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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세계 민중의 자유를 향한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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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 세계 민중의 자유를 향한 깃발

    [변상욱의 기자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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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마가 있는 고품격 뉴스, 세상을 더 크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CBS <김현정의 뉴스쇼=""> ''기자수첩 시즌2''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았다. [편집자 주]

    1960년 3월 15일 전국 곳곳에서 부정선거가 치러지고 있을 때 규탄 시위를 벌인 도시는 3 곳이다. 3월 15일 낮 12시 40분, 당시 전남 광주시 금남로에서 ''''곡(哭) 민주주의 장송'''' 데모가 벌어졌다. ''''민주주의의 사망을 애도한다''''는 이 시위가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항거한 첫 번째 시위로 꼽힌다. 시위에 참가한 군중의 규모는 천여 명 정도. 경찰 진압에 의한 부상자도 꽤 많았다고 전해진다. 광주 금남로공원에는 ''''4·19 민주혁명 발원지'''' 기념표지 석이 세워져 있다.

    이어 오후 1시에 경남 진주에서 시위가 벌어졌는데 당시 야당인 민주당 당원들이 주축이 된 시위였다.

    그리고 오후 3시 30분 마산에서 시민들의 대규모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오동동 문화의 거리가 시발점으로 ''''3.15 의거의 발원지''''라는 동판이 세워져 있다. 1차 시위가 끝난 뒤 날이 어둑해지면서 저녁 7시쯤부터 마산 2차 시위가 벌어진다. 바로 이 시위 때 경찰이 시위학생들에게 총과 최루탄을 쏴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 때 최루탄을 얼굴에 맞고 숨졌던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4월 11일에 낮에 발견되고 그날 저녁부터 다시 마산 시민학생의 시위가 시작돼 12일 13일까지 이어진다. 흔히 4.12 의거라고 부르는 반정부 부정선거 규탄 시위이다. 이로써 마산은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의 본원지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 4.19 - 가자, 세계로!

    4.19를 비록 미완의 혁명이라고 부르지만 국제사회에서 4.19가 갖는 의미는 자못 심각했다. 19세기 20세기를 지나며 제국주의의 강압적인 침탈과 강대국들이 일으킨 세계대전에 의해 좌절을 겪은 약소국마다 격변기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4.19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주독립의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서로의 상황을 예의 주시하던 세계의 민중들을 분발시키는 신호탄이 되었다.

    터키의 청년·학생과 시민들은 4.19를 지켜보고 나서 4월 28일 독재자 멘델레스를 축출하기 위한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 ''''우리 국민의 긍지와 자부심이 한국 국민들보다 어찌 못하랴!''''하며 그들은 이스탄불 거리에 나타난 계엄군 탱크 앞에 버티고 앉아 시위를 벌였다. 이때 한국 학생들의 희생을 찬양하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터키 청년 학생들의 4.28 민주화 봉기가 있고 나서 한 달 뒤인 5월 27일 터키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화 요구는 꺾이고 말았다. 그리고 한국 군부의 젊은 장교들은 터키의 군사 쿠데타에서 힌트를 얻어 1년 뒤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시민학생 혁명은 우리가 터키에 표본이 됐고 군사 쿠데타는 터키가 우리의 표본이 된 것이다. 탱크로 밀고 들어가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헌법을 새로 만들고 관권 선거를 통해 허수아비 국회를 만드는 것까지는 한국과 터키의 진행과정이 똑같다. 다만 터키 쿠데타 세력은 이후 정권을 민간에게 다시 넘겨줬고 우리나라 쿠데타 세력은 18년간 움켜쥐고 죽기까지 놓지 않았다는 것이 차이점. 그 후 우리는 군사 쿠데타를 한 번 더 겪고 터키는 3번 더 겪는다.

    일본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1960년 6월, 일본의 학생·노동자, 시민 수십 만 명이 들고 일어나 국회의사당 앞을 점거했다. 일본에서 ''''안보투쟁''''이라고 부르는 항쟁인데 ''''미일상호방위조약 갱신 반대투쟁''''이 본래의 이름.

    미국의 사회학자 라이트 밀즈는 1960년대에 한국의 4.19, 터키의 4.28, 일본의 6월 안보투쟁이 잇달아 열리는 것을 보고 20세기에는 학생운동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예견하며 ''''학생들이 역사적 변화를 이끄는 생생한 대행자가 되고 있다''''라는 메시지를 세계에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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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을 크게 떠라, 혁명은 배신당한다

    라이트 밀즈의 예언대로 1968년, 미국에선 4만여 명의 학생들이 반전 시위에 참가했다. 사우스캐롤나이나 주립대학에서는 경찰이 시위학생에게 총을 쏴 3명이 사망했고 이후 미국 학생운동은 급진 노선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프랑스 파리 낭테르 대학에서 자유와 인권을 외치는 시위가 시작돼 최루탄과 돌이 오고가다 곧이어 파리의 모든 대학이 폐쇄되고 5만 여명의 학생이 거리로 뛰어나오는 사태가 벌어졌다. 프랑스 6.8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학생들이 개선문을 점거하고 경찰은 폭동진압부대를 투입하다 노동자들이 학생들에 동조하면서 파업에 돌입했다. 드골 대통령은 결국 자신의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해 돌파하려 했으나 국민투표에서 불신임 당해 권좌에서 물러났다.[BestNocut_R]

    그러면서 바로 뒤를 이어 독일 학생들의 정부 긴급 조치법 항의 시위, 이탈리아 학생들의 대학 점거 시위,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칠레, 에콰도르, 콜롬비아, 멕시코 등지에서 대규모 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멕시코에선 군대가 시위학생들에게 집중 사격을 가해 200여명이 숨졌고 일본에선 학생 1,200여명이 미군기지를 습격했다. 그리고 체코 프라하에서 소련의 체코 침략이 진행됐고 11월 체코 학생들 역시 전국적으로 총칼에 맞서 시위를 벌이다 희생됐다.

    태국으로 가 보자. 태국은 10월 14일을 ''''완마하이빠욕''''이라 부른다. ''''대비극의 날''''이라는 뜻으로 시민혁명 기념일이다. 격변의 60년대를 지켜본 태국 시민.학생들은 1973년 10월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에 들어갔다. 결국 무능력하고 부패한 집권당의 수상은 해외로 도망쳤다. 이 시위에서 사망실종자가 수천 명에 이르고 수만 명이 부상당했다고 전해지는 데 아직도 정확한 통계는 없다. 엄청나게 참혹했던 혁명이다. 그러나 역시 1976년 군사쿠데타에 의해 혁명을 완수 못하고 허무하게 끝나버린다. 이것이 태국의 10.6 군부유혈 쿠데타이고 16년간 군부 장기집권이 이뤄졌다.

    이처럼 세계대전 이후 20세기 후반 지구촌을 휩쓴 자유민주운동의 서곡이 바로 4.19 혁명이었다. 그리고 4.19는 역사의 진보를 가로막는 어떤 벽도 하나 된 민중 앞에서 무너지고, 혁명의 완성을 위해서는 혁명보다 더 고단한 길이 놓여 있음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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