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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y뉴스] 왜 안중근 의사를 되돌아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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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칭 문제보다, 안 의사의 의로운 행동 더 부각돼야

    뉴스의 속사정이 궁금하다. 뉴스의 행간을 속시원히 짚어 준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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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서거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안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중국 뤼순(旅順)감옥 내 사형장에서 순국했다. 요즘 안중근 의사를 ''의사''로 명칭하느냐, ''장군''으로 명칭해야 하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명칭은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역사공부도 할겸 안중근 의사가 이토오 히로부미를 사살한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보자.

    ▶ 안중근 의사의 호칭문제가 논란인데 ''''의사''''라고 불린 것은 언제부터인가?

    = 안중근 의사가 ''의사''로 불린 것은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한 직후부터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항일 독립운동하는 분들이 ''의사''라고 호칭했고 일본측 정탐기록에도 ''''저들이(한국인) 안중근을 ''의사''라고 부른다''''라고 나와 있다고 한다. 그 당시 신문에도 ''의사''로 나와 있고 의로운 일을 은밀하게 비밀적으로 감행했다고 해서 ''''의사''''로 호칭했던 것 같다.

    ▶ 우리가 항일운동시기 독립운동을 한 분들을 ''''의사'''' 또는 ''''열사''''로 호칭하는데 어떤 차이가 있는가?

    = 학문적으로는 ''의사''와 ''열사''가 정확하게 개념정립이 돼있지 않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지적이다. 굳이 따져보면, ''의사''는 자기 목숨을 던져 정의로운 행동을 한 분을 말하고 ''열사''는 ''특정한 운동을 하다가 희생을 당한 사람''을 일컫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영어로 말하면 ''martyr''라고 하는데 ''의사'', ''열사''를 모두 ''martyr''로 해석하는 것 같다. 예를들면, 1400년대 전반 백년전쟁에서 영국의 침공으로부터 프랑스를 구한 잔다르크도 ''''마터, 잔다르크''''로 불린다. ''''장군''''이라고 호칭한다면 ''General''이 되는거다.안중근 의사를 ''의사''로 계속 불러야 하는지 아니면, ''장군''으로 불러야 하는지는 안중근 의사에 대한 관심을 더욱 높이는데 긍정적인 영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생각된다.[BestNocut_R]

    ▶ 본질적인 문제는 호칭보다는 안중근 의사가 행한 의로운 행동이 더 부각돼야 하는 것 아닌가?

    = 오늘날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중근 의사가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토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했다는 사실만을 기억하고 있다.이제 이등박문 사살이 100년이나 지나다보니까, ''''이토히로부미''''라는 일본인 개인을 사살한 것처럼 인식이 되고 있는 측면이 있다는 것. 실제로 어느중학교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사살했다고 하니까, 어떤 학생이 ''''의사가 왜 사람을 죽이나요''''라는 웃지못할 질문도 있었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 기억하게 되면서 그 분이 행했던 정의로운 행동에 대한 역사적 의미가 점점 잊혀져가는 느낌이 있다.

    ▶ 당시 이토히로부미는 어느정도급이었고 안중근 의사는 왜 이또히로부미를 저격대상으로 선택했는가?

    = 이토히로부미는 일본을 근대국가로 만든 사람이다. 일본의 근대화에서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일본의 국가기본체제인 헌법을 만들고 의회를 만든 사람이다. 일본 근대국가의 시스템 설정에 결정적 공헌을 한 사람이다. 자기들(일본인)은 그를 동양의 ''''비스마르크''''로 비견한다. 그는 내각총리대신, 수상을 지낸 뒤 1905년에 특명전권대사로 대한제국에 부임했고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한 뒤 설치된 통감부에서 초대 통감으로 임명됐다.1907년에는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등 이른바, 을사오적을 중심으로 친일내각을 구성했고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안중근은 대한제국의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죄,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식민화를 꾀해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등 15가지 조항을 들어 침략원흉으로 규정하고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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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토히로부미를 안중근 의사가 사살함으로써 오히려 일본이 한일강제합병에 나섰다는 주장도 있던데?

    = 그것은 친일파나 일본측의 억지논리라는게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이 주장은 이토가 일본내에서는 온건파로 분류됐기 때문인데 이토가 죽으면서 온건파가 사라지고 강경파인 이토의 정치적 라이벌인 오구마 시게부노 등 강경파들이 득세하게 된데서그런 얘기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 내각은 그가 사살되기 전인 1909년 7월 이미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병합한다는 결정에 대해 일본왕의 재가를 얻은 상황이었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안중근 연구소의 신운용 책임연구원은 "1909년 7월 일본 각의에서 조선침략 결정이 이뤄졌고 안중근 의거와 관계없이 일본이 조선침략을 결정한 상태였다"고 밝혔다.

    일본에서는 이토가 사살되자 당연히 큰 충격을 받았다. 안중근 의사의 이또 저격 이후, 일본은 그들이 갖고 있는 의도가 무언지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내게 됐다. 조선인들이 일본지배에 동의하는구나, 심하게 반발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을 일순간에 날려버린 사건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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