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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생존자' 넘어 '인권 지킴이'…김복동 할머니의 일기



사회 일반

    '피해 생존자' 넘어 '인권 지킴이'…김복동 할머니의 일기

    폭로의 용기와 투쟁의 의지, 약자에 대한 사랑이 있었던 93년의 삶
    일본의 진심 어린 사죄와 통일을 맞은 평양을 마주하는 꿈은 끝내

    위안부 피해 생존자이자 인권 운동가인 김복동 할머니가 28일 별세했다. 위안소에 끌려간 지 79년, 피해 신고 27년에도 다 풀지 못한 한을 안고 눈을 감았다. 용기와 의지, 사랑이 있었던 김 할머니의 발언들을 모았다.[편집자주]

    14일 오후 영등포구 이룸센터에서 열린 '73년간의 기다림, 마침내 해방! 세계 무력분쟁 성폭력 생존자들의 목소리' 국제 심포지엄 및 제1회 김복동 평화상 시상식에서 김복동 할머니가 피해 증언을 하고 있다. (사진=윤창원기자)

     



    [한국에서 온 피해자. 이름은 김복동.] (2015년 7월 미국 워싱턴)

    정의기억연대 윤미향 대표는 최근 CBS노컷뉴스와 인터뷰에서 김 할머니를 '세계무력분쟁지역 성폭력 생존자들의 영웅'이라 부르고 싶다고 했다.

    "피해 당사자를 넘어 인권운동가로, 평화운동가로 살다 가신 분"이라고 윤 대표는 평했다.

    할머니의 삶은 폭로의 용기, 끝내 사죄를 받아내겠다는 의지, 그리고 또 다른 약자를 향한 사랑으로 채워져 있었다.

    김 할머니는 1992년 1월 '짐승처럼 학대당한 7년을 없었던 일로 할 수 없어'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용기 어린 폭로를 감행했다. '정신대 신고전화'가 개통된 지 넉 달 만이었다.

    [이리 내가 겪은 걸로 가지고 실토를 해가지고 증언을 해야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 그런 마음이 나대. 그러니까 나이가 먹어도 과거에 당한 걸 잊어지지가 않아. 잊어버리지를 않아. 그게 머리에 생하게 박혀있다고. 그래서 증인을 한 거야. 꼭 이거는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싶으니까.] (2002년 12월, 여성가족부 자료)

    어렵게 터져나온 폭로는 끈질긴 의지로 이어졌다. 그해 8월 서울에서 열린 제1차 아시아연대회의, 이듬해 오스트리아 빈 세계인권대회 등에 나선 김 할머니는 스스로를 증거삼아 일본의 역사적 만행을 국내외에 알렸다.

    2013년에도 미국과 일본을 방문해 진정성 있는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다.

    [죽을래야 억울해서 죽지 못해요. 죽기 전에 사죄하는 것을 보고.]
    [아베는 법적으로 사죄와 배상을 하고. 모든 것을 개인이, 민간인이 돈벌이를 갔다 하는 바람에 (훼손된) 우리의 명예를 회복시켜달라.] (2015년 7월 미국 워싱턴)


    특히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엔 누구보다 앞장서 반대 목소리를 냈다. 김 할머니는 암 투병 중이던 지난해 9월 휠체어에 몸을 싣고 외교부 앞에 나와 1인 시위를 펼쳤다.

    [방에 드러누워서 있다가 속이 상해 죽겠는 거라. 아무 말이라도 하나 해야겠다 싶어서 나왔습니다. … 서로 화해하기로 하고 위로도 못 받았다. 그러고 위로금을 받고 소녀상 철거하기로 했다. 우리가 위로금 받으려고 여태까지 싸웠나. 위로금이라 하는 건 1000억 줘도 우리는 받을 수가 없다.] (2018년 9월 외교부 앞)

    국내외를 가리지 않는 김 할머니의 왕성한 활동엔 아낌없는 기부도 있었다. 피해 생존자 길원옥 할머니와 함께 만든 '나비기금'이 대표적이다.

    2012년엔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전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이 기금에 김 할머니는 몸소 5천만원을 냈다.

    [내 힘닿는 데까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우리 같은, 당한 여성들에게 보답이 되도록 힘껏. 고맙습니다.] (2012년 3월 정의기억연대)

    기부의 손길은 가깝지만 먼 일본의 동포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2015년 일본 오사카 이쿠노 조선초등학교 손주들에게 100만원어치 양말을, 지난해 9월엔 조호쿠 조선초급학교에 직접 방문해 태풍 피해 복구지원금 3천만원을 전해주기도 했다.

    병상에 누워서도 전시 성폭력 여성들을, 해외에 있는 동포들을 걱정하던 김 할머니는 지난 2일 한 공익재단으로부터 받은 상금 3천만원도 이들을 위해 기부했다.

    [상금은 조선학교를 위해서 써달라고.] (2019년 1월 병상에서)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알았으면 신고도 안 했겠다"고도 말했던 김 할머니.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좋아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던 부산 다대포를 그리워했던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꼭 가고픈 또 하나의 장소로 평양을 꼽았다고 한다.

    일본의 진심 어린 사죄와 통일을 맞은 평양을 마주하는 꿈을 할머니는 끝내 이루지 못한 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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