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연출가 이윤택이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에서 성추문 논란에 대한 사과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
연극계에서 성범죄 피해를 알리는 '미투' 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가해자로 지목된 연출가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더러운 욕망을 억제하지 못했다"며 공개 사과했다. 그러나 이 전 감독은 퇴폐 안마 요구와 신체접촉 등은 인정하면서도 최근 불거진 성폭행 의혹에 대해서는 "강제가 아니었다"고 적극 부인해 논란을 예고했다.
◇ "더러운 욕망 억제 못해" 주변 경고 수차례 받았다고 시인
연극계 거물 이 전 감독은 19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김수희 연출가가 지난 14일 자신의 SNS에 이 전 감독의 퇴폐 안마 요구 등 성추행을 고발하고, 이후 피해자들의 추가 폭로가 잇따르자 직접 사과에 나선 것이다.
이날 수많은 취재진들이 몰려 극장은 인산인해를 이뤘으며, 연극계 종사자들과 피해자 주변 인물들도 참석했다. 한 여성은 '사죄는 당사자에게, 자수는 경찰에게'라는 손피켓을 들고 항의하기도 했다.
이 전 감독은 초반부에 잘못을 시인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그동안 저에게 피해를 입은 당사자분들에게 진심으로 사죄드린다"며 "정말 부끄럽고 참담하다. 제 죄에 대해서 법적 책임을 포함하여 그 어떤 벌도 달게 받겠다"고 사과했다.
이 전 감독은 연극계 선후배들로부터 성추행과 관련해 여러번 항의와 경고를 받았지만 이를 무시하고 추행을 여러차례 반복했다고 시인했다.
그는 "선배 단원들이 항의할 때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매번 약속을 했는데 번번이 제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큰 죄를 짓게 된 것이다"고 말해 김수희 연출가의 '미투' 폭로가 있기 전부터 여러차례 주변의 경고를 받았음을 내비쳤다.
이 전 감독은 단원들에게 퇴폐 안마를 시키고, 발성을 가르친다며 신체 접촉을 하는 등의 성추행을 한 의혹에 대해 잘못을 인정했다.
그는 "연희단거리패 출신들로서 밖에 계시나, 안에 계신분들이나 수차례 저에게 항의하고 문제제기하고, 저는 거기에 대해서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그러면서 번번이 제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이런 악순환이 오랫동안 계속됐다"고 말했다.
'피해자를 몇명으로 파악하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솔직히 모르겠다"며 "극단 내에서 18년 가까이 진행된, 생활에서 관습적으로 일어난 아주 나쁜 행태라고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그러면서 "제가 정작 어떤 때는 이게 나쁜 죄인지 모르고 저질렀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죄의식을 가지면서도 제 더러운 욕망을 억제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말해 무수한 피해자가 있음을 암시했다.
연극연출가 이윤택이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에서 성추문 논란에 대한 사과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
◇ "성추행은 했지만 성폭행은 아니다" 성폭행 강제성 부인, 논란 예고이 전 감독은 그러나 전직 연희단거리패 단원이 제기한 성폭행 의혹에 대해서는 전면 부인했다. 단원들에게 퇴폐안마는 시켰고, 성관계는 있었지만 성폭행은 하지 않았다는 취지다.
그는 "인정할 수 없다. 성폭행은 아니다"며 "이 일의 진위 여부는 법적 절차기 진행되면 성실히 수사에 임하겠다"고 강조했다.
특히, "강제가 아니었다"면서 강제성을 부인하면서도 "그 분에게 직접 사과할 용의가 있다. 그 분의 아픔을 수용하고 그 분의 말을 믿고 존중한다"고 말해 앞뒤가 모순되는 답변을 하기도 했다.
관련 질문이 집중되자 "폭력적이고 물리적인 방법으로 성폭행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라며 "이 문제는 차라리 법적 절차에 따라서 그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란다"고 말해 논란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날 기자회견은 본인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숱한 쟁점을 남겼다. 연극계 인사들과 극단 관계자들이 이 전 감독의 성추행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경고를 했지만 법적 처벌을 미루고 쉬쉬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또한 이 전 감독은 성추행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성폭행에 대해서는 '강제성이 없었다'고 주장해 논란을 예고했다.
한편, 이 전 감독이 이끌던 극단 연희단거리패는 해체 수순을 밟게 됐다. 연희단거리패는 지난 1986년 부산에서 창단돼 수많은 작품을 공연하면서 명성을 쌓아온 유명 극단이다.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오늘로 연희단거리패를 해체한다"며 "그동안 이 연출의 행동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성폭력이라는 인식을 하지 못했다"고 해체를 선언했다.
김 대표는 이 전 감독 명의의 30스튜디오를 비롯해 부산 가마골 소극장 등 관련 건물은 모두 처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