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많은 시아버지 문익환 목사, 그리고 내 남편 문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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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전시

    눈물 많은 시아버지 문익환 목사, 그리고 내 남편 문호근

    • 2006-06-20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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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국립오페라단 정은숙 단장

    대학시절 이미 프리마돈나였던 전도양양한 정은숙은 오페라 조연출이었던 문호근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결혼하자마자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옥중수발을 들게 되는데... 프리마돈나로서 민주화운동 집안에 시집간 생긴 일들, 너무나 급작스런 남편의 죽음, 그리고 시동생인 배우 문성근에 대한 이야기까지 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들어본다.

    ******************** 이하 방송 내용 ********************

    ▶ 진행 : 공지영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 출연 : 국립오페라단 정은숙 단장


    - 최근 오랜만에 무대에 서셨죠?

    그동안 오페라단을 맡으면서 노래를 안 하니까 몸도 기분도 많이 달라졌어요. 그러다가 이번이 남편 5주기라 친구들이 행사를 하자고 했는데, 제가 좀 부담스럽기도 해서 저 혼자 마음에 점 하나 찍고 가리 생각하고 있었어요. 근데 마침 정동극장에서 제안이 와서 감사한 마음으로 5년 만에 노래를 했습니다.

    - 오랜만에 연습하느라 힘들었겠어요?

    처음엔 굉장히 힘들었어요. 역시 노래도 체력단련이에요. 매일 빠지지 않고 해야 해요. 전성기 때도 연습을 하루 안 하면 회복하는 데 두 배가 걸리거든요. 근데 시간이 잘 안 나서 운전할 때 연습하는 등 시간을 쪼개서 했어요.

    - 공연을 끝내고 박수 받았을 때의 기분은?

    참 좋았어요. 아무 일 안 하는 사람들도 가끔은 ''나를 위해 내가 뭘 했나''라는 생각을 하잖아요. 저도 평생 열심히 산다고 하면서 일을 했지만 주기적으로 우울증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때 노래를 한다는 건 즐거움만은 아니에요. 안될 때는 굉장한 고통이거든요. 그래도 다른 어떤 것에서도 얻을 수 없는 만족과 행복이 있어요. 혼자 연습할 때 내 노래를 세심하게 느끼고 고쳐서 스스로 됐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의 기쁨은 대단하죠.

    - 어린 시절 얘기 좀 해주세요.

    집에 큰 오르간이 있었어요. 부모님이 음악을 좋아하셨고, 아버지는 목소리가 좋으셨어요. 제가 아버지 목소리를 닮았어요. 엄마는 원래 가수가 되고 싶으셨기 때문에 하루 종일 집에서 노래를 하셨어요. 저도 어릴 때부터 여기저기 다니면서 노래를 했고요. 중학교 때는 벌써 성악가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나봐요. 당시엔 정식으로 성악 레슨을 받지 못했고, 주로 행사나 교회 활동만 했는데요. 시험공부 하다가 별똥별 떨어지는 걸 보면서 성악가가 되고 싶다고 소원을 빌었어요. 그러고서 저 스스로도 놀랐죠. 아, 내가 성악가가 되고 싶은가보다 깨달았던 거죠.

    - 1970년에 김자경 오페라단에서 오페라 ''아이다''로 공식데뷔를 하셨죠?

    김자경 오페라단은 최초의 사립 오페라단인데요. 김자경 선생님은 한국 오페라를 위해 애를 많이 쓰셨어요. 007 가방 같은 데다 표를 넣고 일일이 기업을 돌아다니셨어요. 그게 다 오페라 사랑이고 후배와 제자들을 위한 사랑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당시 20대 초반이었는데, 그 나이로 ''아이다''를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지금의 저라도 아이다에 20대를 캐스팅하진 못할 것 같아요. 근데 김자경 선생님은 과감하게 저에게 등용문을 만들어주신 거예요. 우리 세대는 김자경 선생님 덕에 일찍부터 오페라 주역을 맡을 수 있었어요.

    - 첫 무대에 섰을 때의 느낌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절 강하게 봐요. 근데 저는 부모님이 굉장히 엄하게 키우셔서 수줍음이 많아요. 어른들 앞에서는 말도 잘 못하고요. 사실 노래하는 걸 정말 좋아했기 때문에 남 앞에 서서 노래했지 너무나 쑥스러웠어요. 근데 오페라라니. 오페라는 연기를 하고, 감정을 표현해야 하잖아요. 남들 앞에서 어떻게 연기를 하나 싶어서 계속 눈물이 났고, 고민을 많이 했어요. 연습장에서는 너무 어색하고 소리도 제대로 못 내서 지휘자 선생님들이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하지만 무대에 서면 어쨌든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그야말로 힘을 다해서 했죠.

    - 국내에서 제일 많이 주연을 맡은 분이라고 하던데요?

    프리마돈나 편수로는 제가 가장 많은 것 같아요. 소프라노는 크게 가벼운 소프라노, 서정적인 소프라노, 극적인 소프라노로 나누는데요. 제 소리는 무겁고 강질이어서 마지막 파트에 속했어요. 소리에 힘과 폭이 있으면서 성량이 컸어요. 제가 운이 좋은 거죠. 무거운 소리가 드물거든요. 그래서 그 무거운 역들을 다 맡게 된 거예요. 한국 사람들은 비극적이고 드라마틱한 공연을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그랜드 오페라 류를 많이 하게 된 거죠. ''운명의 힘''이라든가 ''돈 까를로'', ''맥베스'' 등 한국 초연 작품을 많이 했어요.

    - 국내 최고의 오페라 연출가였던 고 문호근 선생님과는 어떻게 만나셨나요?

    처음 만났을 때 저는 프리마돈나였고, 그 사람은 조연출이었어요. 제가 데뷔한 70년에 그 사람을 처음 봤는데. 당시 그 사람은 서울음대 작곡과를 다니고 있었어요. 근데 작곡 공부는 열심히 안하고 음대 연극반을 만들어서 자기 등록금까지 다 거기다 쓰곤 했어요. 그래서 학교를 6년 동안 다녔대요. 처음엔 그냥 조연출 음대 학생이 하나 왔나보다 했는데, 그 후로 우연히 몇 번 더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어요. 그러다가 그 사람은 군대에 갔어요. 그리고 5년 뒤인 75년에 서울오페라단이 창단되면서 제가 토스카 역을 맡았는데, 그 사람이 제대하고서 조연출로 들어왔더라고요.

    - 문호근 선생님은 어떤 분이었나요?

    일에 대한 집중력이 대단해요. 책을 들고 앉아 있으면 옆에서 무슨 일을 해도 몰라요. 그래서 일로 만난 사람들은 그 사람에 대해 무섭다, 지독하다고 말해요. 하지만 무대 밖에서는 또 그렇게 여린 사람이 없어요. 마음이 넓고, 남의 어려움을 못 보고, 늘 도와줘요. 남편의 그런 자상한 면에 반했죠.

    - 두 분이 함께 만든 작품은?

    남편이 국립오페라단에 데뷔할 때 ''일토르바토레''라는 작품을 같이 했어요. 그때 저는 임신 중이어서 출연을 못하겠다고 사양했는데 지휘자 선생님이 ''임신 8개월이라도 문제없다''면서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전 정말 임신 8개월째에 그 역을 했어요. 뱃속의 아이와 함께 세 식구가 출연한 오페라가 됐죠.

    - 연습할 때 문호근 선생님께 뺨을 안 맞아본 사람이 없다고 하던데요?

    정말 그런 건 아니에요. 오페라 연습장에서 그러면 큰일 나죠.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그 사람이 여러 가지 행사를 했는데, 이 사람은 늘 뛰어다녔어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뺨을 맞듯 일을 했다는 거죠. 무대 지휘를 하다가도 음향 박스나 조명 박스까지 무작정 뛰는 거예요.

    - 그렇게 열정적인 분이었군요.

    그래서 자기 명을 재촉한 것 같아요. 하루에 2~3시간 밖에 자질 않았거든요. 그리고는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2~3일 동안 먹지도 않고 잠만 잤어요. 근데 마지막 5~6년 동안은 그것도 못했어요. 피로가 풀릴 겨를이 없었죠. 남편은 세상을 떠나기 전날 하루 종일 잠만 잤어요. 그리고 너무 고단하니까 그 주 금요일에 바다를 보러 가자고 했어요. 저희는 평생 쉬기 위해 어디를 가본 적이 없었어요. 신혼여행도 안 갔어요. 결혼식 끝나고 둘 다 연습장에 나간 사람들인데, 정말 휴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예요.
    그날 저녁 6시에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남편은 너무 피곤해서 못 일어나더라고요. 그래서 저녁 10시에 다시 깨워서 죽을 먹였어요. 죽을 먹더니 책을 읽으러 윗층으로 올라가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다음 날 아침 9시에 제가 남편을 발견한 거예요. 병원에선 새벽 2시쯤 그렇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죠. 그러다가 정말 실감할 때가 언제였나면요. 삼오제가 지나고 며칠 뒤에 비가 무척 많이 왔는데 ''아, 이 사람이 젖는구나''라는 생각에 소름이 쫙 끼치더라고요. 정말 큰일났다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그때 정신이 더 나가더라고요.

    - 어떤 일이 가장 힘들었나요?

    제가 힘든 것보다는 그 사람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사람의 혼이 있다고 믿는데요. 그 사람 스스로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평소엔 제가 몸이 좀 안 좋았어요. 저희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는데 남편 쪽은 장수하는 집안이라 제가 조금만 아프다고 해도 남편이 굉장히 걱정해줬어요. 자기 건강을 너무 믿었던 거죠. 지금 생각하도 그게 참 불쌍해요. 준비성이 좋고 모든 걸 앞서 계획하던 사람이 아무 계획없이 그렇게 됐을 때 자기 스스로가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 어떻게 이겨내셨나요?

    이겨낸 건 아니에요. 그냥 생각하면서, 힘들어 하면서 세월이 가는 거죠. 누가 전화해서 어떠냐고 물어보면 그냥 숨 쉬니까 산다고 대답했어요. 그러다가 7년 뒤에 국립오페라단을 맡게 됐어요. 제가 프리마돈나로서만 출연했다면 그 일을 감당하기가 어려웠을 텐데 연출가와 살면서 연출수업을 받은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편은 연출하는 작품마다 저와 얘기를 했거든요. 그러니까 남편은 저와 얘기를 하면서 자기 생각을 정리하고, 저는 예술가 수업을 받았던 거에요. 저에게 소리만 하는 가수가 아니라 음악을 하는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며 은근히 압력을 주고 매일 단련시켰어요.

    - 시댁에 유명한 분들이 많으신데요?

    남편은 결혼하기 전에 유학을 가려다가 못 갔어요. 삼촌인 문동환 목사님이 민주화 투쟁을 하셔서 조카 여권이 안 나왔던 거예요. 영국 로얄오페라하우스에서 국비 장학금을 받았고, 영국 측에서 여러번 요구했는데도 여권이 안 나왔어요. 그런 바람에 유학을 못가고 75년에 저와 결혼을 하게 됐는데요. 당시에 시아버님은 얌전히 성경 번역을 하고 계셨죠. 그러다가 시집 간 이듬해에 3.1민주구국선언을 하시면서 그때부터 감옥을 가기 시작하셨어요. 그때 시부모님과 남편이 모두 감옥을 갔어요. 당시 저는 ''마술피리''란 작품을 출연하고 있었고, 남편은 조연출이었는데 그냥 잡혀간 거에요. 그 작품을 오현명 선생님이 연출하셨는데, 직접 북부 경찰서에 가서 신원보증을 해주셔서 남편은 일주일 만에 나와 다시 작품을 하게 됐죠. 그때부터 제가 이중생활을 했던 거에요. 낮에는 오페라 극장이나 학교에 가서 태연하게 그 임무를 해야 했고, 밤에는 공연 준비로 밤새는 남편을 위해 옷이나 음식을 싸가지고 갔죠. 그리고 시아버님은 감옥 면회소에서 뵌 적이 더 많았어요. 그러니까 한편에서는 오페라 연습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먹을 거 싸서 남편에게 갔다가 아버님께 갔다가 했죠.

    - 민주화 인사의 가족이기 때문에 불이익을 받은 적이 있나요?

    많았어요. 전 이미 교수가 된 뒤에 결혼을 했는데도 외국유학을 못 나갔어요. 그리고 당시 민주화투쟁을 하던 분의 자녀들은 아무도 취직을 못했어요. 그래서 남편도 제 조건으로는 일을 못했어요. 저에게도 연주하라고 요청이 왔다가 갑자기 취소되는 경우도 많았고요. 그런 건 의례 그러려니 했어요. 그 후 80년 서울의 봄 시절에 어렵게 여권을 만들어서 둘이 같이 유학을 갔는데 돌아와서 계속 복직을 못했어요. 그러다가 90년대 후반이 복직이 됐죠.

    - 시아버님인 문익환 목사님, 시어머님인 박용길 장로님, 시동생인 문성근 씨에 대한 개인적인 느낌은?

    문익환 목사님은 정말 마음이 여리세요. 눈물도 많으시고요. 사람들은 언론에서 보도되는 강한 모습만 아는데요. 강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계속해서 강하게 되신 거에요. 그렇지만 정말 자상하시고 어린 아이 같은 분이에요. 아버님이 이북에 가셨을 때 그곳의 어린 아이가 광주에 계신 할머니에게 쓴 편지를 읽는데, 아버님이 진심으로 그 편지를 꼭 갖다주겠다고 하시면서 우셨어요. 그렇게 순수하시니까 또 그만큼 강해질 수 있었던 거에요. 어머님은 애칭이 코스모스일 정도로 가냘프셨어요. 아버님과 어머님은 닭살 부부라고 할 만큼 사이가 좋았어요. 꼭 손을 잡고 다니셨고,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주고 받으셨어요. 어머님은 예쁜 걸 좋아하시는데요. 돈 들인 예쁜 게 아니에요. 포장지 하나라도 그냥 버리지 않고 꽃이나 과일 그림을 다 오려두셨어요. 그걸 아버님께 드리는 거에요. 아버님은 그 안에서 그런 걸 못 드시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그림을 오려서 ''오늘은 수박 드세요''라며 보내신 거에요. 굉장한 사랑이죠. 반면 자식들에겐 우리네 어머니들과는 다르셨어요. 어떻게 자식들에게 잔소리 한번 안 치실까, 관심이 없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죠. 그리고 계속 민주화투쟁을 하시면서 기도를 하셔도 자식들에 대한 기도는 한 번도 안하셨어요. 자식들은 각자 알아서 잘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너희 나름대로 판단했겠지 라면서 무슨 행동이든 존중해주셨어요. 나중에 잘못되더라도 잘못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어떤 분들은 제 아들 바우더러 할아버지 할머니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해주셨겠니 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꼭 입으로 나오는 기도가 아니라 마음으로 사랑하시는 그 자체가 기도인 거죠.

    - 문성근 씨는 가족 내에서 어떤 분이신가요?

    문씨 일가는 다 사랑이 넘쳐요. 저희 집이 골목 깊은 곳에 있었는데요. 집에 있는 날에는 버스 역까지 꼭 저를 마중나와 줬어요. 아버님도 그러셨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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