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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축하금 주장 日, "청구권 소멸" 발뺌



국방/외교

    독립축하금 주장 日, "청구권 소멸" 발뺌

    • 2005-08-26 10:00

    오늘 한일협정 관련 문서 공개, 민간 차원 청구권 거부의 결정적 조항 둔갑

    지난 10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해방 60주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세계연대의 날' 행사.(한대욱기자/노컷뉴스)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과정에서 대일 피해보상 문제를 놓고 우리측은 청구권이라는 명칭을 관철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주장했으나 일본에서는 경제협력자금이라는 표현을 집요하게 주장했던 사실이 26일 공개된 한일협정 관련 문서에서 다시 한 번 분명히 드러났다.

    그러나 한일협정 체결 이후 강제징용자와 정신대 할머니 등 일제 만행의 피해자들이 피해배상을 요구하는데 대해 일본측은 한일협정에 의해 청구권은 소멸됐다고 주장하고 있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하고 있다.

    피해보상 문제 놓고 일본측 경제협력자금 표현 집요하게 주장

    반일 정책을 취했던 이승만 정권 시절 한국은 일본에 대한 배상을 추진했으나 한국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전승국 지위를 확보하지 못함에 따라 배상이 불가능해졌고 이후 우리 정부는 대일 청구권을 요구해왔다.

    이에 대해 일본은 한반도에 남겨진 일본인의 재산을 근거로 역 청구권을 요구하며 맞섰고 급기야 1953년 10월 일본의 수석대표인 구보다의 망언이 나오면서 50년대 한일협상은 사실상 종료됐다.

    구보다 망언은 한국측의 청구권 요구에 대해 ''''일본측도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일본은 36년간 벌거숭이산을 푸르게 바꾸고 철도를 건설하고 수전(水田)이 늘어난 것 등 많은 이익을 한국에 주었다''''고 말한 것으로 이후 한일관계는 급속히 냉각되고 양국간 협상도 전면 중단됐다.

    1960년대 새로운 정권이 탄생하면서 한일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면서 새로운 협상이 시작됐지만 청구권을 둘러싼 양국간 힘겨루기는 여전했다.

    한국의 청구권 요구에 대해 일본은 청구권을 지불하기 위해 증거나 법적 근거가 확실하지 않으며 일본측의 법령상 제도상 하기 힘들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5.16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경제 재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일본의 자금과 기술을 도입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확신하면서 한일회담에 강한 열의를 보였다.

    여기에 동북아에서 한,미,일을 연결하는 반공전선 구축하려는 미국측의 적극적 요구와 압력이 중대한 역할을 한 것으로 이번 문서공개에서 새롭게 밝혀졌다.

    박정희 정권, 경제 재건 달성 日 자금과 기술 도입 절실 한일회담에 강한 열의

    군사정권은 62년 초까지 11차례에 걸쳐 6차 한일회담을 열었지만 우리측은 8억달러의 청구권을 요구한 반면 일본측은 5000만달러를 제시해 양측간 큰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일본은 62년 재선에 성공한 이케다 수상이 오히라 외상을 등용하면서 청구권 처리에 대한 최종 입장을 정리하게 되는데 그 골자는 청구권은 개인의 청구권에 엄밀히 한정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여기에 무상공여와 유상 경제협력을 추가해 총액에서 한국측 요구에 근접하겠다는 것이다.

    실무진과의 협상에서 도저히 입장 차이를 좁힐 수 없다고 판단한 양국 수뇌부는 정치협상을 통한 일괄타결방식으로 새로운 협상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 때 한국측에서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일본측에서는 오히라 외상이 대표로 나섰다.

    오히라 외상은 일본이 제공할 수 있는 최대치를 3억달러를 제시하면서 명목에 대해서는 일본 국회와 국민 설득을 위해 독립축하금 또는 경제자립을 위한 원조금으로 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회의 의장은 긴급훈령을 보내 청구권 명목을 독립축하금 또는 경제협력으로 하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으며 금액에서도 총액이 6억달러 이상이어야 한다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김종필 부장과 오히라 외상간 두 번째 단독협상에서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차관 1억달러 이상으로 포괄적으로 합의하는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가 나오게 된다.

    그러나 이 메모에서는 일본이 우리측에 제공하는 자금의 명목을 명기하지 않았는데 이는 한일 양국 정부가 대내적으로 이 금액의 명목을 편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한국정부는 청구권 자금 또는 사실상의 배상이라고 국민들에게 설명했고 일본정부는 경제협력자금 또는 독립축하금으로 해석했다.

    김-오히라 메모에 자금 명목 명기하지 않아 편의적 해석 여지 남겨

    1965년 5월14일 일본 외무성에서 진행된 ''청구권 및 경제협력위원회 제6차 회의''에서 일본측 니시야마 대표는 "우리측의 제공은 어디까지나 배상과 같이 의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경제협력이라는 기본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우리측 김봉은 대표는 "(일본이) 전혀 의무가 없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 국내 일반국민의 감정이 청구권을 받아들이는 생각으로 일관돼 있으므로 만일 청구권이라는 표현이 달라지면 중대한 문제가 야기될 것"이라고 맞섰다.

    그러나 최종 협상에서는 일본측의 요구에 따라 ''''일본의 무상,유상자금의 제공의 수반적인 결과로 청구권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규정을 채택함으로써 이후 민간차원의 청구권 거부의 결정적 독소조항이 됐다.

    결국 일본 정부는 한일협상 과정에서 한국에 지불한 자금이 청구권 자금이 아닌 경제협력 자금 또는 독립축하금이라고 주장한 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제기한 보상요구 소송에서는 65년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고 발뺌하는 이율배반적 태도를 보여왔던 것이 이번 문서공개로 분명히 드러난 셈이다.

    CBS정치부 김주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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