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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만에 누명벗은 '김제가족간첩단' 유족 "가해자들 처벌 받아야"



전북

    34년만에 누명벗은 '김제가족간첩단' 유족 "가해자들 처벌 받아야"

    "간첩 누명 쓴 아버지 생각하면 가슴 찢어져"

     

    ■ 방송 : 전북CBS 라디오 <생방송 사람과="" 사람=""> FM 103.7 (17:05~18:00)
    ■ 진행 : 박민 전북민주언론시민연합 정책실장
    ■ 대담 : ‘김제가족간첩단’ 사건의 피해자 고 최낙전 씨의 아들 최원일 씨

    ◇ 박민> ‘김제가족간첩단’ 사건이라고 여러분 들어보셨습니까. 지난 1982년 8월 김제에서 농사를 짓던 최을호 씨가 북한에 나포됐다가 돌아온 뒤 조카인 최낙전 씨와 최낙교 씨를 간첩으로 포섭해 간첩활동을 했다는 사건인데요. 당사자들은 간첩 혐의로 사형을 당했거나 옥살이를 했는데 법원이 무려 34년 만에 무죄를 내렸습니다. 당사자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 자식들이 대신 재판에 참석했다는데요. 어떤 심경일까요. ‘김제가족간첩단’ 사건의 피해자 고 최낙전 씨의 아들인 최원일 씨 연결해봅니다. 최원일 씨 안녕하세요?

    ◆ 최원일> 네, 안녕하세요.

    ◇ 박민> 어제 재판에는 직접 참석하신 거죠?

    ◆ 최원일> 물론 참석했습니다. 5촌 당숙도 참석했고요. 가족들도 모두 지켜봤습니다.

    ◇ 박민>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재판정에 섰고요. 34년 만에 무죄를 받아내셨어요. “피고인은 무죄입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 최원일> 지금 생각해도 목이 메는데요. 돌아가신 아버지가 가장 먼저 생각났고요. 그다음에 작은 할아버지, 큰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아주 감격스러웠고 이제 억울함이 풀렸다는 생각에 지금도 가슴이 떨립니다.

    ◇ 박민>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거 같습니다. 그런데 고향이 김제라고 들었습니다.

    ◆ 최원일> 네,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입니다.

    ◇ 박민> 집안 분들이 함께 모여 살았다면서요?

    ◆ 최원일> 네, 그렇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농사를 짓고 계셨고요.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 박민> 그런 행복한 시간이 깨진 때는 언제입니까?

    ◆ 최원일> 제가 중학교 3학년 때입니다. 1982년 여름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사건이 시작됐죠.

    ◇ 박민> 그때 누가 끌려가신 겁니까?

    ◆ 최원일> 작은 할아버지가 먼저 끌려가셨고요. 전주에서 교사를 하시던 큰아버지, 그리고 저희 아버지가 끌려갔습니다.

    ◇ 박민> 작은 할아버지는 최을호 씨?

    ◆ 최원일> 네, 그렇습니다. 큰아버지는 최낙규입니다.

    ◇ 박민> 어느 날 갑자기 어디론가 끌려가신 거잖아요. 그랬던 아버지와 큰아버지, 작은 할아버지가 간첩이 되어 나타나셨어요. 정말 아버지가 간첩이라는 게 믿어지시던가요?

    ◆ 최원일> 일단 끌려가신 뒤 한참이 지나서 간첩이라는 말을 들었고요. 그때 당시에 믿어지지 않았고 설마 했죠. 전혀 그럴 분들이 아니신데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안 믿어졌습니다. 저는.

    ◇ 박민> 집안 전체가 그랬을 거 같아요?

    ◆ 최원일> 네, 맞습니다.

    ◇ 박민> 용서해달라고 탄원서도 쓰셨다면서요?

    ◆ 최원일> 그렇죠. 아픈 기억인데요. 아버지가 잘못했으니까 감옥에 가셨다고 생각했고요. 간절한 마음으로 용서해달라고 탄원서도 썼고요. 결국 국가가 나서서 간첩이라고 발표했으니까 안 믿을 수 없게 되었죠. 가족마저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는 시대였으니까요.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간첩이 된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찢어집니다.

    ◇ 박민> 고작 십대 소년이었는데요. 사실은 가족들의 삶도 견디기 힘드셨을 거 같아요?

    ◆ 최원일> 당연하죠. 저는 어렸지만, 어머니는 죽도록 고생하시면서 농사를 지으셨고요. 이웃들의 따가운 시선을 이겨내기 힘들었죠. 그런 눈초리를 받았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힘이 듭니다.

    ◇ 박민>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아버지가 다시 출소하셨죠?

    ◆ 최원일> 철창을 사이에 두고 짧은 시간 동안 면회를 했고요. 9년이 지나서 가석방으로 출소를 하셨어요.

    ◇ 박민> 가석방으로?

    ◆ 최원일> 원래 15년 형기였는데 9년 복역하시고 나오신 거죠.

    ◇ 박민>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다시 가족 품으로 돌아오셨는데 제대로 적응은 하시던가요?

    ◆ 최원일> 아버지만 출소하면 끝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변해버린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셨고요. 고문 후유증으로 주무시다가 신음소리를 내며 벌떡 깨시기도 했고요. 또 동네 사람들의 시선이죠. ‘저 사람이 간첩이야’라는 시선을 이겨내기 힘드셨던 거 같아요.

    ◇ 박민> 아버님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우셨고 끝내 목숨을 끊으셨어요.

    ◆ 최원일> 네, 그렇습니다.

    ◇ 박민> 그때가 출소하고 얼마나 지나서였나요?

    ◆ 최원일> 5월에 출소하셔서 4개월 만에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저는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고요.

    ◇ 박민> 아버지는 그렇게 하늘나라로 가셨고요. 큰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는 어찌 되셨나요?

    ◆ 최원일> 작은 할아버지는 사형 언도를 받고 집행되기 전까지 ‘나는 간첩이 아니다’라는 말을 외치시다가 사형을 당하셨고요. 큰아버지는 40여 일 동안 고문을 받으시다가 구치소에서 돌아가셨죠. 거기서는 자살이라고 하는데요. 저희들 생각에는 도저히 그럴 상황이 아니었던 거 같고요. 그 부분은 아직 밝혀진 사실이 없습니다.

    ◇ 박민> 큰아버지 죽음은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거고요. 작은 할아버지인 고 최을호 씨의 아들인 최봉준 씨는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했다고 당시를 떠올리시더군요.

    ◆ 최원일>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요 가족 전체가 풍비박산 났으니까요.

    ◇ 박민> 그러가다 뒤늦게 지난 2014년에 재심을 청구하셨는데요.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 최원일> 진작부터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지만, 법으로 어떻게 풀어야 할지 잘 몰랐고요. 또 가슴 아픈 이야기를 떠올리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진실의 힘이라는 단체를 알게 됐고요. 그분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 박민> 그래도 국가를 상대로 한 재심 과정도 만만치 않았을 거 같습니다.

    ◆ 최원일> 4년 넘게 준비를 했는데요. 당사자들도 전부 돌아가셨고 증언해주실 분도 없었고요. 국가 기록을 들여다봐야 하는데 제대로 협조해주지 않아서 자료를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렇지만, 진실의 힘과 여러 변호사님들의 도움으로 재판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 박민> 비록 시간이 너무나 흘렀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님도 무죄 판결 소식을 들으셨을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평범한 가족을 간첩으로 만든 국가에게는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세요?

    ◆ 최원일> 일단 어제 재판에서 판결할 때 국가로서 사과한다는 내용을 들었고요. 그런 판결만으로 돌아가신 분들의 억울함은 조금 풀었다고 보고요. 그러나 사건을 조작했던 가해자들은 처벌을 받지 않고 있다는 건 마음에 걸리고요. 국가가 가해자들에게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박민> 네,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오늘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 최원일> 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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