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공작'에서 안기부 스파이 흑금성 역을 맡은 배우 황정민.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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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냥 동네 아저씨 같은 수더분함 속에는 배우로서 그가 쌓아온 신념들이 있다. '공작'의 스파이 흑금성 또한 신념으로 움직이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와 닮아있는지도 모른다. 배우 황정민의 이야기다.
'군함도' 이후 1년 만에 돌아온 영화 '공작'은 황정민에게 또 다른 변곡점이었다. '바닥까지 모두 보여줬다'는 그의 말처럼 이 냉철한 스파이 영화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간절한 진심이 느껴진다.
자신에게 새겨진 관성을 끊임없이 깨려는 황정민의 시도는 그를 단순히 '흥행 보증 수표'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마산이 고향인 황정민의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는 여전했지만 흑금성과 박석영, 두 그릇에 담아낸 무게감은 전혀 달랐다.
홀로 단단히 버티던 속을 완전히 비워내자 비로소 다시 채울 수 있었다. 황정민에게 '공작'은 그런 작업이었다. 이제 한 고비를 넘어 새로운 길로 향하고 있는 그와 이야기를 나눠봤다. 다음은 황정민과의 일문일답.
▶ 상당히 연기에 있어서 힘들었다고 이야기해왔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그런 점을 느꼈나. 쉽지 않은 경력을 가진 배우인데도 이번 영화에 특히 그런 어려움을 많이 마주한 것 같다.- 스파이 흑금성과 박석영일 때의 1인 2역을 아주 쉽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뒷통수를 맞은 거다. 보통 대사를 고민하고 생각한 다음 현장에 나가서 연기를 하는데 그게 잘 쌓아지지 않으면 긴장감이 생기지 않더라. 서로 긴장감을 갖고 있는데 섞이지 않으면 말도 안되는 영화가 아닌가. 도대체 이게 뭘까, 내가 뭘 잘못한 걸까 계속 고민했다.
▶ 그렇다면 그런 고민과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내고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는지도 궁금하다.- 대만에서 촬영한 분량이 초창기인데 고려관에서 리처장인 (이)성민이 형과 만나는 장면부터 틀어지기 시작했다. 보통 선수들이라 눈만 마주쳐도 알아서 다 하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그게 안되니까 내 바닥까지 다 열어서 보여줬다. 하나부터 열까지 서로 이야기하면서 짜맞추기 시작했다. 오히려 나중에는 이게 우리에게 큰 힘이 됐다. 그렇게 산을 하나씩 넘어가면서 마지막 장면은 이미 거기까지 감정이 잘 쌓여있어서 너무 수월하고 편안하게 찍었다. 그 때는 이걸 하려고 이 고생을 했구나 싶더라.
영화 '공작' 스틸컷.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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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속 흑금성 박석영과 리처장의 관계가 처음엔 서로 팽팽하게 속고 속이는 대립구도에 가까워보이지만 나중에는 그렇지 않다. 어떻게 보면 '브로맨스' 식으로 흘러간 면도 있는데 그렇게 감정이 만들어졌나.- 브로맨스를 하자고 한 건 아니었다. 두 캐릭터가 그럴 만한 관계도 아니다. 그런데 촬영하면서 조금씩 물에 젖듯이 쌓여가기 시작한거다. 그렇게 오다보니까 뭔지 모를 큰 에너지, 뭉클함 같은 게 서로 느껴졌다. 이 영화가 건네는 큰 주제의식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개인과 개인의 우정이지만, 좀 더 크게 보면 남과 북의 화합이지 않나.
▶ 박석영은 냉전시대 스파이의 성격을 그대로 가진 인물이다. 처음 박석영은 본인의 생사에 관계없이 국가를 위해 공작원이 되고자하는데 이 심리가 납득이 갔나. 실존 인물인 박채서 씨를 만나면서 납득이 간 부분이 있을까. 실제로 그런 상황에 본인이 놓였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인지도 궁금하다.- 박석영이라는 인물의 신념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어떤 신념을 가졌기에 가족도 뒤로 하고 죽을 수 있는 직업을 택한 것일까. 당연히 100%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분의 신념은 그분의 신념대로 존재하는 것이고 영화 '공작'에서의 박석영에게는 박석영대로의 분명한 신념이 있어야 했다. 그게 내게는 중요한 과제였다. 실제로 우리 같은 평범한 일반인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어떻게 만났겠으며 그 에너지를 어떻게 견디겠느냐. 아마 심장이 터졌을거다. 그런 모든 것을 감수하고 김정일 위원장까지 만나는 신념이 한 순간 무너졌을 때는 어떻게 표현을 해야 될까 생각했다. 만약 내가 같은 상황에 놓여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야 했다면 오줌을 지리더라도 만났을 것이다.
▶ 촬영 당시에 인상깊게 남은 에피소드가 있다면 풀어달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두 번째로 만나는 장면의 촬영이었다. 대사들이 제법 많아서 굉장히 욕심있게 준비를 했다. 촬영 기간이 3일 밖에 주어지지 않았는데 그 안에 어떻게든 촬영을 끝내야 했다. 누구 하나 잘못하면 다같이 늦어지니까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열흘 전부터 철저하게 준비했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갔는데 세트에서 오는 중압감, 진짜 김정일 위원장이 들어오는 듯한 현실감 때문에 쫄아 붙어서 말이 안 떨어지는 거다. 나랑 (이)성민이 형이랑 둘이 얼마나 헤맸는지 모른다. 차렷 자세로 대사만 하니까 또 너무 힘든거다. 감정이나 대사 전달은 정확히 돼야 하는데 자연스럽게 동작을 할 수 없으니까 딱 죽을 것 같았다. 밧줄로 날 묶어놓은 기분이었다. 다음 날이 (주)지훈이 촬영이었는데 우리가 너무 힘들었다고 겁을 줬거든. 그런데 지훈이는 너무 잘하는 거다. 괜찮았냐고 하니까 '전 괜찮던데요' 하더라. 하여간 뻔뻔하게 잘해서 부러웠다. (웃음)
영화 '공작'에서 안기부 스파이 흑금성 역을 맡은 배우 황정민.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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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당히 배우 황정민에게도 얻을 게 많은 작업이었던 것 같다. '공작' 이후에 변화하거나 달라진 지점이 있나.- '공작'을 하면서 내가 모자라서 바닥을 치는, 내 스스로를 보는 시점이 오게 됐다. 자괴감에 빠져서 나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때 (이)성민이 형도 힘들어하는 걸 알아서 함께 그런 속내를 공유하게 된 거다. 이전에 했던 작업들이 좀 더 내가 잘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었다면 이번 작업은 그런 에너지는 배제하고 주어진 역할의 레시피 안에서 함께 공유를 하는 느낌이었다. 내게는 큰 공부가 됐다. 매번 영화 작업을 하면서 관성이 생기지 않는 건 말이 안된다.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나도 모르게 관성이 있었는데 그걸 내려놓고 레시피 안에서 하다보니 내가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놓치고 가는 게 많았다는 걸 알게 됐다. 연기는 나만 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만약 내가 잘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성민이 형, (조)진웅이, (주)지훈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 어쨌든 치열한 여름 시장에 출사표를 던진 영화다. '신과함께-인과 연', '미션 임파서블: 폴 아웃' 등 만만치 않은 영화들이 버티고 있는데 오락성이 크게 부각된 첩보 영화는 아니라 이에 대한 생각도 있을 것 같다.- 일단 관객들이 실화를 좋아하니 자신이 있다. 또 황정민을 좋아한다. 아, 이거 또 기사 제목으로 나가면 욕먹는 거 아닐까. (웃음) 잘되고 안되고를 떠나서 좋은 시기에 제 영화가 걸린다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 사실 걸고 싶어도 못 거는 영화가 태반인데 저를 필두로 한 영화가 이렇게 걸린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하고, 복받은 일이다. 손익분기점을 일단 넘기고 더 잘됐으면 좋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지만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그냥 이 작품을 나만 알고 있는 것은 너무 아까워서 참여한 게 제일 컸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었어?'라고 알아주시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 일년에 두편 씩 황정민 영화를 볼 때도 있었다. 전작 '군함도' 이후 나름대로 휴식기를 가진 느낌인데 당시 여러 논란으로 상당히 마음이 복잡했을 것 같다. 이런 저런 일들을 지나며 아까 말했던 것처럼 '관객들은 황정민을 좋아한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을까.- 오래 전에 찍었던 것들이 개봉시기가 맞물리면서 아마 다작 배우라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다. 맞다. 수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당시에는 힘들었다. 잘하고 싶은데 그게 잘 되지 않았을 때는 마음을 추스리기가 힘들었다. '공작'을 끝내고 나서는 내가 모자라다는 걸 느끼고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바닥을 비로소 알게 됐다. 그 전에는 바닥이 보여도 '아니야, 할 수 있어'하며 스스로 채찍질했는데 이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거다. 그러면서 1년 넘게 잘 쉬었다. (나를 향한 비판들에) 처음에는 직업이 배우인데 열심히 일을 하지 말라는 건가 이런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보니 그렇게 이야기한 모든 사람들이 내 영화만 봤나 보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내 영화를 보고 재미있어서 계속 봤는데 지겨워질 수도 있는 거다. 그리고 연기를 잘한다 못한다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는 배우들이 한국의 수많은 배우들 중에 몇 명 밖에 없다. 그 중 하나가 나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괜찮다는 생각이 들면서 다시 다작의 길을 걷지 않을까 싶다. (웃음) 농담이다.
영화 '공작'에서 안기부 스파이 흑금성 역을 맡은 배우 황정민.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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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홍보 활동 중에 '갑분싸'('갑자기 분위기 싸해진다'는 뜻의 줄임말)라는 신조어에 대한 남다른 해석으로 한바탕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 그건 진짜 제 실수다. 단어 뜻을 전혀 몰랐고, 집에 가서 아이한테 혼났다. 말 가지고 장난하면 안된다고. (웃음) 요즘 길에 다니면 어린애들이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나를 가리키며 '갑분싸, 갑분싸' 하는데 귀엽다.
▶ '국제시장' 윤제균 감독과 이번에는 SF영화 '귀환'으로 다시 한 번 손을 잡는다. 촬영에 대해 기대하고 있는 바가 있나.- 12월부터 촬영에 들어갈텐데 너무 기대된다. '공작' 때 느꼈던 좋은 감정을 다시 느끼면 좋을 것 같다. SF 장르가 처음이라는 중압감도 있지만 신비로움도 있지 않느냐. 우주복을 입고 그런 작업들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것이라 너무 궁금하다. 무중력 상태에서 내가 어떻게 연기할지 모르는 거니까.
▶ 악기 연주가 취미라고 들었다. 과거 사진들을 보면 일상에서의 모습들이 상당히 평범할 것 같은데 요즘은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나.- 지방에 촬영을 갔는데 낮에 만약에 촬영이 끝나면 시간이 제법 많이 남는다. 그러면 매번 책을 보거나 클라리넷을 연주한다. 텔레비전 보는 건 좋아하지를 않아서. '군함도'에서도 내가 다 불었다. (웃음) 원래 일할 때, 그러니까 배우일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철저하게 구분한다. 배우로 일을 하지 않을 때는 그냥 동네 백수다. 매일 슬리퍼 신고, 애 학원에 데려다 주고, 집에 데리고 온다. 연예인이라고 매일 차려입고 학원 앞에 서있을 수는 없지 않나. 쭈쭈바 물고 서있으면 날 알아보시고 '어, 황정민이다' 이런다. 그러면 '애 학원이 있어서요'라고 말하면서 인사하고 그런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