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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 '원녀' '광부' 뜻밖의 유행…역사학자에게 묻다



문화 일반

    옛말 '원녀' '광부' 뜻밖의 유행…역사학자에게 묻다

    사극 '백일의 낭군님' 화제로 청년세대 중심 회자
    실제 조선왕조실록에도 가뭄 등과 혼인 문제 결부
    오종록 교수 "자연현상과 국가통치 밀접하게 연결"
    "사람의 억울함 하늘에까지 닿아 조화 깨진다 여겨"

    사극 '백일의 낭군님' 스틸컷(사진=tvN 제공)

     

    청년 세대를 중심으로 '원녀'(怨女), '광부'(曠夫)라는 옛말이 유행어처럼 회자되고 있다. tvN에서 방영 중인 사극 '백일의 낭군님'이 화제에 오르면서 벌어진 뜻밖의 현상이다.

    나이가 차도 혼인하지 못한 여자와 남자를 일컫는 원녀·광부 개념이 이 드라마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살펴보자.

    '백일의 낭군님' 첫 회에서 극중 세자 율(도경수)이 대신들을 앞에 두고 말한다.

    "음양의 조화라…. 근데 그게 나 하나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고 될 일일까. 전국 팔도에 스물이 넘어 시집 장가를 가지 않은 원녀 광부가 널렸는데, 그 수천명이 음양의 조화를 이루면 천하의 기운이 모아져 비가 내릴 확률이 더욱 높아지지 않겠소."

    이는 앞서 "수개월째 비가 내리지 않는다. 농사를 앞둔 백성들의 근심을 모르지는 않을 터. 그런데도 세자인 네가 빈과의 합방을 번번이 거부해 음양의 조화를 이루지 않으니 어찌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겠느냐"는 임금의 호통과 "국본이신 저하께서 음양의 조화를 거부하시면 아무리 기우제를 올려봐야 소용이 없게 되옵니다"라는 대신의 간언 등에 대한 반응이다.

    급기야 세자 율은 팔도의 원녀·광부를 모두 혼인시키라는 명을 내리는데, 이후 본인 역시 우여곡절 끝에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드라마는 이 과정에서 기층민을 쥐어짜는 당대 권력층의 부조리를 곳곳에서 들춰내기도 한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자연재해 등 현안을 논하면서 음양의 조화와 원녀·광부의 혼인을 결부시키는 기사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 예로 성종실록 79권의 성종 8년 기사 일부를 소개한다.

    '사람은 천지(天地)의 마음이 된다. 마음이 화(和)하면 기운이 화하고 기운이 화하면 형상이 화하고 형상이 화하면 천지의 화기가 응하는 것이다. (중략) 지금 한발(旱魃·가뭄으로 땅이 바싹 마른 상태)의 재앙이 봄부터 여름에 이르러 나의 곡식 농사를 상하니, 알지 못하거니와, 기수(氣數·길흉화복의 운수)가 마침 그러한 것인가, 인사(人事·사람들 사이 예의를 지키기 위한 행동)가 부른 것인가? 하늘의 꾸지람이 어찌 까닭 없이 그러하겠는가? (중략) 남녀도 또한 그렇다. 아내 없는 남자(광부)와 남편 없는 여자(원녀)가 근심이 답답하게 쌓이면 괴려(乖戾·이치에 어그러져 온당하지 않다)한 기운을 부르게 된다.'

    ◇ "모든 생명체가 본성대로 성장하고 번성할 수 있도록…당대 기본 덕목"

    성신여대 사학과 오종록 교수(사진=자료사진/노컷뉴스)

     

    과학적 사고에 익숙한 현대인들 입장에서는 다소 납득하기 힘든, 자연재해와 원녀·광부의 혼인 문제를 연결시키는 조선시대 사상 체계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조선의 역사·문화 연구에 천착해 온 성신여대 사학과 오종록 교수는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표현보다는 음양의 조화가 '깨졌다'라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유교 등에 투영된 중국인들의 사고 방식에서는 자연 현상과 국가 통치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유교의 '천인합일설'(天人合一說)을 보면 '천'은 하늘로 대표되는 자연이다. 자연 현상이 사람들과 관계 맺는다는 의미다. 이에 따라 유교에서는 모든 생명체가 본성대로 성장하고 번성하도록 하는 데 하늘의 기본 덕목이 있다고 봤다."

    오 교수는 "하늘은 이러한 천명을 담당할 만한 사람을 선정하는데, 중국 천자뿐 아니라 '용비어천가'에 나오듯이 조선 국왕도 새롭게 천명을 받은 존재로 설정돼 있다"고 부연했다.

    "경국대전(조선 왕조의 근본을 이루는 법전)에는 의정부(조선 최고 행정기관)가 해야 할 일 가운데 '음양을 조화시켜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 음양의 조화가 왜 깨지느냐를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생기면 그들의 억울함이 하늘에까지 닿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자연의 조화가 깨져 큰 가뭄이나 지진이 생길 수도 있고, 때아닌 천둥·번개가 나타날 수도 있다고 해석했다."

    조선 사회는 혼인을 얼마나 중시했기에 짝을 얻지 못한 이들의 원한이 하늘에 닿아 자연재해마저 일으킨다고 여겼을까.

    오 교수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기본적으로 16세를 혼인 가능 나이로, 20세 안팎을 혼인 적령기로 봤다.

    "조선을 비롯한 전근대 사회의 전반적인 평균수명은 30대 말에서 40대 초였다. 여기에서 영아 사망률 등을 제외한 기대수명은 40대 중반으로 조금 높았는데, 보통 서른을 넘기면 앞으로 살 날을 십오륙년 정도로 생각했다. 이에 따라 혼인 하한선을 30세로 봤는데, 혼인을 하더라도 후손을 보지 못할 수 있는 나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는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혼인을 시킨다고 할 때 기본적으로 사족(士族·문벌이 좋은 선비 집안)의 자식들을 대상으로 했다"며 "이들은 유교 사상에 입각해 태어날 때부터 '후손을 번성시켜야 한다'는 강력한 인식을 지녔다"고 전했다.

    ◇ "조선시대 명문가 자손마저 혼인 못했던 이유 역시 가난"

    사극 '백일의 낭군님' 스틸컷(사진=tvN 제공)

     

    앞서 소개한 성종실록 기사의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이러한 당대 인식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평민은 할 수 없지마는, 사족의 딸이 혹 가난하여 그럭저럭 시기를 넘긴 자가 있거나, 혹 부모가 죽은 뒤에 형제에게 의탁하여 전민(田民)을 겸병(兼幷)하기를 꾀하기 때문에 혼가를 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이것이 족히 천지의 화기를 상하고 수한(水旱·장마와 가뭄)의 재앙을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오 교수는 "조선이라는 국가 전체의 가부장적인 존재가 임금이었듯이, 각 지역에서 가부장적인 존재는 사족 양반들이었다"며 "국가에서 가난한 사족의 혼인을 지원한 것처럼, 일반 백성들의 혼인에 대한 책임은 각 지역 사족 양반들에게로 넘어갔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국 태곳적 순임금과 그 아버지의 설화를 통해 조선시대 혼인에 대한 인식이 유교 핵심 덕목인 '효'(孝)와 긴밀하게 연결된 지점을 짚었다.

    "성인으로 간주되는 순임금과 달리 그 아버지 고수는 심성이 좋지 않은 악인으로 평가된다. 한 번은 아버지 고수가 굵은 몽둥이로 순임금을 마구 때린 일이 있는데, 이때는 당연히 도망쳐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상신에 대한 가장 큰 죄는 후손이 끊기는 것인데, 살인 역시 그에 못지않은 큰 죄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아들을 죽여 후손이 끊기도록 하는 일은 그 아버지가 조상신에게 아주 심각한 죄를 저지르도록 하는 것이기에 그럴 때는 도망치는 것이 '효'라는 이야기다."

    오 교수는 "이 이야기에 자리잡은 유교의 근본 관념은 후손을 번성시키는 일이 조상에 대한 효를 다한다는 것"이라며 말을 이었다.

    "임금은 모든 백성의 어버이로서 효라는 도리를 진작시켜야 하는데, 이를 어기는 일은 큰 잘못으로 여겨졌다. 소위 사족은 훌륭한 조상신의 자손이다. 그들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혼인을 못해 후손을 번성시키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불효 수준을 넘어 조상에게 엄청나게 큰 죄를 저지르는 셈이었기에 국가 차원의 문제로 받아들인 것이다."

    세습으로 계급 특권을 유지했던 조선 사회 혼인 인식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현재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사회 모순을 반추하도록 돕는 메시지는 없을까.

    오 교수는 "조선시대에 사족마저 혼인을 못하는 이유는 결국 가난 때문이었다. 그 집단 안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을 만한 규모로 혼례를 치르는 데 드는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며 "상대적으로 성대한 혼례를 치르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더더욱 억울한 마음을 갖게 되고, 그것이 하늘에 작용한다고 본 셈"이라고 진단했다.

    '경제성장 동력이 줄어들기 때문에 출산율을 높여야 한다'는 인식에 바탕을 둔 일각의 주장에 오 교수가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회·경제적인 문제 탓에 아이를 낳더라도 키우기 힘들다'는 인식을 바꿀 수 있는 실천이 전제될 때만이 출산율도 높아질 것이다. 인위적으로, 경제 성장 동력이 줄어드니 후손을 많이 나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근본 문제는 세습과 관련한 어마어마한 사회적 비용이 든다는 데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지금 한국 사회의 세습 열망이 조선 사회만큼은 아니더라도, 특권이 여전히 존재하기에 그것을 후대에 물려주려 애쓰는 것은 아닐까. 유치원에서부터 영어를 가르치는 식으로, 이른바 세습에 도움이 된다는 교육에 엄청난 힘과 재력을 소모하고 있다. 이러한 부분이 민주주의 사회에 걸맞게끔 정리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쉽지 않더라도 우리가 문제의식을 갖고 인식을 바꿔 나간다면, 사회·경제적 어려움 탓에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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