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배너 닫기

전체메뉴보기

삼례에서 일으킨 신앙, 만주 거쳐 다시 삼례로

뉴스듣기

페이스북공유하기 트위터공유하기 밴드공유하기



전북

    삼례에서 일으킨 신앙, 만주 거쳐 다시 삼례로

    뉴스듣기

    [김춘배 집안의 독립운동과 신앙 ②] 삼례교회와 영신학교의 설립 근간

    서슬 퍼렇던 일제강점기 전북 삼례와 만주, 북녘 함경도를 무대로 목숨을 건 독립운동과 신앙의 역사를 이어갔던 집안이 있다. 우리에게는 익숙지 않은 이름, 독립운동가 김춘배와 그 집안의 이야기다. 김춘배는 길지 않은 40여 년 생의 절반 가까이 감옥에서 지내며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누구보다 더 불꽃 같은 독립투쟁의 삶을 살았지만 그의 고향인 전북에서도, 주 활동무대인 함경도에서도 그의 삶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김춘배 집안의 신앙의 역사 역시 국경을 넘나들고 세대를 아우르며 삼례지역 신앙의 한 근간을 제공했지만 이 역시 수면 아래 있기는 마찬가지다. CBS 노컷뉴스는 김춘배의 독립운동과 그 집안의 신앙역사를 3차례에 걸쳐 다룬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멈추지 않은 독립투쟁의 삶, 불꽃처럼 살다간 김춘배
    ② 삼례에서 일으킨 신앙, 만주 거쳐 다시 삼례로
    (계속)


    중국으로 이주하기 전인 1915년 전주군 삼례면에 살던 김헌식 일가의 가족사진. (사진=김경근 목사 제공)
    1900년대 전주군 삼례면의 최초의 교회는 삼례교회였다. 1903년 맥커친(McCuchen.馬路德)선교사가 전도를 해 삼례에 신앙의 기초를 다졌다. 당시 전주군 창덕면(현 삼례면) 상후리의 4칸짜리 초가를 얻어 교회의 문을 연 게 그해 3월이었다. 그 당시 교인은 장년 기준으로 17명이었다.

    이때 신앙을 가지고 교회를 일구기 시작한 주요 인물이 김헌식이었다. 김헌식은 슬하에 5남 1녀와 손자 22명을 두고 있는 삼례지역의 부호였다. 김헌식의 둘째 아들이 김창언이고, 김창언의 둘째 아들이 김춘배다.


    삼례교회는 날로 교세를 넓히기 시작해 1907년 봄에 모인 교인은 100여 명을 넘겼다.

    김헌식의 사랑채는 삼례교회의 전도관으로 이용됐다. 김헌식과 자녀들은 삼례교회의 근간이 됐고, 피치못할 이유로 인한 쇠락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김헌식의 손자는 돌고 돌아 삼례교회 목회자로 청빙 되는 등 김헌식 일가와 삼례교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연을 맺고 있다.

    ◇ 삼례에 뿌리 내린 교회와 학교

    삼례교회는 교인들의 헌신과 꾸준한 헌금으로 세를 늘리고 건물을 키워갔다. 4칸짜리 좁은 예배당은 7칸으로 증축됐다. 당시 삼례에서는 가장 큰 건물이었다.

    1907년 가을 삼례교회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민간학교인 영흥학교를 열었다. 교감은 김헌식의 첫째아들인 김계홍, 재무는 둘째인 김창언이었다. 영흥학교는 1909년 8월 31일 영신학교로 인가를 받아 교명을 바꿨다. 당시 학생은 20여 명에 이르렀다.

    이후 김계홍은 삼례교회의 초대 장로로 장립되고 영신학교 교사 신축의 부지를 제공하는 등 김헌식의 일가는 삼례교회와 영신학교의 한 근간이 됐다.

    그러나 교회를 키워 온 김헌식 일가는 교회의 쇠락과도 맥을 같이했다.

    일제강점 이후인 1918년 2월 24일 김헌식과 김계홍 장로 등 5형제와 식솔 등 30여 명 등 전 가족 50여 명이 중국 길림성 연길현으로 집단 이주하면서 삼례교회 교인은 29명만 남게 됐다.

    독립운동가 김춘배의 손자인 김경근 목사(전주 채움교회)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횡포가 심각했기 때문에 이를 피해 자유롭게 살기 위해 이주를 결심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며 “중국으로 이주한 뒤에도 교회를 열고 신앙생활을 이어갔다”고 말했다.

    김경근 목사의 부친인 김종수 씨는 생전에 남긴 간증록에서 “한일합방하고 왜놈들이 와서 갖은 행패를 부리니 보기 싫다고 많은 토지를 처분해 머슴들에게 나눠주고 온 친척이 이국만리로 이주해 자유스럽게 예수 믿으면서 살기로 했다”고 증언했다.

    ◇ 해방 이후 다시 맺은 신앙의 역사

    신앙의 자유를 찾아간 만주에서도 김헌식 집안의 신앙은 계속됐다. 김계홍은 중국 간도성 용정시 노두강 교회에서 장로로 임직했고 김창언은 안수집사로 시무했다.

    김창언의 큰아들인 김성배는 둘째인 김춘배에 앞서 독립군에서 활동하다 다리를 관통하는 총상을 입었다. 이후 신학을 전공하기 위해 평양으로 떠났다.

    두 형제가 다시 만난 것은 1936년 김춘배가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다 일제에 붙잡혀 8년을 복역하고 나온 1934년이다.

    김성배는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읍 교회의 목사로 시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출소한 김춘배와 가족이 형인 김성배에게 의탁하러 왔다. 이후 김춘배는 신창 경찰주재소 무기고를 습격하며 함경남도 일대를 떠들썩하게 했다.

    김헌식 일가가 만주로 이주한 뒤 삼례교회는 역사를 이어갔지만 일제에 간섭에 의해 홍역을 치렀다. 교회는 영신학교의 신사 참배 문제로 골머리를 앓다가 학교의 권리를 모두 넘기고, 교회의 종을 빼앗기기도 했다. 이후 삼례교회는 삼례제일교회로 이름을 바꿨다.

    김헌식 일가와 삼례교회가 다시 연을 맺은 건 해방 뒤였다.

    1948년 10월 9일 김헌식의 손자인 김성배가 삼례교회의 목사로 취임했다. 김성배는 중국 장춘과 북한 정주 곽산에서 일하다 서울에 와 있었고 이를 알게 된 교인들이 청빙을 한 것이다.

    김성배는 가족과 함께 삼례로 돌아왔고, 이 귀환은 김헌식 일가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만주로 떠난 지 31년 만의 일이었다.

    영신학교 역시 삼례교회가 다시 경영하기로 했다. 영신학교는 1967년 공립 영신국민학교가 됐고 1969년 지금의 삼례중앙초등학교(삼례중앙초등학교)가 됐다.

    추천기사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이 시각 주요뉴스

    김현정의 뉴스쇼

    정관용의 시사자키

    에디터가 추천하는 꼭 알아야할 뉴스


    많이본 뉴스

    투데이 핫포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