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제주인 2세 이철 씨 휴대전화 뒤에는 '한반도기' 그림이 있다. 고상현 기자▶ 글 싣는 순서 |
①살아남기 위해 일본으로…제주4·3 디아스포라의 비극 ②4·3 피해 목숨 건 일본 밀항…적발되면 공포의 수용소로 ③"죽을락 살락 일만"…고난 속 꿋꿋이 살아낸 4·3밀항인 ④日 차별과 혐오에…더불어 견디며 삶 도운 '제주공동체' ⑤국경 넘어선 4·3밀항인의 '고향 사랑'…제주 발전 토대 ⑥'남북분단 축소판' 재일제주인 사회…이산가족까지 (계속) |
4·3 광풍을 피해 고향 땅을 떠나 일본으로 밀항한 제주인들. 먼 타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삶을 살아냈다. 그 사이 조국은 북위 38도 사이를 두고 경계가 나뉘었다. 남한과 북한, 일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인'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재일제주인은 '생활 속 분단'을 겪고 있다.
"생활 속 분단"…이산가족도
지난 10월 16일 오후 '일본 속 작은 제주' 오사카시 이쿠노구 한 카페에서 만난 재일제주인 2세 이철(74)씨의 휴대전화 뒤에는 '한반도기'가 그려진 그림이 붙여져 있었다. 그동안 남북 정상회담이 열릴 때 사용되거나 2018년 2월 평창동계올림픽 당시 남북 선수단이 함께 든 깃발이다.
4·3 당시 일본으로 밀항한 아버지를 둔 이철씨는 "한반도는 현재 두 나라로 갈라져 있으니깐 항상 물리적인 대립만 있는데, 재일제주인 사회에서는 생활 속 분단이 있어요"라고 했다.
재일제주인 사회, 특히 4·3 희생자 유족 안에서도 북한계인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과 남한계인 '민단(재일본대한민국민단)'으로 갈라져 있다. "남북 관계가 좋으면 함께 체육대회를 여는 등 친목하지만,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 서로 모른 척 한다"고 했다. 남북 관계 '바로미터'인 것이다.
재일제주인 이철 씨. 고상현 기자이씨는 "옛날에 재일제주인 결혼식장에 갔는데 신랑 측 아버지는 민단 간부, 신부 측 아버지는 조총련 간부에요. 두 분이 나와서 축사를 하는데, 서로 '우리 체제가 우월하다' 하면서 싸우는 거예요. 두 남녀가 결혼하는 좋은 날에 남북 분단 현실이 여실히 드러나는 거죠"라고 말했다.
특히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도 재일제주인 가정 안에서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1959년 12월부터 1962년 11월까지 재일동포 북송사업이 이뤄졌다. 당시 7만7288명의 재일교포가 북송됐는데, 4·3으로 밀항 온 제주인도 적지 않았다. 이때 재일제주인 가족 중 일부는 북한에서 살게 됐다.
'재일제주인의 생활사를 기록하는 모임'이 2000년 오사카 이쿠노구에서 인터뷰를 진행한 강경자(1937년생)씨 역시 북송사업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4·3 당시 불타버린 마을을 뒤로하고 가족이 일본으로 밀항 온 뒤로 북송사업으로 큰 오빠 가족과 어머니가 북으로 건너간 것이다.
'북으로 간 오빠한테서 통일이 되면 제주에 돌아가 살고 싶다는 편지가 종종 왔었거든. 어머니도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북으로 가셨지.'(재일제주인의 생활사2-고향의 가족, 북의 가족)
통일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녘땅. 금강산과 해금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류효림 인턴기자'나는 누구인가' 정체성 혼란
지난 10월 15일 오사카 코리아타운 한 카페에서 만난 재일제주인 2세 홍지웅(57)씨는 "사춘기 때 정체성 혼란이 왔다"고 했다. 그의 어머니는 4·3 직후 밀항으로 일본에 와서 결혼하고 홍씨를 낳았다. 차별과 혐오 속에서 일본인인 것처럼 살았다는 그는 사춘기 때 위기가 온 것이다.
"어렸을 때는 조선인이라고 하면 차별받으니깐 일본이름을 사용하고 일본인 학교에 다녔거든요. 그런데도 차별이 없어지지 않아요. 그때 생각을 했죠. 우리가 차별받는 이 상황을 단순하게 보지 말고 그 근본에 있는 문제를 봐야 한다고요. 저는 그게 남북 분단이라고 생각했어요."
"'한국이 민주화하고 남북통일이 되면 큰 나라가 되니깐 근본적인 모순이 해결되고 일본에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다. 우리 주변에 놓인 차별 등 여러 문제도 해결될 거다' 라고요."
홍씨는 이때부터 한국어와 역사를 공부하게 됐다고 한다. 이후 1980년대 군사독재로 한국에서 민주화 투쟁이 이어졌을 때, 일본에서도 대학생 신분으로 투쟁에 나섰다. 그때 함께한 것은 홍씨처럼 '자각'한 재일제주인과 동포들이었다. 일본에서도 여러 차별 철폐 운동으로 이어졌다.
재일제주인 2세 홍지웅 씨. 고상현 기자오광현 재일본 4·3희생자유족회장 역시 대학생 때인 1980년대 한국사회 민주화 운동을 위해 일본에서 투쟁했다. 오 회장은 "남북통일을 위해서는 우선 한국의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었죠.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일본에서 거리 행진도 하고 피켓 시위도 하고 그랬죠"라고 했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재일제주인은 4·3 알리기 운동을 시작했다. 1987년 '4·3을 생각하는 모임'이 만들어지고 매년 일본 오사카와 도쿄 등지에서 추도회, 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4·3과 남북, 경계를 넘어서
'숙명의 위도를 / 나는 / 이 나라에서 넘는 것이다' 4·3 당시 밀항한 후 일본 문학계에서 존경받는 재일제주인 김시종(94) 시인이 1970년 낸 장편시집 '니이가타'에 나온 시 구절이다. '니이가타'는 1959년 북송사업 당시 첫 배가 출항한 곳이다. 남북을 둘로 나눈 38선과 위도가 같다.
한반도에서 넘을 수 없던 38도선을 일본에서 넘는다는 발상이 모티프가 된 작품이다. 분단된 남북한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일본에서 꿋꿋하게 살아나가겠다는 의식이 담겨 있다.
지난 2019년 대마도 4·3 수장학살 희생자 위령제에서 김시종 시인. 고상현 기자
이창익 제주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는 "김 시인은 남북한과 일본에서 핍박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38선과 같은 위도인 니이가타항에서 남북을 자유롭게 오가겠다는 해방감을 표현했다. 어느 편에 서지 않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평화주의적이고 경계인다운 시점"이라고 설명했다.
김시종 시인은 지난 2019년 5월 31일 제주에서 열린 제14회 제주포럼 '4·3과 경계, 재일의 선상에서' 세션에서 계속해서 서로 반목하고 있는 남북 분단 현실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남북 분단의 경계는 말하자면 켜켜이 쌓인 벽들로 고정된 단층의 깊은 균열과 같습니다. 상대방의 존재를 존중하는 양보와 함께 평정심을 가지고 사태를 바라볼 수 있는 유연한 의지력이, 경계를 사이에 두고 분단돼 있는 우리 민족 앞에 긴 세월 동안 변함없는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지난 15일 대종상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상을 받은 재일제주인 양영희 감독의 '수프와 이데올로기'. 4·3을 피해 일본 오사카로 밀항 온 어머니 강정희 씨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녀 역시 남북분단 현실 속에서 세 아들을 북으로 보낸다. 4·3의 비극을 가슴에 묻고 북녘바라기가 된 것이다.
그 상황이 싫어 오사카를 떠났던 양 감독은 일본인 남편과 함께 어머니를 찾는다. 영화에서는 어머니가, 딸이, 사위가 닭백숙을 만들어 먹는 장면이 여러번 나온다. 닭백숙은 그들에게 역사의 수레바퀴 속 오랜 고통의 기억을 희석시키는 '영혼의 수프'다. 경계는 이렇게 허물어질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