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배너 닫기

전체메뉴보기

'乙'인 학교가 '甲'인 업체를 지도감독하라구요?



교육

    '乙'인 학교가 '甲'인 업체를 지도감독하라구요?

    "고3 때 세무사 사무실에 취업(현장실습) 나갔습니다.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월급에 초과근무는 예사였죠. 특성화고라서 깔보는 듯한 사무실 직원들의 말과 시선에 힘들어서 학교에다 '현장실습을 그만 두겠다'고 했더니 선생님은 '참으라'고만 했어요. 한 선생님은 현장실습을 중도에 그만 둔 아이들을 '배신자'라고 페이스북에 쓰기도 했어요. 취업 대신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아이들도 '배신자'가 됐고 '알바라도 해서 취업률이나 올려라'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현장실습 나간 남자 아이들은 샴푸도 얼어붙는 기숙사에서 지내야 했고 용접을 하는 아이들은 날카로운 철판에 손을 다쳐도 '거기는 다 그렇다'고만 하더군요. 우리는 운이 좋아서 살아 남은 것 같아요. 도대체 얼마나 사람이 죽어야 관심을 가져주실건가요?"

    지난 30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열린 ‘산업체 파견 현장실습 폐지 촉구’ 기자회견 참석자들이 손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지난 30일 서울 정부청사 앞. 특성화고 현장실습 폐지를 요구하는 시민단체 기자회견에서 올해 초 특성화고를 졸업한 A씨가 자신의 현장실습 경험담을 떨리는 목소리로 전했다.

    "학교 후배들이 취업을 응원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하지만 흔쾌히 응원해줄 수가 없었어요. 현장실습 나갔다가 후배들이 죽어 나간다면 응원했던게 영원히 죄책감으로 남을 것 같았기 때문이죠"

    A씨 옆에 있던 조창익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도 침통한 모습이었다.

    "제주 현장실습 도중 사망한 고 이민호군에게 교사로서, 어른으로서 사죄합니다. 어린 나이에 소망을 피우지도 못한 채 세상을 등진 수많은 제자들의 넋 앞에서 사죄합니다. 제주에서, 안산에서, 인천과 전주, 울산에서 재해현장으로 변한 교육현장이 어떻게 교육이 될 수 있습니까? 교육의 이름으로 살육을 하고 있는 우리는 죄인입니다"

    조 위원장의 목소리에도 물기가 묻어났다.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최근 특성화고 학생들의 현장실습 중 사망·산재사고가 잇따르면서 현장실습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나아가 아예 현장실습을 폐지해야 한다는 요구까지 나오고 있다.

    사실 특성화고 현장실습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노무현 정부 때부터 제기돼온 것이다.

    현장실습이 곧 취업으로 인식되고 취업률로 평가받는 특성화고는 학생들의 전공과 일자리의 질에 관계없이 학생들을 현장실습으로 밀어냈다. 현장실습 중도포기는 취업률을 떨어뜨리고 이는 곧 내년도 신입생 모집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학교로서는 취업률 통계가 잡히는 다음해 2월까지는 보다 많은 학생들이 현장실습에 남아 있도록 해야 한다.

    기업체는 현장실습생을 받는다고 특별한 혜택을 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행정업무도 늘어나고 별도의 직원을 실습생에게 붙여 가르쳐야 한다. 대부분 영세기업인 현장실습업체로서는 상당히 귀찮은 일이어서 '현장실습생을 안받으면 그만'이다. 그를 대신할 외국인노동자와 주부 노동자,고령 노동자 등 저임금 근로자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특성화학교와 학생은 기업에 '을'이 될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을'의 위치에 있는 학교가 '갑'의 위치인 업체를 발굴하고 점검까지 해야 한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현행 직업교육훈련촉진법 8조에 따르면 현장실습을 실시할 업체를 선정하는 사람은 학생이나 특성화학교장이다. 중소벤처기업청 등이 보유한 업체의 정보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업체 발굴의 책임은 기본적으로 학교에 있다.

    하지만 '을'인 학교가 '갑'인 업체를 선택하기에는 애초부터 무리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의 전공과 무관하거나 아르바이트에 가까운 일자리 또는 콜센터 등과 같은 인력파견업체에라도 현장실습을 내보낸 뒤 끝까지 남아 있으라고 학생들을 다그칠 수 밖에 없다.

    교육부가 올해 2월 집계한 특성화고 학생들의 현장실습 전공 적합도는 91%. 그러나 여기에도 허수가 많이 끼어 있다는 지적이다. 김경엽 전교조 실업위원장은 "학생 전공이 건축과인데 알루미늄 새시 공장에 취업해도 전공으로 인정하거나 인터넷쇼핑몰 전공인데 서비스업종에 취업하면 전공으로 인정하는 식으로 전공 적합도를 끼워 맞추는 일이 많다"고 전했다.

    일자리의 질을 가리지 않고 취업률 높이기에 급급하다 보니 취업유지율은 매우 낮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정확히 얼마인지는 알 수가 없다. 정부는 특성화고 학생들에 대해서는 특정시점(매년 2월)의 취업률만 조사할 뿐 그 이후 추적조사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30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열린 ‘산업체 파견 현장실습 폐지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한 특성화고 졸업생 복성현 씨가 발언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기자회견에 나왔던 A씨는 "10명 가운데 2명만이 현장실습 나갔던 곳에 취업을 했고 나머지는 알바를 하거나 대입을 준비하거나 아니면 백수"라고 전했다.

    현장실습 나갈 업체를 발굴하는 책임과 함께 그 업체가 현장실습생의 안전과 근로기준을 제대로 지키며 '교육'을 시키고 있는지 점검하는 것도 학교 몫이다.

    교육부는 올해 8월 직업계고 현장실습제도 개선방안을 발표하면서 학교로 하여금 현장실습 기간에 기업을 직접 방문해 '순회지도'(지도·점검)하라고 했다. 유해하고 위험한 업무를 지시하는지, 수당은 제대로 지급하는지, 기타 권익침해 사례나 노동관계법 위반 의심사례가 있으면 학생을 복교조치하고 노동관서에 근로감독을 요청하도록 했다.

    하지만 '을'이 '갑'을 제대로 지도감독할 수는 없어 보인다. 현장실습 업체의 산재사고나 비인격적 대우,부당노동행위 등은 학교 대신 정부가 나서야 풀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상현 특성화고권리연합회 추진위원장은 "법이 있지만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은 이를 어떻게 지키도록 할 것인지 계획하고 집행하는 기관이 없기 때문"이라며 "실습업체 인증과 학교와 연계, 실습시 관리 감독 등은 고용노동부가 책임지고 교육부가 결합된 형태의 현장실습 전담기구가 담당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편 정부는 1일 김상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주재로 사회관계장관회의를 열어 특성화고 현장실습 문제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며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도 전체 회의를 열어 제주 현장실습 특성화고생 사망사건을 논의한다.

    이 시각 주요뉴스


    Daum에서 노컷뉴스를 만나보세요!

    오늘의 기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댓글

    투데이 핫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