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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 "일본인 가네코에게 박열의 조선은 피난처"



문화 일반

    김삼웅 "일본인 가네코에게 박열의 조선은 피난처"

    "박열이 가네코에게 사상 영향 받았을 가능성" "자살은 의혹 많다"

    영화 '박열' 스틸컷(사진=메가박스㈜플러스엠 제공)

     

    영화 '박열'이 크게 흥행하면서 일왕 부자의 폭살을 꾀한 독립운동가 박열(1902~1974)과 함께, 그의 동지이자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1903~1926)가 주목받고 있다.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에게 박열의 나라 조선은 어떤 의미였을까.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과 조선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대를 휩쓸던 사회주의·아나키즘에 심취했던 그녀는 일왕 암살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박열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수감됐다. 그리고 옥중에서 스물세 살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에 있는 박열의사기념관 옆에 잠들어 있다.

    최근 박열 평전 '나는 박열이다: 일왕 폭살을 꾀한 어느 아나키스트의 뜨거운 삶의 연대기'(책뜨락)를 펴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11일 CBS노컷뉴스에 "가네코 후미코에게 조선은 남편 박열의 모국이기에 앞서 일종의 피난처였을 것"이라고 운을 뗐다.

    "가네코는 대단히 불우하게 태어나서 어렸을 때 조선으로 쫏겨나다시피 했다. 그때는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을 텐데, 박열의 연인이 되면서부터는 조선을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네코 후미코는 아나키스트로 알려져 있다. 김 전 관장은 "가네코의 사상적 배경에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1910, 20년대 일본에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자유주의 등 사상의 물결이 대단히 활발했다. 조선에서는 통제를 심하게 했지만, 일본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웠던 것이다. 그 무렵 아나키즘 열풍은 대단했다. (가네코 후미코의 사상은) 그러한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학교에서 직접 교육을 받았다기보다는 사회에서, 그리고 불우했던 가족의 영향 등도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 "가네코 만나기 전 박열이 아나키즘에 심취했다는 기록 찾기 어렵다"

    영화 '박열' 스틸컷(사진=메가박스㈜플러스엠 제공)

     

    흥미롭게도 김 전 관장은 "사상적인 영향은 오히려 박열이 가네코에게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박열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에 쉽게 빠져들거나 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박열의 '개새끼다'라는 글을 보고 가네코가 박열에게 관심을 가졌다고 알려졌는데,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가네코를 만나면서부터 박열이 아나키즘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그 전(가네코를 만나기 전)에 박열이 노동운동을 한다거나, 아나키즘에 심취했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그는 "가네코를 만난 이후 박열의 사상적인 흐름들이 나타나고 있다"며 "그 무렵부터 두 사람은 같은 모임에서 활동하고 잡지도 내는 과정에서 서로 (사상적인 영향을) 주고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1926년,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일왕 부자를 폭살시키려 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정에 섰다. 증거 없는 재판에서 둘은 사형을 선고 받았고, 옥중에서 혼인신고를 했다. 이후 박열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8091일 동안의 감옥살이를 마쳤지만,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7월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목을 매 생을 마감했다. 의혹 가득한 자살이었다.

    당시 형무소에서는 가네코 후미코의 자살을 발표한 뒤 사인 규명·시신 인도 요구 등을 모두 거절해 의혹을 부풀렸다. 형무소 측에서 서둘러 가매장한 그녀의 유골은 동지들의 손에 의해 비밀리에 박열의 친형에게 전해져 문경에 묻혔다.

    김 전 관장은 "가네코 후미코의 자살은 일본에서 꾸며낸 것 같다"며 "정황으로 봤을 때 합리적인 의혹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당시 형무소에서는 가네코 후미코에게 모시 같은 끝을 뽑아내는 노동을 시켰다. 예나 지금이나 중죄인에게 그런 노동을 시킬 리가 없다. 더욱이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 임신을 했다. 당시 일본 집권당인 다나카 내각은 대단히 어려운 처지였는데, (가네코 후미코가) 옥중 출산이라도 하게 되면 내각이 붕괴될 위험도 있었다. 그래서 옥중에서 죽인 것 같다."

    아나키스트는 개인을 지배하는 모든 정치 조직이나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한다. 그리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 정의, 형제애를 실현하려 애쓴다. 일본인으로 태어났지만 식민지 조선의 편에 섰던 가네코 후미코는 누구보다 이러한 아나키스트로서의 삶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전 관장은 "가네코 후미코는 성장 과정이 대단히 불우한 여성이지만, 그 안에서도 자아가 대단히 강했다"며 평을 이어갔다.

    "내셔널리즘(국가의 이익을 앞세워 모든 것을 국가 중심으로 생각하는 주의)을 벗어나, 국제주의에도 대단히 열린 여성이었다. 시도 많이 썼다. 무정부주의에 참여하면서도 시인의 품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심성이 대단히 풍요로웠던 여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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