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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진보적인 돼지들이나 보수적인 돼지들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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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진보적인 돼지들이나 보수적인 돼지들이나…

    (사진=자료사진)

     

    최영미 시인의 시 '돼지의 본질'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는 자신이 돼지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스스로 훌륭한 양의 모범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신분이 높고 고상한 돼지일수록 이런 착각을 잘한다.'

    시인이 말하는 '돼지'는 여성에게 성폭력과 성추행을 저지르고도 자기가 지은 죄를 교묘히 합리화하고, 감추고, 개중에는 자기가 믿는 신으로부터 용서받은 것으로 착각하는 남성들을 상징한다. 돼지처럼 추잡한 행동을 하면서도 자신은 돼지가 아니라고 믿는 남자들을 향해 시인은 탄식의 노래를 불렀다.

    돼지들은 우파에도 있고 좌파에도 있다. 진보적인 돼지들이나 보수적인 돼지들 모두 '참을 수 없는 성욕의 가벼움'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돼지들은 주류사회를 이끌고 있는 소수의 지배층에도 있고 비주류사회 평범한 시민들의 소소한 삶 속에도 독가시처럼 박혀 있다.

    정의와 인권을 외치던 사람들이 권력이 되자 여성에게 성적 갑질을 했다는 것도 틀린 말이다. 그들은 드러나지 않았을 뿐 권력이 되기 전에도 돼지였다. 보통의 직장, 크고 작은 사업장, 학교, 교회, 가정 안에도 돼지들은 존재한다.

    돼지의 본질'은 계속 이어진다. '그는 진주를 한번 보고 싶었을 뿐, 두 번 세 번 보고 싶었을 뿐… 만질 생각은 없었다고, 해칠 의도는 더더군다나 없었다고, 자신은 오히려 진주를 보호하려 왔다고… 그러나 그는 결국 돼지가 된다. 그들은 모두 돼지가 되었다.'

    정신의학자인 케이티 캐넌(Katie Cannon)은 "우리의 몸은 기억을 담고 있는 텍스트고, 그렇기에 기억해 내는 일은 환생과 같다"고 했다. 돼지에게 추행 당한 여성의 몸은 기억을 담고 있다. 몸과 마음은 분리될 수 없는 신경관계여서 '괘념치 말라'는 언어로 치유될 일이 아니다. 몸이 담고 있는 기억이 생생한데 괘념치 말고 잊으라고 달래는 것은 가해자이자 권력자인 남성이 상대 여성에게 주는 2차 폭력이다. 살아 있는 기억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회개하는 것은, 일방적인 요청이나 명령과는 다르다.

    캐넌의 분석처럼 성폭력과 성추행에 의한 여성의 트라우마는 몸이 담고 있는 기억을 밖으로 꺼내야만 환생할 수 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 환생이다. 환생은 곧 부활이기도 하다. 이것이 미투의 본질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에 나오는 왕자 멜컴이 비장하게 던진 말은 돼지들에게 당한 여성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슬픔을 말하시오. 비탄이 입을 못 열면 미어지는 가슴에게 터지라고 속삭이는 법이오."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시간을 기억해 내고 그것을 입술을 열어 말하는 것은 미어지는 가슴을 터트려 다시 살아나고 싶기 때문이다. 죽음에서 부활로 걸어 나오기 위한 자기 자신과의 처절한 투쟁이다.

    돼지들은 자신이 상처를 주었던 여성들이 고치 속의 애벌레로 조용히 살거나 사라져주기를 바란다. 돼지들은 그녀들이 고치를 깨고 나와 나비가 될 까봐 두려움에 떤다. 나비로 부활한 그녀를 보고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나락으로 떨어져 절규한다.

    예술인 돼지, 검사 돼지, 교수 돼지, 정치인 돼지, 목사 돼지, 신부 돼지…… 이들 말고도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부류의 돼지들이 자신이 돼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은 돼지가 아니라고 믿는다.

    미투는 남성들의 고착된 남성중심적 성(性)인식과 비뚤어진 성욕구의 인식전환을 요청한다. 능동적 젠더 혁명이다. 남성성과 여성성이 평등하게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성난 목소리다. 미투가 개인의 영역을 벗어나 국가가 개입해야 할 공공의 영역이자 법률로 보호받아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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