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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털도사·객주·임꺽정, 무식해서 용감하게 그렸죠"



사회 일반

    "머털도사·객주·임꺽정, 무식해서 용감하게 그렸죠"

    • 2008-02-28 16:41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만화 '머털도사' '임꺽정'의 이두호 교수

     

    ‘머털도사, 객주, 임꺽정, 덩더꿍’을 그린 한국 대표 만화가 이두호 화백. 그는 스스로를 ‘바지저고리’ 작가라고 부릅니다. 이두호 화백은 역사 속에서 치열하게 산 민초들의 삶을 가장 한국적인 정서로 표현해 낸 만화가죠.

    경상도 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화가의 꿈을 키웠던 이두호 화백. 처음 그는 가난 때문에 아르바이트로 만화를 시작했답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만화를 그려 등록금을 마련했구요, 미대를 다닐 때까지도 그에게 만화는 그저 생계수단이었다는데요. 하지만 그에게 만화는 점점 운명처럼 다가왔습니다.

    순수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화가를 꿈꾸던 경상도 소년이 40년 동안 인기 만화가로 활동하며, 만화과 교수가 되기까지 이야기.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이두호 교수를 2월 22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어릴 때 발견한 그림소질 “이놈 천재다”

    [BestNocut_R]▶ 현재 세종대학교 교수로 계시는데 이번 학기가 마지막이시라고요?

    학교에 온지 벌써 10년이 넘었더라고요. 금년 8월 말이면 임기가 끝나요. 제가 하는 일이 따로 있으니까 그 일을 계속 할 것이고 학생들도 만화나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같이 만날 거니까 학교를 떠난다는 실감도 나지 않아요.

    ▶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으셨나 봐요?

    제가 어릴 때는 종이가 귀할 때니까 벽지 같은데다가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러면 어른들이 지나다가 보기도 하고 또 가까운 친척 중에 교사가 계셨는데 초등학교 1학년 때 그림을 이 분이 보시더니 “이놈 천재다”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중학교 때까지도 제가 천재인 줄 알았어요.(웃음) 나중에 아닌 걸 알았지만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 은사 따라 학교 옮긴 고집 센 아이

    ▶ 그림의 소질을 발견해 주신 분이 누구신가요?

    제가 대구에서 남산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은사셨어요. 수업이 끝나면 청소를 하잖아요. 그러면 그 시간에 학교 내에 조그마한 화실이 있었는데 책보를 들고 그곳에 가면 남무오 선생님이라고 계셨는데 도화지를 한 장씩 주시면서 그림을 그리게 하셨어요. 6학년 초까지 1년 반 정도를 개인적으로 그림을 가르쳐 주셨어요. 그림 그리는 방법이나 그림이란 무엇인지를 지도해 주신 거죠.

    그런데 6학년이 되자마자 남무오 선생님이 복명초등학교로 전근을 가시게 되었어요. 저한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죠. 전근을 가셨다는 걸 알고 다음 날 책보를 들고 그 초등학교를 찾아갔어요. 교문에서 선생님을 기다리는데 저쪽에서 오시더라고요. 저를 발견하시고 선생님이 너무 기뻐하시면서 인사하러 왔느냐고, 6학년이니까 공부 열심히 하라고 머리를 쓰다듬으시고는 가라고 하시는 거예요. 선생님한테 제가 이 학교에 다니겠다고 했더니 웃으시더라고요.

    그 다음 날도 그 학교에 갔더니 놀라세요. 잘 타일러서 보내시는데 3일 째도 또 갔어요. 이번에는 선생님이 보시지를 않아요. 저만치 가시다가 손짓을 하시더니 문방구로 데리고 가세요. 왜 계속 오느라고 물으시기에 선생님한테 계속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내일 어머니를 모시고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다음 날 어머니를 모시고 남무오 선생님과 함께 원래 있던 남산초등학교로 갔어요. 학교에서 사생대회를 하면 상을 좀 탔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제 얼굴을 아세요. 교감선생님이 복명초등학교에 가면 퇴학시켜버리겠다고 하셔서 제가 얼굴이 벌개져서 앉아 있다가 교장선생님실로 불려 들어갔거든요.

    교장선생님은 남산초등학교가 학생도 많고 크기도 큰데 왜 다른 학교로 가려고 하느냐고 물어보시죠. 선생님을 따라서 가려고 한다고 대답하니까, 애가 이렇게 선생님을 좋아하는데 전학증을 끊어서 보내주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학교를 옮겼어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런 인연 때문에 잊지 못하죠. 그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가정 형편상 제가 어떻게 됐을지 아무도 몰라요.

    ▶ 초등학교 때 전근가신 선생님을 따라가시기도 하고, 고집도 세고 좀 엉뚱하셨나 봐요?

    주위에서도 고집 센 아이로 통했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인데 전쟁이 끝난 직후라 학교에 가장 먼저 간 아이가 책상을 차지했었어요. 책상도 모자랄 때니까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거죠. 칼로 책상에 이름을 적어놓았는데 어느 날 조금 늦게 갔더니 사촌 형이 거기에 앉아있는 거예요. 비키라, 못 비킨다 하고 싸움이 벌어졌어요.

    그때 여선생이셨는데 칠판에 쓰시다가 둘이 싸우니까 나오라고 하시더라고요. 회초리로 손바닥을 치시면서 ‘싸울 거냐, 안 싸울 거냐’ 물으시는데 사촌 형은 안 싸우겠다고 대답하는데 저는 대답을 안 했어요. 괘씸하니까 몇 차례 더 때리셨는데 3번 맞으니까 아프잖아요.

    안 싸운다고는 못하니까 아무 말도 안 했을 뿐인데 자꾸 맞으니까 선생님 치마를 붙들고 늘어졌어요. ‘가시나야, 와 때리노’ 하면서.그게 소문이 나서 어디에 다니지를 못했어요. 마을에 가다가 어른들이 계시면 피해가든지 또 마주치게 되면 꿀밤을 한 대씩 먹였어요. ‘요놈, 벼락손자, 부랑쟁이..’ 그러면서요. 그 선생님도 당황하셨겠지만 저도 왜 그렇게 못된 짓을 했는지 몰라요.(웃음)

    ▶ 중학교 때부터 원고료를 받으면서 만화를 그리셨어요?

    만화를 그린다기보다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니까 장래 꿈이 화가가 되는 거였어요. 어쨌든 만화그리기를 흉내 냈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 큰 형님이 장가를 가셨어요. 그때는 긴 두루마리에 축사를 썼어요. 내용을 보면 끝에 ‘아들 다섯, 딸 다섯 놓고 잘 살아라’ 이런 식으로 우스개로 쓰는데 축사 뒷면에 종이가 깨끗하거든요. 당시에 무성영화로 <며느리 설움="">을 봤는데 그걸 보고 두루마리 뒤에다가 만화로 그렸어요. 당시에는 어리니까 만화를 다 좋아할 때라 단지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했던 거죠.

    ◇ 빛과 그림자인 부모님, 어머니는 평생의 스승

    ▶ 가정환경은 어떠셨어요?

    참 힘들었어요. 초등학교는 무상으로 다니게 해줘서 그냥 다녔어요. 중학교도 그렇게 다녔고요. 그런 환경이지만 제가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은 어머니의 사랑이었어요. 자칫 잘못하면 6.25 전쟁이 끝난 후라 사회가 어수선할 때라서 잘못된 길로 갈 수도 있었는데 형제들도 다 곱게 자란 걸 보면 부모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 아버님은 어떤 일을 하셨어요?

    손재주가 많으셔서 미장도 하시고 목수도 하시고 손에 뭘 잡으시면 못 만드시는 게 없을 정도였어요. 술을 워낙 좋아하셔서 어머니께서는 늘 술을 조심하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하지만 술드시고 허튼 소리는 전혀 하지 않으셨어요.

    ▶ 부모님이 나의 빛이자 그림자였다고 하셨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아버님이 저를 업어준 기억이 딱 한 번 있어요. 깊은 강을 건너는데 아버님이 수영을 잘 하셔서 저를 업고 건넌 기억이 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수없이 술을 드시는 걸 봤잖아요. 동네 아이들과 놀다가 해가 지면 오늘도 아버님이 술을 드시고 오실까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고등학생이 되니까 반항심이 생겨서 어느 날 술을 많이 드시고 오셨는데 집안이 난리가 난 거예요. 어머니 눈도 시퍼렇고. 술을 드시니까 힘이 달리신 틈을 타서 제가 뒤에서 잡고 자리에 주무시게 했거든요. 그러면서 제가 한 마디 했어요. ‘아버지 돌아가셨으면 좋겠다고.’

    일단락 돼서 다들 자는데 새벽에 어머님이 들어오시더니 저보고 일어나라고 하세요. 평소에 듣던 목소리와 전혀 달라요. 그래서 제가 벌떡 일어나서 왜 그러시느냐고 했죠. 무릎을 꿇고 앉았어요. ‘불효막심한 놈아, 아버님한테 돌아가시면 좋겠다고 하는 자식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하시더라고요. 딱 그 말씀만 하시고 방문 닫고 나가셔서 아침을 지으시는데 제 마음이 너무 괴로운 거예요.

    그래서 큰 방에 와서 아버님한테 사죄를 하려고 들어가니까 주무시고 계세요. 무릎 꿇고 빌었어요.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물론 아버님한테 잘못한 것도 있지만 어머님의 그 말씀 때문에, 나중에 세월이 흘러도 내가 이런 짓을 하면 어머님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실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할 수가 없었어요. 저한테 그림을 가르쳐주셨던 선생님과 어머님의 영향이 정말 컸어요.

    ▶ 그 당시에 대학도 가기 어려울 때인데 돈도 많이 들어가는 홍익대학교 미대를 가셨어요?

    사실 가정형편은 갈 형편이 아니었어요. 1학기 등록금만 해주셔서 저와 가장 친한 친구와 자취를 했어요. 그 친구는 서라벌예대 문창과를 가고 저는 홍익대학교 서양학과를 갔는데 나중에 목사가 되었어요. 어쨌든 이 친구 덕분에 어려움을 견뎌낼 수 있었어요. 학교 다닐 때 등록금은 고사하고 먹고 살 일이 문제잖아요. 명동에 가서 구두닦이도 해보고 제가 갖고 있는 이젤박스에다 귤을 사서 다방에 돌아다니기도 하고 또 이 친구가 초등학교 교사들을 만나서 교사들이 하기 어려운 환경정리를 제가 맡아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어요.

    ◇ 생활고 위해 그린 만화, ‘바지저고리’로 재탄생

     

    ▶ 순수미술을 하시다가 만화가가 되셨는데 당시에는 만화를 저급문화로 인식할 때 아닌가요?

    저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제대를 하고 나니까 등록금도 없고 또 먹고 살아야 하니까 사회생활을 해야 했어요. 중학교 때부터 만화를 그려보기도 했고 아르바이트도 했으니까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거예요. 1968년도에 데뷔를 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학교 등록도 해야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했는데 우선 가장 빠른 길이 만화를 그리는 일이었던 거죠. 만화가로서 저에게 많은 영향을 주시고 지금도 선생님으로 모시고 있는 분이 박기정 선생님이세요. 1968년에 제대하고 서울에 혼자 올라와서 바로 만났는데 저한테는 행운이었죠. 1년 동안 선생님 밑에서 데생을 했어요. 원고료를 받아서 생활도 하고 꽤 괜찮았거든요. 그동안 모은 돈으로 1년 반 정도 지나서 등록하러 학교를 갔어요.

    그런데 규정이 1년까지라서 자격이 상실되었다고 하더라고요. 비공식적으로 들어올 수 있느냐고 하는데 그런 돈은 없고, 돌아서서 나오는데 공부도 하기 싫고 돈도 없는데 잘 됐다 싶어서 학교를 그만두었어요. 그러면서 1969년도에 <소년중앙>이 창간되면서 본격적으로 잡지에 만화를 그리게 되었어요.

    ▶ 자신만의 독특한 캐릭터를 창조하신 건 언제였나요?

    1968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80년 초까지 그동안 만화를 그리면서 단 한 번도 만화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갖지 못했어요. 그때 만화에 대한 사회적인 안목이 안 좋았어요. 제가 어렸을 때 혹은 대학교 때 같이 그림을 그렸던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제가 만화를 그리는 걸 알고 경원시하더라고요.

    무엇보다도 제 자신이 만화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지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절친한 만화가인 한희작 씨에게 내 만화를 2년 동안만 그려달라고 해서 한희작 씨가 그려줬어요. 물론 중요한 인물이나 스토리는 제가 했지만 나머지는 다 해주셨어요. 그때 좁은 방에서 저는 뭘 했는가 하면 캔버스를 잔뜩 사다놓고 딱 2년 동안 유화를 그렸어요.

    참 묘한 게 2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 되니까 만화가 자꾸 그리고 싶은 거예요. 기간도 끝나고 그때 만화가가 되기로 완전히 결심을 굳혔죠.그럼 어떤 만화가가 될 것인가, 그 말은 어떤 만화를 그릴 것인가로 결정이 되는 거니까 고민이 되더라고요. 중학교 때 그린 만화가 신라 24대 진흥왕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니까 그렇다면 역사물 쪽으로 가자, 한국역사를 다 다룰 수는 없으니까 조선 시대로 좁혀보자고 해서 그렸던 것이 지금까지도 제 꼬리표처럼 ‘바지저고리’ 만화가라고 붙은 거예요.(웃음)

    ◇ 우연히 탄생한 캐릭터 ‘머털이’ 효자노릇 톡톡

    ▶ 가장 애착이 가는 캐릭터나 작품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장독대>의 캐릭터는 굉장히 못생긴 얼굴이에요. 장독을 연상하면 되는 캐릭터인데 이 주인공을 많이 활용할 때는 독자들이 주인공이 잘 생겨야지 왜 그렇게 못 생겼느냐고 편지에서 자주 물어요. 평범하고 못생긴 사람도 정의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이 많지 않느냐, 그래서 그렇게 그릴 뿐이라고 답장을 하죠.그리고 <객주>의 천봉삼 같은 인물은 정상적으로 그렸어요. 미남형이거든요. 문하생들이나 독자들이 좋아하더라고요.

    그 다음에 나온 것이 <머털도사>의 머털이인데 정말로 우연하게 탄생한 캐릭터에요. 너무 바쁠 때인데 잡지사에서 청탁이 왔어요. 못한다고 거절하다가 할 수 없이 하게 된 거예요. 일주일에 이틀은 꼬박 밤을 새고, 밤샌 다음 날 8페이지씩 월간지로 연재를 했어요. 내일이 마감인데 오늘 뭘 그릴까 생각하자니 스스로 한심하더라고요. 어릴 때 사촌 형과 함께 외가를 가면 산을 넘어야 했는데 그럴 때마다 도술을 부릴 줄 알면 날아가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는데 느닷없이 생각나는 거예요. 그래서 탄생한 만화에요.

    <소년중앙>에 연재하는 만화와 주인공들은 페이지도 많고 열심히 그렸어요. 그런데 이 8페이지밖에 안 되는 만화 <머털도사>가 그렇게 인기가 좋은 거예요. 탄생할 때는 천덕꾸러기로 탄생했는데 지금도 가끔 효자노릇을 합니다. 최근에 가장 효자노릇을 하는 건 <임꺽정>이에요. 책도 새로 나오고 불어로도 번역이 돼서 나왔는데 꾸준하게 제 통장을 채워주는 건 머털이에요.(웃음)

    ▶ 아무래도 역사물을 다루시니까 언어, 의상 등 고증을 철저히 거쳐서 하시나 봐요?

    바지저고리 만화를 그리겠다고 결심하고 2년 뒤에 김주영 씨의 소설 <객주>를 보게 되었어요. 그걸 읽는데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더라고요. 불어도 아니고 영어도 아닌 한글인데 말이죠. 그 원인이 뭔가 하면 이미 사장되거나 쓰지 않는 우리말이 너무 많은 거예요. 제 자신이 스스로 바지저고리 만화를 그리겠다고 결심한 지 몇 년이 흘렀는데 그걸 못 읽으니까 한심해 져요.

    내가 조선시대의 만화를 그리면 당시에 썼음직한 말을 쓰자는 생각도 들고 기와집, 초가집도 그대로 그리자, 그 시대상을 재현하고 싶은 마음을 가졌는데 이렇게 해서 만화를 그릴 수 있겠는가, 이렇게 모르니까 한심스럽죠. 그래서 욕심이 생긴 게 이 소설을 만화로 그리면 참 도움이 되겠어요. 그래서 5천 페이지가 넘는 한글 사전을 갖다 놓고 모르는 한글을 전부 발췌를 해서 시작했는데 실패했어요. 그냥 넘겨보기밖에 못했어요.

    원하는 일은 이루어지는지 2년 후에 김주영 선생님을 만나고 성사가 돼서 <객주>를 3년 동안 연재했어요. <객주> 소설을 완전히 분해했어요. 내용도 그렇고 모든 것을 알아야 하니까요. 매주 연재를 하니까 공부가 안 될 수가 없어요. 다 연재하고 나니까 객주를 읽으면 술술 넘어가요. 또 현대 용어도 조금 옛스럽게 바꾸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그 자리에서 다 바꾸지는 못해도 어떤 말이라는 건 느낌이 오거든요. 그걸 찾을 능력이 생겼다는 게 저한테 큰 도움이죠.

    ▶ 12시간씩 작업하시는 걸로 유명하세요.

    많이 연재할 때는 평균 14시간씩 작업했어요. 만화가가 스토리도 쓰고 그림도 그리면 좋겠는데 이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에요. 가장 좋은 건 글 잘 쓰는 사람이 스토리를 쓰고 그림은 만화가가 그리고, 매치가 잘 되면 좋거든요. 그런데 저한테는 그게 잘 안 돼요. 두어 번 시도를 해봤는데 사극을 쓰려고 하는 사람이 잘 없어요. 그래서 제가 글 쓰고 먹선, 펜 터치까지 다 하고 배경은 문하생들이 도와주죠.

    ◇ 소식 끊기자 무작정 상경해 찾은 아내

    ▶ 만화가들의 직업병이 있다면요?

    허리가 아픈 거예요. 그런데 다행히 저는 허리는 안 아파요.

    ▶ 사모님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대구 오성중학교를 같이 다니다가 집사람은 고등학교를 서울에서 다녔어요. 제가 봄, 가을 때마다 사생대회 실기하러 서울에 와요. 서울미대나 홍익대학교에서 개최를 하거든요. 그럴 때마다 합판 들고 기차타고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잖아요. 새벽에 서울에 도착하면 마중을 나오기도 하고 그렇게 세월을 보냈어요.

    아까 잠깐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림을 가르쳐주셨던 선생님이 교편을 그만두시고 화실을 운영하셨어요. 그래서 낮에는 화실에 갔다가 야간에 중학교를 다닌 거예요. 1학년 때는 몰랐다가 2학년 때 합반을 했는데 그때 보고 관심이 있었나 봐요. 3학년을 졸업하고 서울로 가니까 집사람이 보고 싶기도 하고 거의 매주 편지왕래를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소식이 딱 두절되었어요. 학교에 갔다가 밤에 집에 오는데 그날이 토요일이었어요. 서라벌예대 문창과를 갔다는 친구하고 같이 학교를 다닐 때였는데 이 친구는 사정을 다 아니까 소식이 없어서 궁금하다고 했더니 가보라는 거예요. 언제 가느냐고 했더니 지금 가래요. 그래서 책보를 챙겨서 그 친구한테 주고 워낙 어머님이 그 친구를 끔찍이 여기시니까 어머님한테 잘 말씀드리라고 하고 저는 서울로 올라왔어요. 새벽에 그집을 찾아갔더니 이사를 갔대요. 황당하죠.

    아침에 해가 뜨니까 가게 문들이 열기 시작하는데 마침 복덕방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할아버지가 나오시기에 이런저런 학생을 찾는다고 했더니 이사를 갔다는 거예요.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가끔 이 골목을 지난다고 하세요. 토요일에 올라왔으니까 그날이 일요일이라 멍청하게 거기서 기다렸어요. 한 10시쯤 되니까 저쪽에서 새카만 교복을 입고 누가 내려와요. 집사람이에요. 성경책을 들고 교회를 갔다가 오는 길이었던 거죠. 내용을 알고 보니까 장인어른이 돌아가셨어요. 이사도 했고 고향에 가서 며칠 있다가 오기도 하고, 그래서 연락이 두절되었던 거예요.

    ▶ 40년 동안 만화를 그리시면서 기억에 남는 팬이 있으실 것 같아요.

    한 번은 젊은 친구가 전화를 했는데 제 만화를 좋아하고 즐겨보는데 왜 그렇게 일본말을 느닷없이 많이 쓰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스포츠동아에 연재할 때인데 ‘다모토리’가 어쩌고저쩌고 하더라고요. 누구냐고 물었더니 재수생이래요. 그렇다면 한글사전을 찾아보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한 달 후엔가 전화가 다시 왔어요. 여보세요? 그랬더니 선생님, 오늘 저녁에 다모토리 어떻습니까? 그러더라고요. 어, 재수생? 했더니 맞대요. 한 번 만나자고 해서 만났죠. 친구하고 둘이 와서 소주를 한 잔 했는데 큰 잔으로 소주를 돌려가며 마시는 것을 순수한 우리말로 다모토리라고 합니다. 저는 사전을 보니까 이 말이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썼는데 이런 친구는 기억에 남아요.

    ◇ 이두호 가라사대 “쪽수는 적어도 정성 쏟는 만화 그려야”

    ▶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자서전도 내셨어요?

    해부학에서 뼈대를 알면 근육만 입히면 되잖아요. 마찬가지로 기와집, 초가집 같은 건축물도 설계도를 알면 더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겠다 싶어서 목수 신영훈 선생님이 한겨레에서 1년 반 동안 강의를 하신 적이 있는데 제가 그걸 신청해서 끝까지 들었어요. 예를 들어 명칭만 해도 암기와, 수기와, 댓보중 서까래가 어떻게 가고 연자는 뭐고 죽 설명을 하시는데 제가 그렸던 게 죄다 틀린 거예요. 알아서 좋기는 한데 그림을 그릴 때 이게 맞는 건지 틀린 건지 조심스러워더라고요. 모르고 그릴 때는 무식하게 그렸는데 당장 암초에 부딪치는 거죠.

    그리고 지금도 부끄럽게 생각하는데 안 써도 되는 한자를 써놓은 적이 있어요. 어쨌든 인쇄로 나왔는데 한자가 틀린 거예요. 그러니 얼굴이 뜨거워지죠. 또 붕어 지느러미가 7개인데 2개를 붙여서 6개로 잘못 그렸어요. 낚시는 초등학교 때부터 했으니까 거의 40년 동안 했는데 그걸 몰랐어요. 습관적으로 그렸던 일들, 또 제가 맞다고 우겼던 경우를 생각하고 글을 쓰고 나서 제목을 붙일 때 정말로 무식하니까 겁도 없이 용감하게 그렸다고 한 거예요. 지금도 그런 일들을 되풀이하고 있지만요.

    ▶ 만화를 학구적으로 그리시는 것 같아요.

    어느 날 초등학교 다니는 큰 애가 와서 가훈이 뭐냐고 물어요. 왜 그러냐고 했더니 학교 숙제래요. 당시에 제가 7,8군데 연재를 하니까 일에 지쳐 있을 때였어요. 처음에 연재를 시작하면 마음을 단단히 먹잖아요. 월간지는 두 달 정도, 주간지는 한 달 반 정도 열심히 하다가 초심이 사라지고 시간에 쫓기면 대충하다가 넘기곤 했거든요. 작심하고 후회하고 이런 걸 되풀이했어요. 이번에는 정말로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이 떠올라서 ‘최선을 다하자’라고 했거든요. 에이~그건 흔해 빠졌다고, 그럴 듯한 가훈은 없느냐고 하더라고요.(웃음) 학생들한테도 그 이야기를 꼭 해줘요.

    나처럼 하지 말고 쪽수가 적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온 정성을 쏟아 부어야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에 진출할 수 있다, 네 만화가 그렇게 돼야 한다고 말합니다.

    제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제 자신이 철저하게 하지 못해서 미진한 부분이 남아있기도 하고 또 해외를 다녀보니까 유럽 만화가들은 1년에 5,60쪽밖에 안 그린다고 하더라고요. 풀 컬러로 화가들이 하는 것과 똑같아요.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270페이지를 한 달에 혼자 다 그린 적이 있었거든요. 아무 소용없어요.

    저는 그런 게 늘 부끄러워요. <머털도사><임꺽정>을 내놓지만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걸 많이 느껴요. 그리고 <임꺽정>을 놓고 구체적으로 세분해서 지적을 해줍니다. 이 그림을 그릴 때는 전날 과음을 했다, 이 그림은 데생을 열심히 해놓고 마감시간을 맞추려고 펜으로 적당히 그려서 엉망이고 이건 일이 너무 많아서 부실하게 그렸고, 이렇게 분석을 해주거든요. 너희들은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늘 말해줍니다.

    ▶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회화에 대한 꿈도 있지만 만화도 표현하는 재료, 도구가 꼭 종이나 먹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캔버스에 유화로 만화를 그려도 된다, 화선지에 붓으로, 볼펜으로만 그려도 된다는 생각으로 그 예를 우리 선조들 중에서 20명을 선택했어요. 그분들의 일화를 사람마다 다른 스타일로 그리고 있는데 지금 마무리 단계에 있어요.

    그리고 예전부터 한국사를 출간하자고 하는 출판사들이 많았어요. 처음에는 농담 비슷하게 이야기하다가 하게 돼서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니까 저 나름대로 정리를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또 동학에 관심 있는 교수님들과 동학 발상지를 많이 돌아다녔어요.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한 번 다뤄보고 싶어요.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박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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