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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터지자 경찰 손에 돌아가신 아버지…60년 뒤 이유 찾아"



문화 일반

    "6·25 터지자 경찰 손에 돌아가신 아버지…60년 뒤 이유 찾아"

    [보도연맹, 끝나지 않은 비극 ①] 유족 정해도 씨 "녹차밭서 시신 수습"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6·25전쟁. 66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남북 분단 상황에서 아픔의 깊이는 오히려 더해지고 있습니다. 그 짙은 그늘 아래 사람들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는 수많은 비극이 여전히 살아 숨쉬는 까닭이겠죠. 그 중 하나가 바로 '국민보도연맹' 사건입니다. 6·25전쟁 발발 당시 이승만 정권 주도로 셀 수 없이 많은 민간인이 학살 당했던 참극이죠. 25일, 6·25전쟁 66주기를 맞아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뼈아픈 역사에 관한 증언을 전합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6·25 터지자 경찰 손에 돌아가신 아버지…60년 뒤 이유 찾아"
    ② "탈영병과 성이 같단 이유로 형님은 국군에게 총살 당했다"
    ③ 이승만 정권은 왜 전쟁통에 국민을 무차별 학살했나


    6·25전쟁 당시 보도연맹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레드툼' 스틸컷(사진=구자환 감독 제공)

     

    경기도 용인에 사는 정해도(70) 씨는 네 살이던 1950년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홉 명의 마을사람들과 함께 경찰 손에 끌려간 그의 아버지는 녹차밭 아래 골짜기에서 숨이 멎은 채 발견됐다.

    "제 고향이 전남 보성이에요. 어릴 때니 아버님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죠. 그해 전쟁이 터지고 아버님이 경찰 손에 돌아가셨다는 사실만 어머니께 들어서 알고 있었죠. 아버님이 스물일곱 살에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지금까지 저 하나 바라보고 사셨어요. 스물다섯 살에 홀로 되신 뒤 90세를 넘기신 지금까지 저와 함께 살고 계시죠."

    노무현 정부 당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위)에서 신고를 받지 않았다면 정 씨는 지금까지도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2006년으로 기억합니다. 전쟁 당시 국가권력으로부터 재판 없이 목숨을 잃은 경우 신고하라는 내용을 신문에서 봤죠. 신고를 하고 이리저리 파보니 제 아버님이 보도연맹 소속이셨더군요. 돌아가시고 60년이 지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된 겁니다. 그렇게 마을에서 아버님과 함께 돌아가신 한 분도 찾았죠."

    이승만 정권에 의해 1949년 6월 5일 만들어진 국민보도연맹은 반공을 기치로 내건 관제단체다. 좌익 계열 인물들을 통제하고 전향시킬 목적으로 세워졌지만, 위로부터 할당을 받은 공무원들에 의해 사상과 관계 없는 민간인 수십만 명이 반강제로 가입됐다.

    이듬해인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지자 정부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과 손잡을 수 있다며 무차별적으로 붙잡아 재판 없이 학살했다. 당시 학살에는 주로 각 지역 경찰 병력이 동원됐다.

    정 씨의 어버지 역시 마을 이장을 지낸, 농사를 짓던 사람이었다.

    "과거사위에 신고를 해놓고 어머님께 여쭤보니 아버님이 보도연맹 소속이셨다더군요. 제 아버님을 비롯해 아홉 분이 경찰에 의해 보성 녹차밭에서 손이 묶인 채 돌아가셨다고요. (한숨) 어머님 말씀으로는 전쟁이 터지고 보성 회촌지사라는 곳에 보도연맹원들을 모두 모이라고 했답니다. 경찰은 그곳에 아버님을 비롯해 사람들을 꽤 오래 구금하면서 밥조차 주지 않았죠. 어머님이 밥까지 해서 나르셨다고 해요."

    국민보도연맹원증. 인적사항과 강령, 주의사항 등이 쓰여 있다. (사진=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제공)

     

    어느날 경찰이 가둬뒀던 사람들을 경찰서에 넘긴다고 했다. 그렇게 그날 아침 정 씨의 아버지 등은 차에 태워졌다. 하지만 아버지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가족 곁에 돌아왔다.

    "어머님은 아버님이 경찰서로 가시는 줄 알았다고 해요. 경찰이 안심을 시켰던 거죠. 돌아가신 아버님 두개골에 구멍이 나 있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당시 목숨을 잃고 매장·수장 되신 분들이 상당수였다는데, 그나마 저희는 아버님 시신이라도 수습했죠."

    그는 아버지가 보도연맹 학살 사건으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안 뒤 고향의 유족들을 수소문해 찾아다녔다. '정부에서 신고를 받고 있으니 이를 통해 늦었지만, 유족들이 명예 회복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라는 생각에서였단다.

    "유족들을 찾아다니면서 느낀 게 보도연맹 사건을 너무 모른다는 거였죠. 그 사실을 알던 유족들도 이제는 다들 돌아가신 상황에서 밑에 자손들은 부모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영영 모르게 됐습니다. 알더라도 혹시 뭐가 잘못 될까 쉬쉬하던 일이었으니까요. 당시 신고기간이 1년이었는데, 전체의 10분의 1도 신고를 안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 주변에도 부모님 시신도 못 찾았는데, 여전히 알리기를 두려워 하는 분들이 있어요."

    정 씨는 보도연맹 사건으로 인해 여전히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을 생각하면 억울하고 슬프다고 전했다.

    "저와 지금도 아픔을 나누고 관련 정보를 공유하는 유족이 83명, 18가족입니다. 우리 국민들 중에서는 보도연맹에 속했던 이들과 그 유족들을 간첩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아요. 그 아픔이 아직 끝나지 않은 셈입니다. 언젠가는 우리네 과거사의 진실이 확실하게 밝혀져야 하는 이유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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