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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않은 독립투쟁의 삶, 불꽃처럼 살다간 김춘배



전북

    멈추지 않은 독립투쟁의 삶, 불꽃처럼 살다간 김춘배

    [김춘배 집안의 독립운동과 신앙 ①] 함경남도를 뒤흔든 무기고 습격 사건

    서슬 퍼렇던 일제강점기 전북 삼례와 만주, 북녘 함경도를 무대로 목숨을 건 독립운동과 신앙의 역사를 이어갔던 집안이 있다. 우리에게는 익숙지 않은 이름, 독립운동가 김춘배와 그 집안의 이야기다. 김춘배는 길지 않은 40여 년 생의 절반 가까이 감옥에서 지내며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누구보다 더 불꽃 같은 독립투쟁의 삶을 살았지만 그의 고향인 전북에서도, 주 활동무대인 함경도에서도 그의 삶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김춘배 집안의 신앙의 역사 역시 국경을 넘나들고 세대를 아우르며 삼례지역 신앙의 한 근간을 제공했지만 이 역시 수면 아래 있기는 마찬가지다. CBS 노컷뉴스는 김춘배의 독립운동과 그 집안의 신앙역사를 3차례에 걸쳐 다룬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멈추지 않은 독립투쟁의 삶, 불꽃처럼 살다간 김춘배


    1934년 10월 독립운동가 김춘배가 일제에 붙잡혔을 당시 국내 주요 신문은 일제히 호외를 발행했다. 사진은 당시 동아일보 지면. (출처=네이버 라이브러리)

     


    1934년 10월 22일 국내 신문들이 앞다퉈 호외를 발행했다.

    '근래 희유(稀有)의 함남 권총사건'(동아일보), '범행 후 동구서치(東驅西馳) 18일 만에 북청행 열차 중서 피체'(조선일보), '함남 일대에 동출서몰(東出西沒)하던 권총범 김춘배 마침내 피착(被捉)'(조선중앙일보), '관북 천지송동(天地聳動)시킨 신창 총기 대도난 사건'(매일신보).

    그해 10월 3일 함경남도 북청군 함양면 신창 경찰주재소 무기고를 홀로 습격해 권총 2정과 장총 6정, 실탄 700발을 탈취한 뒤 19일간 일제의 추격을 따돌리다 붙잡힌 독립운동가 김춘배의 소식을 호외로 일제히 알린 것이다.

    김춘배를 잡기 위해 일제가 동원한 경찰은 연인원 2만 명, 자금은 2만 원에 달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당시 쌀 한 가마니 가격은 8원가량이었다.

    ◇ 독립을 향한 쉼 없는 투쟁

    1904년 당시 전주부 삼례면의 부호 김헌식의 손자이자 김창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김춘배는 14살 되던 해인 1918년 가족을 따라 중국 길림성 연길현으로 이주했다.

    19살이 된 1927년 김춘배의 독립운동 행적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만주 돈화현 지청천 장군의 정의부군에 가담한 김춘배는 1927년 2월 권총을 들고 부잣집을 찾아다니며 군자금을 모집했다. 독립운동 입장에서는 군자금 모금이지만 반대 측에서는 탈취로 봤다.

    가족을 모두 몰살시키겠다는 협박에 못 이긴 김춘배는 자수를 택했다.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청진감옥에서 복역 중 1928년 7월 김춘배는 탈옥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내 체포되면서 1년 10월형이 추가돼 근 8년의 형기를 채우고 1934년 5월 출소했다.

    감옥에서 배운 양복 일로 생계를 꾸리던 김춘배는 출소 5개월이 채 되지 않은 10월 3일 일제강점기하 함경남도와 한반도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을 벌였다.

    대담하게 홀로 신창 경찰주재소 무기고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했다.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을 위한 수단으로써 총기를 먼저 확보한 것이다.

    이승철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당시 사건에 대해 언론은 불가사의한 인물, 전광석화, 신출귀몰, 영웅으로 표현했고 일본 경찰은 김춘배에게 걸리면 죽는다는 표현을 할 정도였다"며 "북한이 활동 무대가 됐고 검거되면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지만 이 사건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비견할만한 중대한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이 사건으로 또다시 체포되면서 김춘배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광복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났고 의지할 곳 없이 머지않아 숨진 것으로 추정됨에 따라 41~42년 생애 중 김춘배는 18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 대담한, 그러나 애잔한 독립운동가의 삶

    1934년 10월 무기고를 습격한 뒤 김춘배는 집을 찾아갔다. 하룻밤을 묵은 뒤 김춘배는 아내 전명순에게 총을 겨눴다.

    자신의 독립운동 활동으로 인해 아내가 겪게 될 고초를 너무 잘 알기에 택한 행동이다.

    당시 신문은 김춘배가 아내를 향해 "너를 죽이겠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에 살려둘 수 없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차마 내 손으로 너를 죽일 수는 없다. 너는 내가 없는 8년(수형 생활) 동안 고생한 여자다. 고생을 하면서도 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전하고 있다.

    당시 김춘배에게는 8살 된 아들 종수가 있었다. 아들 종수 씨는 아버지 김춘배가 첫 수감될 때 생후 100일 남짓이었고 김춘배의 출소 뒤 고작 5개월 정도 아버지를 봤을 뿐이었다.

    김춘배의 손자 김경근 목사(전주 채움교회)는 "할아버지가 겪었을 고초는 이루 다 말할 수 없겠지만 독립운동가의 아들인 아버지의 삶도 순탄치는 않았다"며 "아버지 없이 가난하게 살며 제대로 배울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종수 씨는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김춘배의 독립운동 행적을 조사해 정부에 알렸고, 김춘배는 1990년 뒤늦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을 수 있었다.

    국가보훈처의 공적조서는 김춘배의 사망 시기를 1946년 12월 1일로 기록하고 있다.

    광복과 함께 서대문형무소를 출소했지만 38선이 그어져 가족이 있는 북녘으로 갈 수 없었던 김춘배는 모진 고문 등으로 망가진 몸을 의탁할 곳 없이 숨졌고 행려병자로 오인해 모처에 묻었지만 무덤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승철 위원은 김춘배의 제적부에는 사망 시기가 1944년으로 돼 있다고 밝히고 있다.

    나라를 위해 생을 바쳤지만 김춘배의 묘지뿐 아니라 사망 시기 역시 명확하지 않은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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