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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미투'…"동료 아닌 기쁨조였다"



문화 일반

    방송작가 '미투'…"동료 아닌 기쁨조였다"

    ['#미투' 너머 ③] 일상처럼 반복되는 성폭력의 굴레

    "나도 당했다." 한국 사회에서 불감증에 가까운 성폭력 인식이 '#미투'(Me too) 운동으로 크게 나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옵니다. 개인이 희생을 감내하는 폭로 방식에 기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목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보다 평등하게 살아갈 세상, '#미투' 너머를 짚어봤습니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① "예쁘다"는 말도 성폭력일 수 있어요
    ② 女문인에게 "00선생님이랑 술 먹는데 올래?"
    ③ 방송작가 '미투'…"동료 아닌 기쁨조였다"
    <끝>

    (사진=자료사진/스마트이미지 제공)

     

    여성이 절대다수인 방송작가 영역. A씨는 공영방송 다큐멘터리 제작사에서 막내 작가로 일하면서 실감하기 힘든 일들을 겪었다.

    "당시 어느 PD가 막내 작가들만 있을 때 이런 말을 하더군요. '전에 애들은 얼굴이 진짜… 와… 별로였는데, 너희들 같이 생긴 애들 오니까 회사 올 맛 난다. 왜 이제야 왔니?'라고요."

    부푼 꿈을 안고 택했던 일터에서 "볼수록 예쁘단 말야" "오! 누구씨, 오늘 아침에 너무 예쁘던데"라는 말을 들으며 느낄 수밖에 없던 수치심은 일상처럼 반복됐다.

    A씨는 "당시 동료 작가 중에는 자기가 겪은 성폭력 문제를 회사 내에서 공론화한 친구도 있었지만, 저는 그냥 넘겼다"며 "얼굴 붉힌다는 것이, 불이익 당할 것이 겁난다는 못난 이유였다"고 전했다.

    그는 자신이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자라면서 겪은 일들을 담담하게 꺼내놨다.

    "어린시절 대낮에 길을 걷다가 노인한테 성추행을 당했고, 자라는 동안 그것이 몸가짐을 조심하지 않은 제 잘못이라 여겨 왔습니다. 스무 살 무렵 치마를 입고 길을 갈 때 작은 슈퍼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삼촌뻘 남자들이 저보고 들으란 듯 외치더군요. '저 여자 니 스타일 아니야?'"

    A씨는 "일부 혹은 상당수 남성들은 '나는 선택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젠더'라는 생각에서 뿜어져나오는 당당함을 지녔는데, 이는 스스로 선택자인 듯 굴게 부추기는 것 같다"며 "결국 상대방의 의사를 딱히 궁금해 하지 않는 오류를 범하게끔 만든다. 단순 워딩을 넘어 태도, 눈빛, 상황에 녹아 있다"고 했다.

    "독서모임을 함께하는 한 여성은 회사에서 직책 높은 상사에게 상의할 일이 있어서 면담을 청했는데, 그 상사가 웃으며 '이렇게 00씨가 나를 불러줘야지. 그렇지 않고 내가 먼저 00씨를 부르면 의심받아'라고 말했다더군요. 그런 상황을 자주 겪다보면 여성들은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동료로 인정받고자 온 일터에서마저도 이렇게 무슨 기쁨조 취급받으며 일해야 하는구나'라는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죠."

    그는 "여성들은 살다보면 종종 자신을 인간 아닌 '도우미' 혹은 '기쁨조' 취급하는 남자들을 본다"며 "저도 부모님께는 말하지 않지만 사회생활하면서 성추행·성희롱 자주 겪고 그것이 거의 모든 여성에게 일상처럼 일어나는 폭력임을 잘 안다"고 말했다.

    "인간은 자기가 피해자 집단에 속하지 않으면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TV에서 '야이 껌둥아!' 하고 외치며 (인종을) 개그 소재로 삼을 때 자기가 '껌둥이'라 불려진 적 없는 이들은 무감하고 무심해지기 쉽잖아요. 남자 검사들이 여자 검사를 향해 '너희가 탬버린 치니까 도우미 비용 아껴서 좋다'고 해도 남자들은 그러려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언어가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대상이자 피해자는 남성이 아니니까요."

    A씨는 "남자들도 어쩌면 자기가 겪어보지 못한 상황이라 잘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하지만 모른다는 이유로 아예 듣거나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않는 것은 몹시 아쉽다"고 전했다.

    ◇ '미투' 운동, 사회 정의 실현 위한 중요한 출발점이자 변곡점

    지난해 5월 17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열린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1주기' 기자회견 참석자들이 손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우리는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왜 진작 이야기하지 않았느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젠더 문제를 깊이 연구해 온 한림대 사회학과 신경아 교수는 "저 자신을 포함해 대한민국 여성들 가운데 성폭력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성폭력을 당하더라도 문제제기를 제대로 못하는 데는 직장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는 '고용' 문제, 직장에 위협을 가하는 존재로 찍혀 왕따 등 여러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낙인' 문제 등 복잡한 2, 3차 피해의 맥락이 있다."

    신 교수는 "지금 '미투' 운동 역시 그간 성폭력 문제제기를 하기 어려웠던 수많은 맥락이 쌓이고 쌓여 폭발한 것"이라며 "이번의 경우 이른바 힘 있는 여성으로 여겨져 온 검사 등 전문직 여성들이 '나도 이렇게 당하고 있다'고 나섰다는 데서 남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지금처럼 전문직 여성들이 이야기하는 단계를 지나면 '미투' 운동은 더욱 진화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자신이 속한 조직이나 영역에서 별다른 힘을 갖지 못한, 그러니까 노동시장의 비정규직·아르바이트 여성들이 성폭력 문제를 드러낼 수 있는 단계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미투' 운동을 변곡점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자기 이야기를 했을 때 고용·생존 문제를 즉각적으로 위협 받는 수많은 여성들이 동참할 길을 넓혔기 때문이다."

    그는 "'미투' 운동은 성폭력 문제와 관련한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중요한 출발점 중 하나여야 한다"며 "앞으로는 아무런 권력을 갖지 못한 일상의 여성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단계까지 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어 "프랑스 철학자 리오타르(1924~1998)는 '정의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사회는 들어야 하고, 들으려면 당사자들이 이야기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며 "그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는 데서부터 한국 사회는 법과 제도로서 새로운 계기들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 성폭력 자체가 아니라 그 사실이 외부에 알려졌다고 부끄러워하는 현실

    박상기 법무부 장관이 지난 2일 경기도 정부과천청사에서 법무부 성범죄 대책위원회 발족 및 입장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

     

    같은 맥락에서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 역시 "'미투' 운동이 확산되는 데 대한 반대급부로 굉장히 커다란 반발도 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며 "이러한 부정을 뛰어넘을 수 있는 인식의 공감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활동가로서 수십 년째 성폭력 피해자들을 끌어안아 온 이 소장은 "그러한 인식의 공감대는 결국 개개인의 성찰에서 비롯된다"며 "성폭력 문제를 '몇몇 괴물들이 벌이는 짓' '나와는 상관 없는 일'로 이분화시킬 수 있는 가해자 엄벌주의 등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비뚤어진 문화를 반성하고 개선할 수 있는 지금의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미투' 운동 너머,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지난 1년여 간 문단 등 문화예술계 성폭력 문제에 매달려 온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이선경 변호사는 "사실 '미투'는 공식적인 절차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폭발하는 마지막 방법"이라며 진단을 이어갔다.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부 성폭력 문제를 폭로한 것 역시 검찰에는 이 문제를 해결할 시스템이 없다는, 있더라도 유명무실하다는 것을 확인해 준 일이다. '미투' 운동은 결국 우리 사회에는 성폭력 문제를 해결할 시스템이 부재하다는 것, 이를 묵인하면서 특성 세력이 이익을 향유해 왔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 변호사는 "성폭력 사건을 마땅히 조사해야 하는 사정기관으로서 검찰은 내부 문제조차 해결 못해 왔다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하는데, 오히려 내부 성폭력 문제를 폭로 당한 것을 부끄러워한다"며 "여검사를 추행한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이 외부에 알려졌다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문단이나 영화계 등 문화예술계 역시 마찬가지다. 자기네 모습을 부끄러워하거나 성찰하기는커녕 폭로자를 깎아내리는 목소리들이 나온다"며 "스스로 유명 작가들의 성폭력을 수십 년간 방관해 왔다는 것, 오히려 여성 동료를 그 자리에 불러낸 공범·방조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 한다"고 꼬집었다.

    "공공기관이나 회사를 대상으로 성폭력 관련 자문을 하다보면, 내부 관련 시스템이 잘 만들어진 조직은 오히려 문제가 밖으로 잘 안 알려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사팀에 성폭력 피해 사실을 알리면 신속하게 조사를 벌이고 징계하기 때문이다. 일단 피해자가 신고만 하면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게 움직인다."

    이 변호사는 "폭로라는, 피해 사실을 호소하기 위해 당사자가 신상까지 드러냄으로써 사생활 침해마저 감수해야 하는 극한의 일을 막아주는 것 역시 사회가 해야 할 일"이라며 "먼저 각 조직이나 영역 안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이 인사상 불이익 등을 걱정해 입을 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공정한 시스템을 만드는 일부터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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