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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 골목길 한바퀴...김구·홍난파·윤동주를 만나다



'서촌' 골목길 한바퀴...김구·홍난파·윤동주를 만나다

동서양 뒤섞인 이색 건축물 즐비...근현대사 아픔·희망 오롯이 담아

홍난파 가옥 뒷편으로 앨버트 테일러가 지은 서양식 2층 주택 '딜쿠샤'와 권율장군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420년의 거대한 은행나무가 우뚝 솟아있다. /이명진 기자 mjlee@nocutnews.co.kr

 



'서촌'은 경복궁 서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으로 조선시대 역관이나 의관 등 전문직인 중인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서쪽 사이, 청운·효자동과 사직동 일대를 뜻한다. 관광 명소로 유명세를 탄 북촌과 달리 서촌은 사람들의 북적거림도 덜하다. 어딜 가도 길과 길을 잇는 골목길의 마지막 장소는 어릴 적 살던 동네처럼 낯이 익다.

개발이 제한되었던 덕에 시간이 느긋하게 흐르는 서촌마을은 골목 사이사이 오래된 한옥과 낡은 대문, 골목길에서 만나는 옛 서울의 정취와 낭만이 오롯이 남아있다. 실핏줄처럼 이어진 골목을 돌아 세월을 덧댄 개량 한옥과 근현대에 지어진 서양식 저택을 보면서 북촌과 비교되는 서촌마을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발견할 수 있다.

골목골목 누비며 옛 역사를 찾아 나서는 즐거움도 빠질수 없다. 오랜 시간을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무관심 속에 버텨온 행촌동의 '딜쿠샤'와 지금은 '박노수 박물관'으로 바뀐 옥인동 저택, 백범이 머물던 경교장과 홍난파 가옥은 복잡한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채 도시 속에 남아있다. 또, 세월이 흘러 가옥은 사라졌지만 사진 속에 남아있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흔적들을 찾아 서촌마을의 옛 추억길을 거닐어 봤다.
 
■ 백범 김구 선생이 3년7개월간 머물던 경교장

강북삼성병원 옆으로 길게 뻗은 고갯길을 걷다보면 경교장과 홍난파 가옥으로 갈 수 있다. 큰길에서 보면 병원으로 들어가는 길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촌 일대에 남은 역사의 흔적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다.

경교장은 1945년 중국에서 돌아온 백범 김구 선생이 1949년 암살당할 때까지 숙소와 집무실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지금은 강북삼성병원 본관에 이어져 있다. 이 건물은 원래 제2차세계대전 직전인 1938년에 금광업을 하던 최창학이 지은 양옥 주택이다. 설계와 시공은 김세연이 담당했는데 일제 때에는 죽첨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경교장이 알려진 것은 백범이 광복 후 3년7개월간 이 건물에 머물면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하다가 1949년 6월 26일 이 곳에서 저격을 받아 서거했기 때문이다. 내부에 부분적인 변형이 있지만 건물 외관이나 기본적인 형태는 잘 보존돼 있다. 2층 창문을 아치형으로 만들었으며 내부에는 탄흔과 깨진 유리 등이 전시돼 있어 백범 암살 당시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종로구 홍파동 2016 위치한 홍난파 가옥. /이명진 기자 mjlee@nocutnews.co.kr

 



■ "울밑에 선 봉선화야~" 노래 들릴 것 같은 홍난파 가옥

경교장을 나와 서울시교육청 방향으로 계속 걷다 보면 언덕길 아래 오른쪽에 붉은 벽돌로 지은 2층짜리 양옥집이 나타난다. 이집은 '고향의 봄'을 작곡한 홍난파(1898~1941)가 6년간 지내면서 말년을 보낸 집이다. 이 때문에 '홍난파 가옥'이라 부르고 있다. 당시 근처 송월동에 독일 영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일대에 독일인 주거지가 형성됐다. 재개발의 광풍이 불면서 그 당시 건물들은 다 헐리고 이 집만 남아 있다.

홍난파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이 주택은 1930년대 독일 선교사가 지은 벽돌조 서양식 건물로 서양식 주택 특성이 원형대로 잘 보존돼 있다. 마당에 홍난파의 흉상이 세워져 있고, 붉게 물든 담쟁이가 벽돌담을 덮고 있다. 현재는 홍난파를 기리는 기념관과 소규모의 음악회나 감상회 등을 열 수 있는 공연장으로 쓰이고 있다.

홍난파는 이 집에서 지내면서 그의 대표작 가운데 많은 작품을 작곡했다. 그 중 '봉선화' '고향의 봄' 외에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등 가곡과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등 동요는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다. 그는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1년 숨을 거뒀다. 홍난파는 음악 외에 문학에도 소질을 보여 '처녀혼' '향일초' '폭풍우 지난 뒤' 등 소설 창작집을 20대에 발표하기도 했다. 홍난파는 민족의 아픔을 표현한 '봉선화'를 작곡하기도 했으나, 일제에 검거된 뒤에는 친일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친일인사명단에 올라있다.

서울시 종로구 행촌동 1-88번지에 위치한 딜쿠샤. 이명진 기자 mjlee@nocutnews.co.kr

 



■ 3·1운동을 알린 앨버트 테일러의 이상향 '딜쿠샤'

홍난파 가옥 뒤편으로 권율 장군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420년의 거대한 은행나무가 가옥들 사이로 우뚝 솟아있다. 역사가들은 은행나무 근처를 권율의 집터로 보고 있다. 그래서 이곳 지명이 행촌동이다.

은행나무 건너 맞은편에는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1895~1948)가 1923년 건축한 주택 '딜쿠샤(Dilkusha)'가 있다. 딜쿠샤는 힌두어로 이상향, 행복한 마음, 기쁨을 의미한다. 외벽동측면 하단의 정초석에는 'DILKUSHA 1923, P.S.AIM CXXXVII-I'라는 문구가 남아있다. 딜쿠샤는 퇴락했지만 아름답고 기품 있으며 역사학적으로 의미가 매우 깊은 건물이다.

앨버트 테일러는 UPI통신사의 서울특파원으로 활약하며 1919년 일제의 화성 제암리 학살사건을 최초로 세상에 알렸다. 그는 고종황제의 국장을 촬영한 사진도 남겼다.

독립선언서를 발견하고 외신에 알린 사람도 바로 앨버트다. 3·1 독립선언문을 입수해 이를 갓 태어난 아들의 침대 밑에 숨겨 두었다가 외신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렸다. 테일러는 이 일로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지금의 독립공원)에 갇혔고, 1942년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제에 의해 추방될 때까지 딜쿠샤에 살았다. 이후 앨버트는 끝내 딜쿠샤로 돌아오지 못한 채 1948년 미국에서 생을 마쳤고, 유언에 따라 그는 한국 땅에 묻혔다.

이 건물은 개항 이후 지어진 서양식 주택 중에서도 평면구성과 외관이 독특하다. 화강석 기적부 위로 벽돌을 세워 쌓는 풍랑스식 쌓기는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휘귀한 벽돌쌓기 형식으로 딜쿠샤의 이국적 풍모를 더해주고 있다. 그러나 오랜 시간동안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채 붕괴 위기에 처해있다.

현재, 딜쿠샤는 국가재산으로 귀속 됐지만, 언젠가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해 지금은 10여 가구 이상이 살고 있다. 지난해 4월 딜쿠샤의 소유주인 한국자산관리공사로부터 서울시가 문화재등록 동의까지 받았지만 수십 년 동안 이곳을 무단 점거해 살고 있는 이들의 이주 대책이 없어 고민 중이다.

서울시 종로구 옥인동에 위치한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 /이명진 기자 mjlee@nocutnews.co.kr

 



■ 미술관으로 변신한 한국화 1세대 박노수 가옥

통인시장에서 인왕산이 보이는 수성동계곡으로 올라가는 골목길 오른쪽에 박노수 가옥(현재는 종로 구립 '박노수 미술관')이 있다.

이 집은 일제 시대 대표적 친일파인 윤덕영이 1938년 그의 딸을 위해 지은 집으로 박 화백이 지난 1973년도에 사들였다. 지난해 2월 박 화백이 별세할 때까지 거주하면서 작업 공간으로 활용했다. 박 화백은 영화배우 이병헌과 결혼한 탤런트 이민정의 외할아버지다.

원래 이 건물은 당시 화신백화점과 보화각(현재 간송미술관) 등을 설계한 한국 최초의 건축가 박길룡이 집을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덕영이 딸의 행복을 기원하며 지은 집이 박 화백의 손에 넘어간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한국화 1세대인 박 화백은 광복 이후 국내 화풍에 남아 있던 일제의 잔재를 떨쳐 버리고 독자적인 화풍을 시도, 한국화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힘쓴 인물이다. 작품 활동에 매진한 박 화백의 체취가 곳곳에 배어 있다. 현재 이 집은 박 화백의 작품과 소장품 1000여점을 종로구에 기증해 지난해 9월부터 지역 첫 구립 미술관으로 탈바꿈했다. 서울시 문화재자료 1호로 지정돼 있다.

건물을 보면 2층짜리 가옥은 신문물이 들이닥쳤던 20세기 초 사회상을 증거하듯 한국, 중국, 서양의 건축 양식이 한데 뒤섞여 있다.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에 한옥 서까래를 걸고 지붕에 양기와를 얹힌 식이다. 내부를 둘러보면 아담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벽난로가 3개나 있어 당대 윤덕영이 얼마나 위세를 떨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마루 바닥과 문짝, 문설주에는 모두 오래 사용해도 변하지 않는 홍송이 쓰였다.

서울시 종로구 누상동 9번지에 위치한 윤동주 하숙집 터./이명진 기자 mjlee@nocutnews.co.kr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썼던 윤동주 하숙집 터

박노수 가옥을 나와 수성동 계곡 방향으로 더 올라가다보면 왼쪽은 누상동 오른쪽은 옥인동으로 나뉜다. 그 사잇길 윤동주 옛 하숙집 터가 나온다.

윤동주문학관을 비롯해 종로엔 민족시인 윤동주의 흔적들이 다수 남아있다. 그 중 하나가 누상동 주택가에 자리한 윤동주의 옛 하숙집 터. 지금은 멀끔한 현대식 주택으로 바뀌었지만, 1940년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윤동주가 머물며 시를 썼던 곳이다.

시인은 자신이 존경하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 하숙하며, 문학적 의견을 나누고 배움을 얻은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이 시기에 '별 헤는 밤'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등 지금까지도 큰 사랑을 받는 명시들이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더욱 의미가 깊은 장소다.

마침 지난 2월 16일은 시인의 69주기 였다. 시인은 일본에서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1943년 7월 체포돼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2월 16일 2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삶이 고단할 때마다 마음을 달랬던 한 편의 시 구절이 생각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가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와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별 헤는 밤 중에서)" 시인의 맑은 영혼이 더욱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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