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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한파에도 뜨거운 온기…"나누는 밥 한끼의 의미"



사건/사고

    코로나·한파에도 뜨거운 온기…"나누는 밥 한끼의 의미"

    지난달 개소한 무료급식소 '명동밥집' 운영하는 김정환 신부
    성당 내 옛 계성여중·고 터 주3회 배식…일 300~400명 찾아
    지역상권·내부 반대 있었지만…"노숙인도 우리와 같은 인격체"
    SK 후원으로 지역상인 만든 도시락 제공…"먹어본 밥집 중 최고"

    노숙인을 대상으로 한 무료급식소 '명동밥집'을 운영하고 있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본부장, 김정환 신부. 이은지 기자

     

    영화 '1987'이 증언하듯 명동성당은 엄혹한 군부독재 시절 탄압받는 이들의 '피난처'였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지난 1987년 5월 18일 밤 이곳에서 고(故)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조작되었다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6월 항쟁의 불길을 당겼다. 민주화 운동의 성지이자, 소외된 계층을 대변하던 역사적 공간은 30여년의 세월을 거치며 사뭇 다른 풍경으로 변모했다. 이제는 외국인 방문객이 꼭 들르는 관광지이자 점심시간마다 식사를 마친 직장인들이 테이크아웃 커피를 뽑아들고 여유를 즐기는 장소가 됐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본부 본부장인 김정환 신부는 '이게 진짜 교회의 모습일까' 하는 질문이 마음 속에 맴돌았다고 했다. 김 신부는 "물론 그런 모습들도 필요하겠지만, '바로 지근거리에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밥 한끼를 생명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싶었다"고 말했다. 코로나19라는 감염병이 본격적으로 창궐하기 전, 가톨릭사회복지회가 동절기 1주일에 1번씩 간식을 준비해 노숙인들을 찾아다니는 '야간순회'에 동참한 경험도 깊이 각인됐다.

    "가서 보고 느꼈어요. 가장 화려한 명동, 서울 대한민국의 중심지인 여기에서 왜 이렇게 저 많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거리에 나와 있을까...관심을 갖게 됐는데, 코로나19가 터진 이후 그런 분들이 더 많아지신 거죠."

    그가 이끌고 있는 한마음한몸운동본부는 지난 1988년,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한해 앞두고 김수환 추기경에 의해 설립됐다. "4년에 한 번 열리는 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했는데, 당시 김 추기경께서 '형식적인 대회로 끝나면 안 되고 그리스도인들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실천운동을 하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이름이 '운동본부'인 거죠. 어떤 것부터 시작할까 생각해서 헌혈·헌안(獻眼), 장기기증 같은 생명나눔도 하고, 어려운 환자들의 치료비 지원, 쌀을 가져와 나누는 헌미(獻米) 운동도 했었어요." 이같은 본부의 성격에 '사회 사목에 더 역점을 두라'는 염수정 추기경의 지침이 더해지면서 '주변 노숙인들에게 따뜻한 밥 한끼 드리는 밥집'을 만들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선한 의도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개소까지의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해 8월 회의를 통해 11월 15일 밥집 문을 열기로 했지만, 부지 선정 등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시일이 더 밀리게 됐다. 성당 교구 안 공간은 이미 포화상태였고, 급식소만을 위한 신축을 고려하기도 힘들었다. 결국 명동성당 깊숙한 안쪽에 있는 옛 계성여중·고 터가 낙찰됐다. 학교 후문 옆에 자리한 4층짜리 학생식당 건물 일부와 학교 운동장을 활용하게 된 것이다. 김 신부는 "이 공간을 하늘이 내려주신 것 같았다"고 밝혔다.

    지난 5일 자원봉사자들이 '명동밥집'을 찾은 노숙인에게 길을 안내하고 있다. 명동밥집은 일명 '들머리'라 불리는 경사를 지나 마당을 거치면 나오는 옛 계성여중·고 터에서 자리를 잡았다. 이은지 기자

     

    가장 큰 숙제가 풀리자, 이번엔 지역상권의 반발이 이어졌다. 개소 예정 소식이 알려진 후 명동 상인들이 노숙인들의 출입 경로 등을 문의하며 면담을 요청해왔다고 했다. 계성여중·고는 명동성당 입구로 들어오는 길과 명동역 및 상가로 바로 통하는 후문 방면 길, 2가지 루트가 있다. 김 신부는 명동관광특구협의회 측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 방해되지 않도록 노숙인들이 성당 관내를 통해 들어가시도록 하겠다'고 거듭 양해를 구했다. 성당 내부에서도 영내를 길목으로 제공하는 것을 두고 크고 작은 반대가 있었다.

    "외부인들이 오더라도 우리 관내고,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인원 제한이 있지만 평상시엔 1만명 가까이 미사를 드리는 곳이잖아요. 명동에 미사를 드리러 오는 분들이라면 신앙심도 좋으실 거고, (노숙인 역시) 우리와 똑같은 인격체인데...그래도 반대와 우려의 목소리가 있더라고요."

    배식 방식은 코로나 상황을 고려해 야외인 운동장에서 '도시락'을 나눠주기로 했다. 한 주에 3번, 수·금·일요일 오후 3시 정각이면 한끼 나눔이 시작된다. 김하종 신부가 운영하는 성남 '안나의집' 등 무료급식소 몇 군데를 돌아보면서, 하루 배식인원을 200여명 정도로 잡았다고 했다. "원래는 정해진 시간에 딱 한끼만 드리는 게 아니라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 반까지 일반 식당처럼 와서 드실 수 있도록 하자는 생각이었죠. 사회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며 '줄 서기'에 이력이 나신 분들일 텐데..."

    자원봉사자들을 모으며 밑준비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대기업인 SK의 후원 제의도 들어왔다. 사업 취지에 공감해 오는 3월까지 9000만원~1억 가량의 비용을 대겠다는 제안이었다. 이 비용을 통해 소상공인들이 모인 남촌상인회가 밥을 짓게 됐다. 결과적으로 골목 상권에도 이바지하는 '상생'이 이뤄진 셈이다. 5~7개의 식당들이 참여해 메뉴도 다양성을 띠게 됐다.

    지난 5일 자원봉사자들이 '명동밥집'을 찾은 손님들을 대기장소로 안내하고 있다. 이은지 기자

     

    배식은 새해 첫주부터 시작됐고, '정식 오픈'은 지난달 22일 이뤄졌다. 몇 달 전부터 시청에 알리는 한편 직접 거리를 돌며 홍보했지만 수요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았다. 일명 '들머리'라 불리는 경사진 계단을 지나야 하는 등 진입로가 길다는 점도 복병이었다. 하지만 이같은 걱정이 무색하게 첫날부터 100명이 넘는 인원(109명)이 밥집을 찾았다. 그 주 일요일은 150여명, 다음 주는 250명, 또 한 주가 지나선 350명이 몰려들었고, 지난달 말일에는 무려 450여명이 한끼의 정(情)을 맛봤다.

    김 신부는 "일반 가게로 따지면 '대박'이 난 거다. 지역 상권은 다 곳곳에 '임대'라 붙어있고 호텔도 장사가 안 되지 않나"라며 "어떻게 보면 돈 벌 일만 남은 건데, 무료 급식이라서..."라며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당일 소진되지 않은 도시락들은 그날 저녁 6시경 남대문 일대 등을 돌면서 거리에 있는 홈리스들에게 나누곤 한단다.

    하지만 명동에서 멀지 않은 서울역 노숙인 시설 관련 집단감염의 여파는 없을까. 금요일이었던 지난 5일 직접 배식 현장을 찾았다.

    행여나 배식 대열에서 낙오될까 하는 두려움으로 보통 오후 1시 반부터 방문객이 모여든다 했지만, 오후 2시 '사제서품식'이 예정된 이날은 예외였다. 김 신부는 지난 배식 당시 '오늘은 오후 2시가 지나 천천히 오시라'고 신신당부를 남겼다고 했다. 정각에서 10분쯤 흐르고 나자 성당 계단 앞으로 캐리어를 끌고 걸어오는 인원이 한두 명씩 눈에 들어왔다. 미리 주황빛 조끼를 입고 계단 입구부터 대기하고 있던 봉사자들이 환한 얼굴로 '입장하셔도 된다'며 손님을 맞았다.

    안내를 받으며 넓은 성당 마당을 지나 굴곡진 언덕을 내려오자, 운동장 길목에서 봉사자들이 손소독제를 뿌려주며 발열 체크를 도왔다. 김 신부는 "보시면 알겠지만, (배식장소까지) 구조적으로 외곽이 많다. 25~30명 정도 되는 봉사자들이 하는 역할 중 안내가 제일 크다"며 "처음 봉사를 자원하셨을 때는 밥 짓기, 홀 내 배식 등을 생각하셨을 텐데 이 추운 날 밖에서 순찰과 안내를 하시고 있으니 죄송한 마음이다"라고 말했다.

    배식 준비는 신속하게 진행됐다. 400명 분량의 도시락을 싣고 온 트럭이 도착하자, 천막 앞에서 기다리던 신부들과 봉사자들이 민첩하게 테이블 위로 짐을 날랐다. 명동밥집에서 직접 끓여둔 따끈한 소고기무국도 도시락과 함께 비닐봉지에 싸였다. 특별히 이날은 SK에너지 조경목 사장이 임직원과 봉사에 동참하면서, SK 측에서 준비한 마스크도 1인당 10매씩 준비됐다.

    본격적인 배식 전 '명동밥집'에선 '환영합니다', '사랑합니다' 같은 환대의 인사를 나눈다. 이은지 기자

     

    운동장에 선 노숙인들은 거리두기를 한 채 길게 줄지어 도열했다. 들고 온 간이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이도 눈에 띄었다. 육안으로 200명 가까이 모였을까 싶었을 즈음 오후 3시 정각이 되자 김 신부가 마이크를 잡고 방송을 시작했다.

    "오늘 눈이 쌓였지만 날씨가 푸근하죠? 날씨 탓도 있고 서울역 코로나 확진 영향이 있나 해서 많이 걱정했는데 잘 오셨습니다. 오늘 새로운 신부님들이 탄생하는 예식을 하고 있어서 기가 충천한데, 2시 이후 와주시라 말씀드린 것 너무 잘 지켜주셨습니다. 박수! 명동밥집 VIP들은 확실히 다르세요. 날 추울 때는 오후 2시 반쯤 오셔도 바로 서셨다가 20~30분 내 배식 받으시면 돼요. 저흰 늦게 왔다고 안 드리는 것도 아니고, 오래 걸리지도 않기 때문에..."

    '안녕하십니까', '환영합니다', '명동밥집입니다', '사랑합니다'. 학창시절 조회를 연상시키는 환대의 인사가 마무리되자 배식이 이어졌다. 운동장을 메웠던 인원은 썰물처럼 배식장을 빠져나갔다. 간혹 다리를 절거나 몸이 불편해 보이는 이들이 운동장 입구로 내려올 참이면 봉사자들이 도시락과 마스크를 들고 달려가기도 했다. 350여명에게 배식을 마친 밥집은 한 시간 반 정도 지난 오후 4시 반쯤에야 천막을 내렸다.

    지난 5일 명동밥집에서 도시락과 마스크를 받아가고 있는 노숙인들의 모습. 천막 뒤 옛 학생식당 지하는 코로나19 상황이 안정되면 이들이 식사하는 공간이 될 예정이다. 이은지 기자

     

    몰랐다가 처음 찾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 다녀간 이후 발길을 끊은 이는 없었다. 노숙인이 아닌 독거노인들과 소외계층도 온기를 찾아 모여들었다. 도봉구 창동의 쪽방에 거주한다는 김모(78·남)씨는 "이번에 온 게 네 번째다. 친구가 가자고 해서 처음에 오게 됐다"며 "저는 혼자 사는 독거노인이라 다른 곳에선 옷을 제대로 입고 가면 '가라'고 쫓아낸다. 여기는 아무 소리 안하고 (밥을) 주니까..."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까지 배식 받은 밥집 중 제일 맛있고 잘 챙겨준다. 24시간 마트나 사먹는 밥 이상의 값을 한다"며 "집에 가봐야 텔레비전밖에 안 틀고 말할 사람도 없어 굉장히 적적한데, 여기 오면 친구와도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반찬도 좋고, 굉장히 성의가 있어서 잘 데워 먹고 있다"고 고마워했다.

    쌍문동의 고시원에서 지내고 있는 70대 여성 이모씨는 "아는 사람 소개로 오늘 처음 와봤다"며 "성당에서 이런 걸 베풀어주니 너무 고맙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전동 휠체어를 타고 막바지에 도시락을 받아든 50대 남성 이모씨 또한 "이번이 7번째"라며 "종로3가 등 다른 무료급식을 몇 번 먹어봤는데, 그곳은 주먹밥만 줘서 여기가 훨씬 낫더라. 하나 가져가면, 밥도 많고 메뉴도 여러 가지라 이틀을 두고 먹는다"고 만족감을 표했다.

    지난 5일 명동밥집에서 배식한 도시락 중 하나. 제육볶음과 김치, 콩나물무침 등 다양한 밑반찬과 푸짐한 양의 밥이 담겼다. 이은지 기자

     

    실제로 기자가 열어본 이날 도시락에는 제육볶음과 김치, 콩나물무침 등 서너 가지의 밑반찬에 밥도 세로로 길게 꽉꽉 눌러 담겨 있었다.

    물론 보람을 느끼는 순간만 있는 것은 아니다. 김 신부는 "오시는 분들 중 심한 주취자도, 약간의 (알코올)중독자도 있다. 간혹 큰 소란을 피우시는 분도 계시다"라며 "특히 지난주 일요일에는 술 취한 분이 오셔서 봉사자들과 주변 분들에게 난동을 부리시는 가슴 아픈 일도 있었다. 한평생 살아가며 먹을 욕은 한 달 동안 다 먹은 것 같다"고 말했다.

    다만 "그래도 밉지는 않다. 자기 통제가 안돼 그러시는 거니 그분들은 감정이 없다"며 "없으신 게 많으시다 보니 손이 다 부르터 있어 장갑을 갖다드리면 수십 명이 몰리기도 한다. 지혜롭게 맞춰드리는 노하우도 필요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김 신부는 "시작한다면 죽을 때까지 하겠다는 마음으로 한 거지만, 많이 힘들다"면서도 "이 소임을 끝까지 허락하실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고 소신을 밝혔다. 명동밥집의 진심을 느낀 이들 중에는 장문의 자필편지를 건넨 노령의 여성 노숙인도, 가톨릭 신자가 아니지만 수천만원의 금액을 기부한 개신교인 시민도 있다.

    "노숙인 분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좀 변했으면 좋겠어요. 사실 생명도 받았고, 우리 역시 순간순간 받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하는 존재인데 마치 나누는 걸 뭔가를 하사하듯, 생색내듯 하면 우리 정체성에 맞지 않은 것 같아요. 특히 가톨릭 신자로서 성체성사의 정신을 생각하면 예수님이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셨듯 우리도 그 나눔으로 초대받은 사람들이잖아요.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작은 하나의 시작이고 표징이지만, 여기에 많은 진리가 담겨있는 것 같아요."

    김 신부는 "방역도 중요하지만, 노숙인 분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식사다. 면역체계가 떨어지면 안 되기 때문"이라며 "저희 밥집이든 어디든 가서 식사를 하시려면 이분들이 이동하고 모여야 하니, 선별진료 등에서도 우선적인 배려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배식을 마치고 내려온 성당 입구에서 '설 연휴에도 밥을 주느냐'고 묻는 노숙인들에게 "약속이니까 당연히 드린다. 떡국 떡도 드리니 꼭 오시라"고 당부했다.
    명동성당 가톨릭 회관 전경. 이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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