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배너 닫기

책/학술

    "승무원은 모두 내려라"…배와 운명 같이 한 함장

    • 0
    • 폰트사이즈

    [임기상의 역사산책 32]독일 선장들, 격전 끝에 배와 운명을 같이 하다

     

    ◈ 그라프 쉬페호, 남미 바다에서 마침내 포착되다

    2차세계대전이 막 시작된 1939년 12월 13일 아침 6시.

    하우드 제독이 이끄는 영국 전함 3대가 힘들여 찾던 독일 전함 '아드미랄 그라프 쉬페호'를 발견했다.

    당시 영국 해군은 영국으로 향하는 호송선단을 파괴하는 U보트와 독일 전함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독일 전함들은 대서양 남북으로 나뉘어 잇따라 상선들을 침몰시키고 있었다.

    영국 전함들도 동서남북으로 영역을 정해 독일 배들을 찾고 있었다.

    남미쪽 함대에 속한 중순양함 에그시터와 경순양함 어킬리즈, 에이잭스가 노리는 목표물은 그라프 쉬페호였다.

    그라프 쉬프호의 함장 한스 랑스도르프. 부하들을 살리고 배와 운명을 같이 한다.

     

    그라프 쉬페호의 함장인 한스 랑스도르프의 명성은 영국 해군에서도 자자했다.

    그는 나찌당원이 아닌 순수한 군인이었다.

    영국 수송선을 공격할 때도 미리 경고 방송을 통해 무슨 이유로 격침시키는지를 설명해 배에서 탈출하도록 조치했다.

    구조한 선원들도 민간 포로로 취급해 인근 항구에서 즉시 풀어 주었다.

    그런 인물이라도 영국 상선이 당한 피해를 생각하면 이 배를 침몰시켜야 했다.

    ◈ 그라프 쉬페호, 부상을 입고 퇴각하다

    쉬페호에 장착했던 150밀리미터 주포. 영국 전함 3척과의 대결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영국 전함들은 좌우로 흩어져 그라프 쉬페를 포위하려고 했다.

    그 사이에 쉬페가 먼저 폭탄을 중순양함 에그시터호에 발사해 2번 포탑을 망가뜨렸다.

    다른 영국 경순양함 2척도 일제히 쉬페에게 포격을 가했다.

    격렬한 공방전 끝에 영국 순양함들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지만 쉬페도 20여발의 명중탄을 맞아 37명이 전사했다.

    세가 불리하다는 걸 깨달은 랑스도르프 함장은 배의 방향을 돌려 인근에 있는 중립국가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 항구로 피난을 갔다.

    항구에 들어온 쉬페호는 부상자를 병원에 이송하고 배를 수리했다.

    ◈ 항구에서 쫒겨나게 된 쉬페호, 자침을 선택하다

    몬테비데오에 정박하면서 전투에서 생긴 피해를 살펴보고 있는 쉬페의 수병들. (사진='2차세계대전 시크릿 100선' 제공)

     

    국제법상 교전 중 긴급한 상황이 발생한 군함은 중립국에 피난갈 수 있지만, 그 시한은 24시간이었다.

    우루과이 주재 독일 대사관이 필사적으로 로비를 벌여 72시간으로 연장했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이 사이에 영국 해군은 비상을 걸어 가까이 있는 전함들을 불러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모이는데 시간이 걸리는데다 달려오는 전함의 전력이 시원치 않자 마타도어 작전을 벌인다.

    BBC방송을 통해 "주변의 모든 해군력을 몬테비데오 항구 앞에 집결시킬 것을 명령했다"는 거짓 뉴스를 계속 방송했다.

    고민에 빠진 랑스도르프 함장은 항복이나 격침을 피해 자침하기로 결심했다.

    사흘의 시한이 지난 1939년 12월 17일 함장은 입항한 독일 상선 타코마호에 700여명의 승무원들을 태웠다.

    그리고는 25만명의 우루과이 국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몬테비데오 앞바다로 나갔다.

    자침을 시작한 그라프 쉬페호. 선원들을 다 대피시키고 함장 혼자 자리를 지켰다.

     

    함장은 오후 4시 15분에 라플라타 강 하구로 천천히 배를 몰고 가다 7시 36분에 닻을 내렸다.

    20분 후 거대한 폭발과 함께 전함은 바닷속으로 침몰했다.

     

    랑스도르프 함장은 나찌 국기 대신 프로이센 국기로 자신의 몸을 감싼 채 권총으로 자살한다.

    그는 한 장의 유서를 남겼다.

    "그라프 쉬페를 침몰시킨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조국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내 인생을 바칠 수 있어 행복하다"

    ◈ "드디어 비스마르크호를 발견했다~ 모두 출항하라"

     

    쉬페호가 바다 속으로 들어간 후 1년 반이 지난 1941년 5월 19일 새벽.

    독일 최대의 전함 비스마르크호가 그의 오른팔 프린스 오이겐호를 대동하고 폴란드의 항구 고펜하텐을 출발했다.

    비스마르크호는 배수량 50,995t에 선체 길이 251m, 폭 36m의 크기에 구경 380mm의 주포 8문과 각종 대공포를 장착한 떠있는 요새였다.

    두 함정은 노르웨이 베르겐에 머물다 북대서양으로 진출했다.

    주어진 임무 역시 영국으로 향하는 상선들을 요격하고, 영국 전함들이 출동하면 맞붙어 싸워 U보트가 마음껏 활동하도록 공간을 만든다는 것이다.

    영국 정찰기가 베르겐 상공에서 비스마르크호를 발견해 해군본부에 알렸다.

    영국 전함 전부가 총출동했다.

    5월 23일 새벽 전함 'HMS후드'와 '프린스 오브 웨일스', 구축함 6척으로 구성된 함대가 비스마르크호와 마주쳤다.

    영국의 자존심 전함 'HMS후드'. 2문의 380mm 회전포탑이 위엄을 뽐내고 있다. (사진='2차세계대전 시크릿 100선' 제공)

     

    독일과 영국의 전함들은 23km의 거리를 두고 일제히 폭탄을 날렸다.

    먼저 후드호가 직격탄을 잇따라 맞고 휘청거리다 엄청난 폭발과 함께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침몰하는 후드호와 서둘러 퇴각하는 프린스 오브 웨일스호

     

    불운하게 탄약고에 포탄이 날라간 것이 치명타였다.

    승무원 1,419명 가운데 단 3명만이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탈출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비스마르크호와의 교전 2달 전에 단체사진을 찍은 후드호의 승무원들. 단 3명만 살아남는다.

     

    영국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도 7차례에 걸쳐 난타당하고 줄행랑을 쳤다.

    비스마르크호도 2차례 타격을 받고 연료 탱크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함장 뤼첸스 제독은 주어진 임무를 포기하고 프랑스로 뱃머리를 돌렸다.

    ◈ 망신당한 영국 해군, 이를 악물고 비스마르크호를 추적하다

     

    영국의 자랑 '후드호'가 침몰하자 영국은 충격에 빠졌다.

    복수를 위해 인근 함정은 물론 멀리 지중해에 있는 함대까지 북대서양으로 불렀다.

    추적 5일만인 5월 26일 프랑스 해안에서 1,270km 떨어진 바다에서 비스마르크호가 '카타리나' 수상기에게 포착됐다.

    각종 전함들이 쫒아가는 가운데 먼저 항공모함 아크로열호에서 뇌격기 '페어리 소드피시' 15대가 출격했다.

    소드피시는 외형은 구닥다리지만 적의 군함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어뢰공격에 능했다.

     

    뇌격기는 2차 공격에서 2발의 어뢰를 명중시켜 그 중 1발이 비스마르크호의 후미 추진부를 날려버렸다.

    배는 항진속도도 떨어지고 점차 기울어져갔다.

    곧이어 달려온 영국 전함들은 쓰러져가는 적함을 향해 무차별적인 폭격을 가했다.

    어느 순간 비스마르크호의 모든 함포는 침묵하고, 함장은 전원 퇴함을 지시한다.

     

    거함은 왼쪽으로 기울며 선수를 하늘로 세우며 선미쪽부터 서서히 바다 속으로 침몰해갔다.

    함의 나포를 막기 위해 모든 배수갑문에 폭탄을 설치해 자침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2,400명의 수병 가운데 115명만 구조되었다.

    함장 이하 고급 장교단 모두 배와 함께 운명을 함께 했다.

    영국 해군에 의해 구조되고 있는 비스마르크호 수병들

     

    이렇게 인명 피해가 커진 것은 침몰이 순식간에 벌어진 것도 있지만, 인근 바다에 독일의 U보트가 출현했다는 소식을 듣고 영국 전함들이 잠시 철수했기 때문이다.

    한참 지나서 나타난 영국의 중순양함 도르시셔호의 승무원들은 묵묵히 독일 수병들을 한명씩 건져 올렸다.

    우리 배를 침몰시킨 적국의 병사라도 바다에 빠진 사람은 구하는 것이 뱃사람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이 시각 주요뉴스


    실시간 랭킹 뉴스

    노컷영상

    노컷포토

    오늘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