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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결혼식도 보지 못한 채…김근태, 힘겨운 삶 마감



정치 일반

    딸 결혼식도 보지 못한 채…김근태, 힘겨운 삶 마감

    원칙과 가치 추구하는 우직한 리더십…고문 가해자에 먼저 화해의 손길

     

    30일 세상을 떠난 김근태 한반도재단 이사장은 양지보다는 음지에 머물며 투쟁하던 80년대 운동권 세대의 정신적인 지주이며 대부였다.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았던 김 이사장은 지난달 29일 뇌정맥혈전증으로 쓰러져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뒤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그가 투병중에도 물밑에서는 야권통합에 힘을 실으며 또 한편으로는 내년 총선에 출마해 마지막 정치적 꿈을 펼치려 했기에 주변의 안타까움이 더욱 컸다.

    하지만 병세는 나아지지 않아 지난 10일에는 딸 병민씨의 결혼식도 보지 못하고 병석을 지켜야만했다.

    젊은 시절의 독재 정권과 맞서며 겪었던 고통이 끝내 그의 육체를 딸의 결혼식에까지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망쳐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탄압도 그의 맑은 정신만은 어쩌지 못했으리라 지인들은 확신하고 있다. [BestNocut_R]

    80년대에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섰던 그는 90년대 중반 민주개혁 세력의 대표자로서 제도권 정치에 입성했다.

    85년에는 안기부 남영동 분실로 끌려가 보름간 ''짐승에 가까운''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뜻을 함께한 사람들을 보호했다.

    하지만 현실정치에 발을 딛은 그는 번번히 결정적인 기회를 잡기 못하고 늘 ''저평가 우량주''로 평가됐다.

    뚜렷한 카리스마나 개성보다는 밑바닥을 아우르는 우직한 리더십은 빠른 템포의 정치권에 한발짝 뒤쳐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대중적 호소력''이 부족하다는 평도 이어졌다.

    2002년 대통령 경선에서도 노무현 후보에게 자리를 내줬으며, 이후에는 정동영 의원에게 밀려 대권주자의 자리에 서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늘 원칙과 가치를 추구하며 중심을 잡는 몇 안되는 정치인이었다.

    참여정부 말기 부동산 정책으로 갈팡질팡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계급장 떼고 맞붙어 보자"라며 호기롭게 맞서던 장면이 그 예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 자신이 힘이 있을 때에도 고문 가해자들에게 어떤 정치 보복도 하지 않고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었던 그의 신사적인 태도는 여야를 막론하고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수도권 야권 후보들이 줄줄이 낙마하던 17대 총선때 그는 도봉갑에서 뉴라이트 계열의 한나라당 신지호 의원에게 패해 국회의원 배지를 잃었다.

    보건복지부 장관, 열린우리당 의장, 유력 대선 후보, 3선 의원이라는 그의 정치 경력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그의 패배는 야권 전체의 충격이었다.

    김 이사장은 내년 4월 총선에서 ''설욕전''을 다짐했지만 결국 총선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그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병마에 시달리며 딸의 결혼식도 보지 못한 채, 마지막까지 힘겨운 삶의 매듭을 지어야 했던 그였기에 후배들은 빚진 마음을 안고 있다.

    설익은 야권통합으로 가시돋혀 서로를 경계하던 상황에서 그의 죽음이 야권 전체를 숙연하게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동료이자 친구인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도 최근 대표직을 내려놓은 뒤 홀로 지리산을 찾았다가 김 고문이 위독하다는 사실을 전해듣고는 이날 한걸음에 병원으로 달려왔다.

    심정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손 대표는 "그저 일어나기만을 바랄 뿐이죠"라며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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