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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을 침략해도 좋다…그러나 소련군은 참전 안한다"



책/학술

    "남조선을 침략해도 좋다…그러나 소련군은 참전 안한다"

    [임기상의 역사산책 86]스탈린, 북한과 중국을 미국과의 전쟁으로 떠밀다

    ◈ 중국의 공산화, 한반도를 뒤흔들다

    장개석을 대만으로 쫒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는 모택동.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을 밀어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스크바의 스탈린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웃한 중국대륙에 같은 공산주의 국가가 생긴 것은 축하할 일이지만, 자칫 유고의 티토처럼 독립노선으로 갈 경우 공산주의권의 분열이 예상되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중국 내전 기간에도 장개석 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해왔다.

    중국공산군이 양자강을 넘어 최후의 공격을 시도할 때는 강을 넘지 말라고 저지한 적도 있었다.

    그는 중국이 양자강을 경계로 북중국과 남중국으로 나눠 있기를 원했다.

    그래야 2개의 중국을 상대로 소련이 최대한 이권을 챙겨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이를 무시하고 양자강을 도하해 4달만에 중국을 통일시켰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날에 인민해방군이 천안문 광장에서 행군하고 있다.

     

    스탈린이 가장 뼈아프게 생각한 것은 미국과 장개석 정부의 동의를 얻어 확보한 만주의 이권…장춘철도와 여순항. 대련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반면 북한의 지도부에게 중국의 공산화는 엄청난 호재였고, 남한의 이승만 정부에게는 재앙에 가까왔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같은 생각을 품었다.

    "중국혁명이 성공했으니 다음은 우리 차례다"

    김일성은 재빨리 스티코프 주북한 소련대사를 찾아가 "스탈린과 만나 남조선 상황에 대해 토론하고 이승만 군대에 공격을 개시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싶다"고 전했다.

    그때까지 스탈린은 김일성의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막아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태도를 바꿨다.

    그는 전문을 보냈다.

    "남조선을 공격하는 문제에 대해 김일성이 나와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한다면 언제든지 그와 회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답했다.

    그리고는 북조선에 무기와 군수물자를 보내주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뛸 듯이 기뻐하며 "1950년 3월 30일 평양을 떠나 4월 8일 모스크바에 도착할 계획"이라고 보고했다.

    한편, 남한의 이승만은 불안한 시선으로 중국대륙의 공산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혼잣말을 했다.

    "그래도 우리 뒤에는 세계 최강국 미국이 있으니… 설마 우리 대한민국을 버리지는 않을거야"

    ◈ 김일성과 박헌영, 모스크바와 북경을 돌며 전쟁 허가를 받다

    1949년 3월 모스크바에 도착해 성명서를 읽고 있는 김일성.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6.25침공을 같이 추진한 부수상 박헌영이다.

     

    1949년까지 김일성의 통일전쟁을 반대했던 스탈린이 1950년대 들어 왜 생각이 바뀌었을까?

    우선 중국에게 다시 뺏긴 대련과 여순항 대신 인천과 부산항 같은 부동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의 공산화에 따라 북한 인민군이 패퇴할 경우 중공군을 구원병으로 대신 내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 미군과 중공군이 격돌할 경우 중국은 미국과의 대결을 계속하면서 어쩔 수 없이 소련에 기댈 수 밖에 없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950년 4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회담에서 김일성은 자신만만하게 4가지 이유를 들어 승리를 확신했다.

    1.북조선이 3일 안에 군사적 승리를 쟁취한다.
    2.남한에서 20여만 명의 남조선 공산당원이 봉기를 일으킨다.
    3.남조선에 있는 유격대가 인민군의 작전을 지원한다.
    4.미국은 이에 대해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다.

    스탈린은 흡족한 마음으로 동의하면서 교묘하게 조건을 달았다.

    "남침계획을 동의하지만 그 이전에 모택동과 이 문제를 협의하라"

    스탈린은 김일성과의 마지막 회의에서 다시 한번 토를 달았다.

    "만약 당신이 미국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다면 나는 전혀 도울 수 없소. 반드시 모택동에게 가능한 모든 도움을 요청하시오"

    스탈린은 만약 미국이 개입하면 자신은 뒤로 빠지고 중국이 나서서 책임을 지는 것, 즉 중공군이 직접 미국의 위협에 대항하도록 등을 떠밀 생각이었다.

    한반도를 초토화시킨 6,25 전쟁을 일으킨 주역들. 왼쪽부터 김일성, 모택동, 스탈린.(사진=전쟁기념관 제공)

     

    평양으로 돌아온 김일성과 박헌영은 한달 후인 5월 14일 북경으로 달려가 모택동을 만난 자리에서 "남침 계획을 스탈린 동지가 동의했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신중한 성격의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내 김일성의 얘기가 맞냐고 확인을 구했다.

    스탈린은 답신을 통해 "모스크바는 조선인들의 통일 방안에 동의했다"며, "이 문제는 반드시 중국과 조선 동지들이 최종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슬쩍 발을 뺐다.

    모택동은 고민에 빠졌다.

    갓 출범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완전히 파괴된 경제 복구, 사회 통합, 토지개혁, 대만 해방, 잔존한 국민당 세력의 소탕, 티벳 점령 등 현안이 산적했다.

    이 가운데 가장 급한 경제복구와 대만 해방을 위해서는 소련의 도움이 절실했다.

    모택동은 대만 해방을 먼저 이루기 위해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내심 반대했지만 스탈린의 의도를 읽고 결국 전쟁 발발에 동의했다.

    더구나 북조선은 중국의 국공내란 때 인적·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 이를 갚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소련에 이어 중국의 동의를 얻은 김일성과 박헌영은 의기양양하게 귀국한 후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 북한에 쏟아져 들어오는 소련제 무기와 팔로군 출신 조선인들

    남침의 선봉이 될 인민군 탱크부대. 소련제 T-34 중탱크로 구성된 기갑부대로 소련 군사고문들의 지휘 아래 조직되었다.

     

    모택동은 1949년 여름에 조선인 2개사단을 북한에 보낸 데 이어 1950년 4월에 나머지 1개 사단도 조선에 귀국시켰다.

    3개 사단 약 37,000 명의 조선인 군대는 인민군의 최상층에서부터 소대장에 이르기까지 전력의 핵으로 자리잡는다.

    이들 대부분 서울을 점령하는 부대에 편입돼 20여 년에 걸친 중국 내전의 전쟁 경험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한편, 소련은 김일성 일행이 모스크바를 다녀간 직후인 1950년 4월부터 막대한 양의 무기와 군사장비를 해로와 육로를 통해 북한에 보냈다.

    이 물자는 공짜로 주는 게 아니었다.

    이를테면 김일성의 3월 9일자 무기구입 요청 공문을 보면, 무기의 대금으로 총 1억 3,805만 루불에 해당하는 금 9톤, 모나츠 1만 5,000톤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말년의 스탈린. 한국전쟁을 뒤에서 조종하면서도 일체 무대에 나오지 않았다.

     

    말하자면 전쟁은 북한과 중국이 떠맡는 대신 소련은 뒤에서 무기나 팔아먹겠다는 계산이 엿보인다.

    1950년 6월 12일 슈티코프 대사는 38도선 10~15km 지역으로 인민군이 병력을 이동한다고 보고했다.

    이어 북한군 총참모부가 작성한 침공계획을 모스크바에 알렸다.

    '작전은 6월 25일 이른 새벽에 시작됨. 1단계 작전은 옹진반도에서 국지전 형태로 시작한 뒤 주공격선은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해 감.'

    '2단계 작전은 서울과 한강을 작전함. 동시에 동부전선에서 춘천과 강릉을 해방. 이에 따라 남조선군 주력은 서울 일원에서 포위당해 궤멸됨.'

    '3단계 작전에서는 여타 지역 해방, 적의 잔여세력을 소탕하고 주요 인구밀집 지역과 항구를 점령함.'

    전쟁이 터지자 스탈린은 북한에 파견된 고문단 3,000여 명을 대부분 철수시켰다.

    혹시 포로가 되어 소련의 전쟁 개입을 비난받게 될까 두려워한 것이다.

    전쟁터에서 소련군 고문단의 지휘 아래 공격을 개시했던 한 인민군 장교의 회고를 들어보자.

    "군단지휘부가 38도선을 넘어 지촌리로 들어가자 소련군 고문단 모두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들은 공격이 계획대로 개시되고 예정대로 진행되는 것을 확인한 뒤 더 이상 남하하지 않고 후방으로 돌아갔다"

    ◈ 전쟁이 터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참전한 미군

    한국전쟁의 미국 측 주역인 맥아더 장군(왼쪽)과 트루먼 대통령

     

    인민군이 남침하자 미국과 유엔은 긴박하게 대응하기 시작했다.

    6월 30일에 이르기까지 닷새만에 남한에 대한 원조 제공과 참전 의사를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6월 29일 해질 무렵에는 B-26 경폭격기 18대가 평양비행장을 폭격해 지상과 공중에서 26대의 북한 전투기를 파괴했다.

    같은 날 도쿄에 주둔하고 있던 미 극동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전황 파악차 한국으로 날아갔다.

    맥아더는 자신의 전용기가 수원에 착륙하는 동안 간이활주로 한쪽 끝을 소련제 야크기가 공격하는 것을 목격했다.

    이어 한강 남쪽에서 서울을 바라본 뒤 지상군 투입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본국으로 타전했다.

    다음날 오전 트루먼 대통령은 미군 2개 사단 투입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6.25전쟁이 국제전으로 비화한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모택동이 전쟁이 시작된 직후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으니 인천 후방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김일성에게 조언한 것이다.

    당시 승리에 심취해 있던 북한 수뇌부는 이 충고를 묵살했다.

    회의에 입장하는 김일성(맨 오른쪽)과 박헌영(그 왼쪽). 패전에 몰리자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된다.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그러면 합심해서 돌아다니며 전쟁 승인을 받았던 김일성과 박헌영은 미군이 개입한 후 어떻게 되었나?

    인천상륙작전으로 궤멸 위기에 놓였다가 중공군의 참전으로 한숨을 돌린 1950년 11월 7일 소련대사관에서 10월혁명 기념연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북한 외무성 부상 박길룡은 이렇게 회상했다.

    "김일성은 술이 들어가자 박헌영에게 '여보~ 박헌영이~ 당신이 말한 그 빨치산은 다 어디에 갔는가?'하고 힐난하며 '당신이 스탈린한테 어떻게 보고했는가? 우리가 넘어가면 막 일어난다고 당신이 그런 얘기 안 했나?'하고 시비를 걸었다.

    박헌영은 '아니~ 김일성 동지~ 어찌해서 낙동강으로 군대를 다 보냈는가? 그러니까 후퇴할 때 다 독안에 든 쥐가 되지 않았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김일성은 '야~ 이 자식아~ 만약에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너도 책임이 있다. 난 남조선 정세는 모른다. 남로당이 거기 있고 거기에서 공작하고 보내는 것에 대해 어째서 보고를 그렇게 했는가?" 김일성은 대리석으로 만든 잉크병을 벽에 던져 박살냈다"

    박길룡은 둘의 관계가 "이때 이미 영 틀어졌다"고 진술했다.

    외세를 빌려 같은 민족에게 총질을 하다가 나라와 국민만 절단을 내고 쫒겨다니는 무모한 공산주의자들의 맨 살을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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