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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과학 일반

    근대 우편은 언제 시작됐나

    • 2006-04-21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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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편, 우표, 우체국 이야기''

    구한말 고종 21년, 1884년 4월22일 국왕의 칙명으로 우정총국이 개설되면서 우리나라 근대우편의 역사가 시작됐다. 올해로 우리나라 근대우편이 도입된지 122주년을 맞는 것이다. 또 이날을 기려 1956년 제정된 ''체신의 날''을 계승한 ''정보통신의 날''도 22일로 51회를 맞는다.

    정보통신의 날을 맞아 우리나라 우편제도의 도입과 역사를 알아보고 미래의 우체국 모습을 그려본다.

    ▲근대 우편제도의 도입

    우리나라 우편업무는 삼국사기에 신라 소지마립간 9년(서기 487년)에 ''''비로소 사방에 郵驛을 두고 우역을 맡은 관청에 명하여 官道를 수리하게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기본적인 통신수단은 옛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조 말에 당시 개화파의 한 사람이었던 洪英植 (당시 병조참판)이 신사유람단으로 일본, 미국 등지를 돌아보면서 우정사업이 국가 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이를 고종 임금에게 건의하여 1884년 4월 22일(음 3월 27일)「우정총국」직제를 반포하였다. 그 후 조직, 법령의 마련과 우표발행 준비 등을 거쳐 11월 18일(음10월 1일) 5文, 10文(당시 화폐 단위)의 우표를 발행하면서 우정업무가 개시되었다.

    그러나 그 해 12월 4일(음 10월 17일) 우정총국 개국축하 잔치에서 일어난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면서 우정업무도 한동안 중단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우정총국이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우편제도는 사대부들이 하인을 시켜 소식을 전달하거나 군사 또는 공무용으로만 활용되었으며 일반 백성들은 이용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식 우정제도는 누구나 일정요금만 내면 지역이나 거리에 관계없이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는 민주적인 제도였다.

    따라서 우정제도의 도입은 오늘날의 정보기술에 못지 않은 획기적인 것이었으며 근대식 행정제도의 효시이다. 이어서 1885년에 전화가 들어왔고, 1887년에 전기가, 1899년에 철도가 개통되었다. 통신은 국가의 신경에 해당하는 중요한 기능이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합병할 때 1905년 가장 먼저 통신업무부터 합병하였던 것도 같은 이유이다.

    ▲우리나라 우정의 역사

    487년 신라 소지왕 9년 국가공문서의 전달을 위해 우역(郵驛) 설치
    1149년 고려 예종 3년 봉수제도 설치
    1274년 고려 원종 15년 마패제도 설치
    1597년 조선 선조 30년 우역제도를 파발제도 설치
    1884년 조선 고종 21년 근대우편의 우정총국 설치
    1884년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5문, 10문) 탄생
    1884년 우정총국 패쇄(12월 6일)
    1895년 농상공부 통신국에서 우편업무 재개
    1900년 농상공부 통신국 통신원 독립
    1900년 대한제국 광무 4년 최초의 국제기구 만국우편연합(UPU) 가입
    1905년 대한제국 광무 9년 일본의 통신강탈로 근대우정 사실상 패쇄
    1945년 8.15 광복으로 미군정에 의해 통신사업 운영
    1948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체신부로 개칭 운영
    1961년 별정우체국 제도 실시
    1968년 1면 1국의 우체국을 설치하고 매일 배달제 실시
    1969년 그라비어 인쇄기에 의해 우표인쇄가 조폐공사에서 시작(5월 1일)
    1970년 기계화를 위한 우편번호제와 규격봉투제 실시
    1972년 체신기념관 개관
    1974년 사회주의 국가와 우편물 교환 확대실시
    1984년 우정100년기념 필라코리아 개최(143개국 참가)
    1985년 임시우정박물관 개관(서울 중앙우체국 4층)
    1988년 6자리 우편번호제 실시
    1994년 제21차만국우편연합 서울총회 개최
    1994년 우정110년 기념 필라코리아 개최
    1995년 체신부에서 정보통신부로 개칭
    1997년 남북우편물 교류 재개(신포지구)
    1997년 다기능우편·전자우편 업무개시
    2000년 우정사업본부 출범

    ▲ 미래의 우체국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체국은 우리 생활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소외됨 없이 전국민을 대상으로 기본적인 통신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으며, 기업과 고객을 연결하는 중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극도로 발달한 정보화 시대에 우편의 역할은 점차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일례로 타임지는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여 앞으로 없어질 직업의 1순위로서 주식 및 자동차 중개인, 보험대리인과 함께 서신을 배달하는 집배원을 꼽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체국 존재의 이유와 심한 경쟁 속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여부에 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우체국의 미래는 낙관적으로 볼 수 있다. 우체국은 전자상거래 시대에 정보의 흐름과 대응하여 발생하는 實物의 흐름을 주관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느 날 아침 말쑥한 용모에 세련된 말투를 지닌 집배원이 우리 집을 찾아온다. 아침식단으로 생각한 영광굴비를 정확한 시간에 배달하는 것이다. 프랑스에 있는 친구에게 생일선물로 보낼 한국의 목각인형을 우편으로 접수해 간다. 통일된 2020년, 동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가장 빠르고 저렴한 방법은 우체국의 유라시아 철도특송이다. 전자상거래에서 발생하는 화폐의 흐름, 즉 대금 결제는 우체국 전자화폐를 이용하여 편리하게 해결한다.

    제3기 우정사업본부는 ''''국민의 사랑, 우정서비스''''을 경영비전으로 제시하였다. 새 비전은 건전한 수익구조에 기반하여 모든 국민이 언제 어디서나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최상의 우편, 금융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우정서비스를 구현하고자 하는 우정사업의 미래상을 내포하고 있다고 우정사업본부는 밝혔다.우정사업본부 관계자는 " 미래를 향해 도약하는 우체국에 더 큰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 달라" 고 당부하고 있다.

    ▲우편의 아버지, 금석 홍영식 선생

    우편의 아버지
    홍영식 선생은 1855년 12월 29일, 후에 영의정을 지낸 아버지 홍순목(洪淳穆)과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홍순목은 아들 홍만식(洪萬植)이 있었으나 백부 홍순경(洪淳敬)이 후사가 없이 죽자 1849년 양자로 입적되었고, 1853년에 상처를 하게 되어 재취를 하여 얻은 아들이 바로 홍영식 선생이다

    선생의 어린 시절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어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고 알려져 있었음에도 16세였던 1872년 7월 칠석제에서 대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홍순목은 관직을 맡기에는 아직 어리다고 판단하여 국왕에게 주청하여 2년간 사가독서(賜暇讀書-독서당에서 공부하는 제도)가 허가되었고,사가를 마친 선생은 고종의 총애가 있었던 듯 1878년 3월 9일 교리(校理, 정5품 - 현 5급 사무관), 1878년 11월 29일 문학(文學, 정4품 - 현 3급 부이사관), 1880년 8월 9일 상례(相禮, 종3품 - 현 2급 이사관), 1880년 12월 참의(參議, 당상관 - 현 1급 관리관)로 승진하는 등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선생이 개화사상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오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1881년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할 때 선생도 이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당시 시찰대상이 병제였으나 우편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그것은 일본 우편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마에지마의 자서전인 『우편창업담』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 그 후 명치 13년(1880)으로 기억되는데, 조선에서 정치상의 시찰원을 일본에 파견해 왔다. 그 가운데 홍영식이라는 사람이 있어 역체국에 찾아와서 우편에 관한 일들을 질문하므로 나는 모든 서류를 증여하고 직원으로 하여금 그 실무를 설명시키고 자신도 홍씨와 만나 우편의 요의를 말하고, (조선에도) 빨리 우편을 개설할 것을 권고하고, 더욱이 중국에 우편시설이 없음은 유감된 일이나 귀국은 중국을 사부로 삼고 매사 중국에 따르는 형편이므로 우편도 언제 생길지 모를 것으로 생각했는데 다행히 오늘 그대의 질문이 있음은 그 개설의 시기가 임박한 것으로 믿어진다. 이는 실로 경하할 일이라고 말했더니 홍씨도 크게 감격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홍씨의 질문 가운데 일본이 조선으로 보내는 우편세를 내국세와 동액으로 정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정색을 하고 물었다. 나는 이에 대하여 별다른 이유는 없다, 후일 조선에도 우편이 개설되어 교환조약이 맺어지면 각각 그 나라의 내국세를 받게 되므로 그 합산된 액을 표준하여 세액을 정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더니, 홍씨도 양해하고 안심하는 눈치였다." 여기에서 한가지 더 주목해야 될 대목은 조선행 우편요금에 대한 선생의 날카로운 지적을 통해 일본이 부산에 설치한 일본재외우편국에 대하여 사전에 충분한 지식을 가졌음을 알 수 있고, 더더구나 그들의 흑심을 미리 간파하여 마에지마의 아픈 곳을 찔렀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선생은 우편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관계로 1882년 12월 4일 새로 발족한 교섭통상아문(交涉通商衙門)에 근대식 체신기관의 효시인 우정사(郵程司)가 설치될 때 담당 협판이 되었고, 1883년 9월 보빙부사(報聘副使)로 미국에 간 선생은 뉴욕의 우체국과 전신국을 시찰하였으며, 귀국후 고종에게 복명하면서 우편 개설이 급선무라고 대답하였던 점을 보아서 미국 시찰시에 확신을 얻었던 것 같다.이러한 과정을 거쳐 결국 1884년 3월 27일(양력 4월 22일) 우정총국을 창설하게 되었고, 선생이 우정국총판에 임명되었으며, 10월 1일(양력 11월 18일) 서울·인천 간에 근대식 우편제도가 실시되었으나 10월 17일에 일으킨 갑신정변의 실패로 19일 향년 30세의 나이로 청군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어렵게 실시하게 된 근대우편제도도 10월 21일 20일만에 중단하게 되었다.근대우편제도를 창설한 선생에 대해서 건방지다는 평도 있는데 특히, 매천 황현 선생은 『매천야록』에 다음과 같이 선생을 혹독하게 폄하하고 있다.

    홍영식의 영민(梅泉野錄 卷之一上, 甲午以前)홍영식은 영상 홍순목의 아들로 참판 홍만식의 배다른 아우이다. 그는 경박하고 영민하여 그가 말한 시무(時務)는 들을만하였지만 홍순목은 그를 매우 우려하여 가정을 보존하지 못할 아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경박한 그의 친구들은 그를 찾아 다니며 「중육」, 「중육」하고 그의 자를 불렀다. 그는 일찍이 한림학사로 있다가 아경(亞卿)이 되었다.

    박영효 등의 미국 왕환往還(梅泉野錄 卷之一上, 甲午以前)갑신년(1884) 봄, 전권대신 박영효, 부관 홍영식, 종사관 서광범 등이 미국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홍영식은 가선(嘉善)으로 승진시키고, 대교(待敎) 서광범은 동부승지로 특진시켰으며, 김옥균도 참판을 제수하였다.그리고 홍영식은 사절로 갔다 온 후, 그의 아버지를 뵈온 지 이미 1년이 지났었다. 그가 대궐로 나갈 때 그의 부친 홍순목이 빈청에 있었으나 그는 입시만 하고 물러나와 빈청을 들리지 않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다.그리고 그는 관서 이승오가 집을 판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 때 이승오는 상중에 있었지만 홍영식은 조문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 집을 소개한 사람을 따라 이승오의 집에 갔다. 홍영식은 홑두루마기를 입은 채 손을 뒤로 하고, 그의 집을 들어가 처마만 둘러보고 나왔다. 이승오에게 조문도 하지 않고 돌아간 것이다.우리 풍속에 대체로 남에게 조문할 사람은 하얀 도포를 입지만 조문을 하지 않을 사람은 그의 집을 들어가지 않는다.이 때 나는 한성에 있으면서 경향(經香) 한장석을 찾아 보았다. 경향은 손가락을 꼽아가며 서재필과 홍영식의 하는 일을 말해 주면서 "윤리가 없어졌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탄식을 그치지 않았다.선생의 혁명은 자신이 살해 당하면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가족에게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1884년 11월 1일(양력 12월 17일) 부친 홍순목과 형 홍만식은 모든 관직에서 삭탈되어 이날 부친 홍순목의 명령에 의해 선생의 일가 20여명은 독약을 받고 집단 자살하고, 본인은 마지막으로 자택 대들보에 목을 매고 자살하였다.또한 혁명을 일으키기 전에 이미 시집을 보낸 선생의 질녀에게까지 시련을 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야기가 있어 소개한다.

    ▲ 우표이야기

    우표는 대표적인 국가 표상물이다. 흔히 국가 표상물 하면, 태극기, 무궁화, 화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전세계적으로 널리 우리나라를 알릴 수 있고 문화를 소개할 수 있는 것이 우표다. 원래 우표는 1840년 5월 6일 근대우편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영국의 교육자 출신인 로랜드 힐(Rowland Hill, 1795-1879)경에 의해 최초로 발행되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보내는 사람이 우편요금을 부담하거나 받는 사람이 부담하는 등 통일성이 없었고, 나라, 거리와 크기 등에 따라 각각 우편요금이 달라서 많은 불편이 있어서 이를 보내는 사람이 거리 지역에 관계없이 우편요금을 부담하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요금납부증표로 1펜스불루와 2페니불랙의 2종의 최초 우표가 탄생하였다.

    그 후 각 국에서 인물, 자연, 역사 등을 담은 다양한 우표가 많이 발행되면서 그 디자인의 아름다움과 희소성으로 이를 수집하기 시작하여 현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전세계인이 즐기는 취미활동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를 작품으로 만들어 세계우표전시회까지 개최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1884년 11월 18일 근대식 우편업무 개시일에 발행된 일본 대장성에서 인쇄한 5文(화폐단위)(사진3)과 10文(사진4) 2종의 우표가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로 기록되고 있으며, 2005년 12월까지 2,471종의 우표를 발행하였다.

    흔히 우표는 작은 지면에 인쇄되어 있어 그리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표 발행과정을 이해한다면 왜 우표를 국가 표상물 이라고 하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먼저, 우표는 그 시대 문화의 척도이다. 우표는 당시에 가장 대표적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자연, 역사, 문화 등에 관한 기념적 가치가 있거나 문화적 보존가치가 있는 소재를 발행 2년 전에 수집한다. 그리고, 역사학자, 과학자, 문화재전문가, 우표전문가, 디자인전문교수 등으로 구성된 우표심의협의회의 심의를 통하여 연간 60종 내외로 확정하여 우표를 발행하게 된다.

    발행계획에 반영된 우표는 소재선정, 디자인 수정 및 고증작업을 마친 후 위조 방지를 위하여 요판, 그라비아, 평판, 그라비아+요판 등의 정밀인쇄를 대략 36분의 1크기로 축소하면서도 원래 도안의 모습을 유지한 채 인쇄를 하게 된다.

    이 때 우표용지 제조기술이 또 문제가 되는데 우표 뒷면의 풀칠상태에 따라 너무 많이 풀을 입히면 뒤쪽으로 우표가 말리고, 조금 풀을 칠하여 놓으면 우표가 붙지 않아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실제로 우표용지를 국산화 한 것은 불과 23년전의 일이며, 우표의 50%를 인쇄하고 있는 국가들의 모임인 정부우표인쇄책임자 회의의 구성국도 23개국에 불과하다.

    미국에서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침략을 당한 식민지 국가를 소재로 우표를 발행하였는데,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교민들이 청원을 하여, 1944년에 태국기가 도안된 우표가 발행된 것은 우표가 그 나라의 주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국가 표상물임을 입증하는 좋은 사례다.

    우표는 디자인 소재와 희소성이 가격을 결정한다. 세계에서 가장 진기한 우표로 알려진 1856년 영국령 가이아나에서 발행한 1¢임시우표(사진1)로 약 30억원을 호가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지금까지 최고가를 기록한 실체봉피(Entire)는 모리셔츠에서 프랑스로 발송된 ''보르도'' 라는 애칭을 지닌 봉투(사진6)로 1993년 쮜리히옥션에서 32억원의 낙찰가를 기록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체로 조선조 말부터 대한제국 시절에 사용되었던 우표가 가격이 비싼 편이다. 왜냐하면, 홍영식 등의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나자 우정제도도 21일만에 중단된 당시의 시대상황과 일제와 유신체제 등으로 기록물을 많이 없앴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우표가 몇 장 밖에 없으며 더구나 당시 실제로 우편에 사용된 봉피(실체봉피 : Entire)에 붙어 있는 것은 한 장도 없다.

    흔히 우표수집은 취미중의 왕으로 불리는데, 이는 경제적이며 時空을 초월하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함께 즐길 수 있는 아주 유익한 범세계적인 취미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뉴딜 정책을 성공시킨 3선 대통령인 루즈벨트는 "우표에서 배운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많다" 는 명언을 남겼다. 이는 작은 종이상자 속에 시대상을 집약․표현한 우표를 보면서 과거의 위인과 자신만의 대화를 통해 현재의 사건 속에서 삶을 반성해 보고, 미래의 밝은 세상에 대한 동경과 상상의 여행을 떠나도록 만드는 마력을 우표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표수집은 자연, 동물, 꽃, 문학, 음악 등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를 정하여 테마별로 수집하는 것이 좋다. 처음 수집을 할 때에는 우편물에 붙어 있는 우표를 수집하거나, 친구와 서로 교환해도 좋고, 우체국창구에 가서 우표가 발행될 때마다 구입하거나 우체국의 취미우표 통신판매회원으로 가입해도 좋다. 또한, 해외펜팔이나 e-mail 등의 방법을 활용하면 외국우표도 구할 수 있고, 외국의 문물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어 Global시대에 오히려 적합한 취미활동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각종 우표전시회가 열리는데 대표적인 것은 매년 8월에 열리는 대한민국우표전시회와 아시아대양주우취연맹이 후원하는 국제우표전시회, 국제우취연맹(FIP) 후원하에 개최하는 우표올림픽 세계우표전시회가 있다.(자료제공: 우정사업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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