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묵적지수' (사진=서울문화재단 제공)
전쟁이라는 서사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공연 '묵적지수'가 관객을 찾는다.
제8회 벽산희곡상 수상작인 연극 '묵적지수'는 수많은 전쟁이 난무했던 중국 춘추전국시대를 배경으로 진짜 전쟁을 막기 위한 가짜 전쟁을 다룬 작품이다.
초나라 혜왕 50년(기원전 439년) 당시 사상가 묵자(묵적)은 송나라를 침략하려는 초나라를 막기 위해 혜왕과 모의 전쟁을 벌인다. 규칙은 단 하나, 실제 전쟁과 같되 한 사람도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초혜왕이 사랑하던 궁녀 장질 또한 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고, 모의전은 예상치 못한 결말을 맞게 된다.
이러한 고사를 바탕으로 재현된 '묵적지수'는 고대 중국의 모습을 재현하지 않는다. 2019년 현대의 소품과 의상을 바탕으로 과거의 전쟁에 현재의 상황을 투영한다.
무대 또한 간결하게 꾸며졌다. 원형의 무대와 객석을 거침없이 뛰어다니는 배우들은 전쟁이라는 싸움의 자국을 관객들에게도 느끼게 한다.
극을 연출한 이래은 연출은 25일 서울 중구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에서 열린 프레스콜에서 "전쟁은 항상 유희적인 성격이나 재미로 소비되곤 했다고 생각한다"며 "'묵적지수'에는 전쟁을 직접 치러냈던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있고, 그 모습이 보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기 위해선 직접 싸우는 배우들의 몸이 보여져야 하고, 몸의 운동성과 공간의 자국이 남으려면 배우들이 열심히 뛰고 걸어야 했다"며 "배우들이 실을 들고 뛰어 다닐 때 치열한 싸움의 자국이 남을 거라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묵적지수 공연 (사진=서울문화재단 제공)
'묵적지수'는 무대 위를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배우들의 모습 외에도 작은 손짓 등을 통한 몸의 움직임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 연출은 "이 공연은 대사가 들려야 하는 극이다. 연극이 영상 같은 매체와 다른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고, 그것이 몸짓과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배우들과 몸을 확장해서 쓰는 방식을 찾고 연구했다"고 밝혔다.
연극은 성별과 상관없이 배역을 정하는 젠더 프리 캐스팅으로 이뤄져 있다. 또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별을 두지 않고 동일한 경험을 선사하게끔 무대 장치 반입구를 객석 출입구로 사용한다.
이 연출은 "극을 준비하며 작년 연극계 '미투'가 떠올랐다. 위계에 의한 성폭력과 싸우는 여자 배우들이 떠올랐고, 그런 배우들이 지금까지의 아름답고 협소한 여성들의 역할에서 벗어나 다양한 역할을 하는 것이 미투 이후 연출가로, 창작자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며 젠더 프리 캐스팅 배경을 밝혔다.
실제로 극 중 설정된 배역은 남성과 여성의 차별 없이 이뤄진다. '왕은 반드시 남자일 것'이라는 고정된 이분법적 성별 규범에서 벗어나 젠더 스펙트럼에 대한 확장을 시도했다.
또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의 스태프를 구성하며 '연령의 위계에 따른 폭력'을 차단하고 수평적인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이 연출은 "묵가는 나이와 성별, 계급을 구분하지 않고 사람은 모두 평등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이념을 갖고 모인 집단"이라면서 "지금 2019년 묵가의 사람들이 누가 있을까 생각해 봤는데, 연극하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연극계는 나이와 성별에 의한 차별 대우가 심한 곳이라 묵가의 사상과 싸움 얘기 다루는 데 있어 작업도 그 방향을 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굉장히 책임감 있는 역할을 20대가 하고 서포트를 좀 더 나이 많은 사람들이 구성하는 종전과는 다른 방식을 사용했다"며 "효율성을 높이지는 못했지만, 작업 하는 방식에 대한 방법을 바꿔봤다"고 설명했다.
'묵적지수'는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고, 가해자 또한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또 우리 사회가 능력으로 간주하고 있는 '힘'이라는 것의 정체를 의심하고 인간 사회의 모순을 짚는다.
이 연출은 "싸울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야망에 의해 서로 칼을 겨누게 되는 상황이 전쟁의 가장 큰 비극이라고 생각한다"면서 "그래서 병사들과 궁녀의 캐스팅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특히 병사들이 작은 역으로 소비되지 않고 주요 역을 맡은 사람들이 병사가 됨으로써 언제든 가해자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한편, 이날 열린 프레스콜 중 한 배우가 부상을 당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공연 중 다리를 다쳐 엠뷸런스를 타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따라서 26일부터 관객을 찾기로 했던 '묵적지수'의 개막은 잠정 연기됐다.
남산예술센터 측은 "26일부터 오는 30일까지 5회차 공연이 출연 배우의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취소됐다"면서 "배우의 빠른 회복과 공연의 조속한 재개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