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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기술 유출 '우려' 때문에 노동자 목숨길 가로막나



경제 일반

    삼성 기술 유출 '우려' 때문에 노동자 목숨길 가로막나

    노동자 죽어나가도… 작업환경보고서 수만장, 열람만 하라?

     

    삼성전자 직업병 집단 발병 사태의 원인을 밝힐 최후의 보루로 꼽히는 '작업환경측정보고서(이하 보고서) 정보 공개가 사실상 무기한 연기됐다.

    첨단 반도체 기술 유출에 대한 '만에 하나'의 우려도 중요하지만,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보장할 해법 마련도 시급해보인다.

    ◇ 권익위·법원·산업부 잇따라 삼성 손들어… 보고서 공개 다시 원점으로

    국민권익위원회 산하 중앙행정심판위원회는 지난 17일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등에 대한 보고서 정보공개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였다.

    이어 지난 19일에는 수원지방법원 행정3부(당우증 부장판사)도 삼성전자가 고용노동부 중부고용노동청 경기지청장과 평택지청장을 상대로 낸 보고서 부분 공개 결정 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을 인용했다.

    이처럼 공정위와 법원이 차례로 보고서 정보 공개를 막아세우면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듯했던 삼성 직업병 사태는 다시 법적 공방으로 묻히게 됐다.

    더구나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산업기술보호위원회도 일부 보고서에 국가 핵심 기술이 포함됐다는 해석을 내놓으면서 향후 재판 과정도 직업병 피해자들에게 좀 더 불리해졌다.

     

    이러한 일련의 삼성 보고서 보호 움직임의 서막은 산업부 백운규 장관의 입에서 시작됐다.

    백 장관은 지난 12일 "노동부는 노동자의 안전과 국민의 알 권리 등을 고민할 것이고 산업부는 국가의 기밀 사항을 고민해야 하는 부처"라고 발언했다.

    백 장관의 발언으로 보고서 공개 논란은 ‘생존과 건강권을 위해 산재입증에 필요한 정보를 요구한 직업병 피해자와 영업비밀 보호를 강조하는 삼성 간의 갈등’에서 ‘반기업 정서가 팽배한 좌파 정권의 전문성 없는 일부 부처와 세계 반도체 1등 기업이자 한국 경제 대표주자인 삼성 간의 다툼’ 양상으로 비화됐다.

    더구나 백 장관이 강조한 보고서의 영업비밀 유출 우려는 이미 지난 1월 대전고등법원이 삼성전자 온양공장 보고서를 공개하라고 판결할 때 논파된 사항을 뒤집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삼성은 "작업환경측정결과 보고서에는 공정간 배열이 기재돼 있다"며 배치된 설비의 기종 및 보유 대수, 배치, 사용 화학물질의 종류와 사용량도 간접 추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법원은 판결문에서 "보고서에는 라인명과 공정명이 기재되어 있을 뿐 공정간 배열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고 명시했다.

    또 보고서에는 각 생산라인에 배치된 근로자 수, 근로형태 등 외에 배치된 설비의 기종 및 보유대수, 생산능력, 설비배치, 공정 자동화 정도, 인건비 관련 자료, 각 공정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의 종류․사용량․구성성분 등에 대해서도 기재되지 않는다고 강조하며” 불확실한 기술유출 가능성보다 노동자들의 건강권이 우선한다”고 지적했다.

    한 노동부 관계자는 "국가핵심기술 판정과 무관하게 보고서에 영업비밀이 담겼는지 여부는 다른 곳이 아닌 법원이 판단할 문제"라며 "이에 대해서는 이미 대전고법이 결론을 내린 사안인데 사태가 원점으로 돌아왔다"고 지적했다.

    이어 "피해자들 대부분이 희귀 중증질환을 앓고 있고, 유가족들은 직장에 다닐 가족구성원을 잃어 생계가 어려운데 보고서 공개까지 다소 시일이 걸리게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 보고서 공개, 피해자 열람으로 충분? "전문용어 가득 찬 수만장 보고서인데…"

    처음으로 삼성 반도체 직업병 문제를 세상에 알린 고(故) 황유미 씨가 숨을 거둔 때가 2007년, 같은 해 11월 반도체 직업병 문제를 제기하는 시민단체 '반올림'이 발족된 이후 11년이 넘었다.

    그동안 삼성은 관련 자료를 충분히 제공했다며 억울하다는 입장이지만, 피해자·유가족과 반올림 측은 삼성이 산재 책임을 은폐하기 위해 증거 조작과 부실 공개, 뒷북 대응에 급급했다며 반박하고 있다.

    보고서가 주목받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보고서는 사업주가 작업장 내 유해물질 190종에 대해 노동자의 노출 정도를 6개월 단위로 측정해 기록하고, 정부가 보관한다.

    보고서 역시 사업주가 '자체 측정'한 결과여서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6개월 단위로 작성되는 보고서야말로 퇴직 후 수년이 지나서야 뒤늦게 긁어모은 자료보다는 많은 정보를 담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삼성 직업병 피해자들의 산재 입증에 필요한 최소한의 증거로 여겨지고 있지만, 당장 이번 보고서 공개에 대한 입장만 봐도 양측의 생각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

    삼성 관계자는 "노사협의회 대표에게 측정결과를 1년에 2회씩 정기적으로 직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며 "산재소송 당사자, 즉 소송인이나 법률대리인이 산재입증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내용은 적정한 장소에서 확인하고 기록할 수 있도록 협조하겠다"고 입장을 설명했다.

    다만 "보고서 전체를 가져가거나, 복사(등사)하는 것은 산재입증의 목적과 무관하다고 판단한다"며 "산재입증과 무관한 제3자에게 해당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또 노동부에 보고서를 제출하기 때문에 산재 관련 기관의 담당자들은 보고서를 자유롭게 볼 수 있으므로 산재 입증에도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과연 삼성의 주장대로 보고서를 피해자들이 열람하는 것만으로 산재 입증이 가능할까?

    반올림 이종란 노무사는 "2010~2014년 기흥공장 보고서에 대해 정보공개를 청구할 때 장당 50원씩 17만원을 내라고 했다. 보고서 분량이 무려 3660장이나 됐기 때문"이라며 "노출될 수 있는 유해화학물질 가짓수가 워낙 많고, 용어도 전문적이어서 단시간 열람만으로 유해성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언했다.

    이번에 논란이 된 보고서는 2007년부터 10년 동안 온양·기흥·화성·평택 반도체공장과 구미 휴대전화공장을 아우른다. 기흥공장 사례에 비춰보면 그 분량은 수만장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또 정부가 관련 정보를 갖고 있더라도 산재 입증 책임이 피해노동자에게 지워지는 현 제도 상으로는 노동자가 제대로 산재 신청조차 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반올림 활동을 지원 중인 노무법인 '참터' 소속의 김민호 노무사는 "삼성이 작업환경측정보고서를 공개하지 않았는데도 지난 10년 동안에만 22명이 산업재해를 인정받았다"며 "만약 보고서를 공개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산재를 더 입증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라"고 지적했다.

    물론 반도체 산업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영업비밀 유출을 우려하는 삼성의 입장도 기우(杞憂)로 단정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노동부 등 관계 부처도 보고서 공개 방식 등을 놓고 묘수를 찾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다.

    가령 미국의 경우 당사자는 퇴직한 뒤에도 작업환경을 측정한 보고서를 원본으로 볼 수 있고, 만약 영업비밀 유출이 우려되면 그에 따른 대체 정보 요건을 정해 제공하고 있지만, 한국은 이러한 보호장치가 없다.

    또 대전고법의 판결에서 보고서 정보 공개의 대상과 목적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제3자도 피해자와 같은 보고서 내용을 입수할 수 있는데, 보고서 공개 범위를 정보 제공 대상에 따라 다르게 공개하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근본적으로는 산재 여부를 사업장 정보에 접근하기 어려운 피해노동자 개인이 일일이 입증하는 현행제도를 개선해 정부나 기업에 해당 책임을 지우도록 관련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종란 노무사는 "산재 원인을 증명할 방법이 없는 노동자에게 입증 책임을 온전히 부담하는 현 제도가 가장 큰 문제"라며 "적어도 대법 판례대로 사업주의 협조 거부나 행정상의 조사 부실 등 노동자 책임 없는 사유로 입증되기 곤란하다면 노동자에 유리하게 판결하도록 입증 책임을 완화하는 방안을 법령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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