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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다시 시작하는 대화'



책/학술

    '이정희,다시 시작하는 대화'

    정치적 현실주의를 넘어, 근본을 지향하는 진보적 상상력

     

    '이정희, 다시 시작하는 대화: 새로운 시대, 동행을 위하여'는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의 정당해산 판결로 강제 해산된 통합진보당 전 대표 이정희가 2012년 3월부터 있었던 일들을 더듬어가며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을 풀어놓는다.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경선 과정에서 있었던 갈등, 뒤이은 종북몰이와 정권교체 실패, 내란음모사건,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당 해산과 그 이후의 기억이 1부에 담겨 있다.

    저자는 이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일차적으로 박근혜 정권과 김기춘이지만, 더 크게는 의식하지 못한 새에 우리 모두의 눈에 씌워진 색안경, 즉 “분단 이후 70년 동안 국민들의 의식 속에 뿌리 깊게 스며든 북에 대한 적대감과 안보 불안감”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색안경을 통해 보면, 북과 싸우지 말자는 통합진보당은 종북으로 보이고, 통합진보당과 연대했다는 야당 후보는 불안해 보이고, 반면 박근혜는 ‘적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줄 사람’으로” 보였던 탓에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을 국민이 선택하게 만들었다.

    저자가 낙인과 같았던 무거운 과거를 굳이 불러낸 것은 진보정치가 과거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기를 바라기 마음에서다.

    진보정치가 근본으로 돌아가 진보적 상상력을 펼치기를 바라면서 그리는 미래의 이야기는 2부에 담았다. 앞으로의 진보정치가 꼭 해결해야 할 과제로 저자가 꼽는 것은 비정규직 문제와 청년· 청소년 노동 문제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아래에서부터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진보정치가 주권자의 손에 도구를 들려줄 수 있으려면, 그런 도구를 만들어줄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저자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으로 꼽는 두 가지는, 바로 노동조합과 진보정당이다. 현실을 바꾸고 싶을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큰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이 사회 자체에 큰 문제가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 정당에 가입하거나 정치색을 드러내는 것, 또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것을 과격한 행동이라며 꺼리는 분위기가 있다. 하지만 국회에서, 정치의 틀 안에서 우리 삶의 행복과 우리의 존엄을 저해할 수도 있는 삶의 조건이 결정되게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다. 국민에게 알맞은 도구를 쥐여줄 진보정당, 권리를 지켜줄 노동조합, 모두 결국에는 주권자인 우리가 스스로 닦아서 내야 할 새로운 길이다.

    책 속으로

    쉽기만 한 대화는 아닐 터이다. 2012년 봄 이후, 진보정치는 국민들과 사이에 어떤 진지한 대화도 나누기 어려웠다. 미래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 없었다. 나 스스로도 2016년 2월 『진보를 복기하다』를 펴내면서도 통합진보당 강제해산에도 불구하고 버리기 아까운 진보정책들을 정리해 누군가 다시 쓸 수 있도록 하는 데서 멈추었다. 진보정치 흥망성쇠의 한복판에 있던 내가 과거를 어떻게 돌아보고 당사자로서 무엇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다 내놓고 말할 수 없었다. 지금도 무척 조심스럽다. 국민들의 진보정치에 대한 시선이 조금이나마 나아진 때에 새삼스럽게 지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그동안 어려움 속에 진보정치를 일으키려 애쓴 분들에게 다시 상처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그런데도 굳이 이 글에서 과거와 미래를 함께 말하는 것은, 이 글을 쓰는 지금의 나는 과거로부터 출발하여 미래로 가는 이어진 길 위에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한 나의 고백과 미래를 향한 제안 역시 서로 잇닿아 있다. 과거를 돌아보는 일 없이 미래를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더구나 중요한 시기에 진보정치를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미래를 말하면서 현재를 만들어낸 자신의 한계와 실책을 말하지 않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행동이다. 과거만을 놓고 보더라도, 통합진보당을 분열과 강제해산으로까지 끌고 간 수구집권세력의 공작정치의 실상을 역사에 기록해두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조차도 내부로부터 갈등과 분열을 막지 못한 나의 책임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길게 보면 역사는 정방향으로 흐르지만,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크고 작은 굴곡을 겪는 것은 사람 개개인의 실책과 한계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이다. 이 글에서 회고하는 과거는 모두의 이야기이거나 객관적인 서술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다. 그 시간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해법도 내 경험과 생각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더 나은 방법을 시도하고 실행하는 많은 분들의 노력이 머지않아 결실을 맺으리라 믿는다. 미래를 말하고 진보정치에 대해 제안하지만 여느 정치인들처럼 내가 해내겠다고 단언하지 못하는 것도 죄송스럽다. 그러나 말조차 꺼낼 수 없었던 시간에 비하면, 대화를 시도해볼 수 있는 오늘은 무척이나 감사한 날이다. _‘서문’ 중에서

    진보정치가 자신이 끝내 이루려는 지향을 분명하게 재확인해야 하지 않을까.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람답게 살며 삶의 의미와 행복과 자긍심을 찾는 것, 모든 사람들이 인간으로서 존엄을 존중받고 주권자로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진보정치의 궁극적 지향임을 확인하자. 정책 ‘수단’과 그로부터 나올 ‘이익’만을 말할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사람의 삶과 행복을 말하자. ‘목표’만을 말하지 말고 목표로 향해 가는 과정에서 얻어질 ‘내 삶의 변화’를 말하자. 이익의 크기보다 사람답게 사는 자존감을 먼저 본다면, 진보정당이 어떤 정책을 내놓을지 기준도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정치인들은 흔히 헌법과 법률의 틀 안에 갇혀 그 안에서 사고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불안과 혼돈을 야기하는 인물이 아니라 안정적 국정운영이 가능한 사람이라는 평을 듣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정치인들이 포기하거나 희석시킨 것은 바로 헌법의 핵심, ‘저항권’과 ‘민주주의’다. 민주주의 열망의 응축된 분출형태인 저항권을 손상시키는 것은 민주주의 후퇴를 용인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이 수구 집권세력이 국정원의 댓글공작 종북몰이로 만들어낸 것이면 당연히 무효다. 그렇지만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다고 인정받고 싶은 정치인들은 ‘대선 무효’라고 말하기를 꺼렸다. 그들은 부정선거에 항의한 4.19 민주혁명의 ‘저항권’을 헌법에서 잘라내 어디에 숨겨두었나.

    진보적 상상력은 어디까지 가능한 것일까. 우리는 시대의 한계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이미 70년 전 대한민국 제헌헌법에서 우리 선조들이 만들고자 했던 사회를 21세기의 우리는 생각조차 하기 어렵다. 제헌헌법은 노동자 이익균점권을 보장했고, 공공성을 가진 기업을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하는 원칙을 선언했다.2 제헌헌법의 공공기업 국공유 원칙은 1954년 이승만 정권의 사사오입 개헌 시 미국 원조에 적합하도록 자유시장경제체제 보장 조항들로 개정되었고 이익균점권도 박정희 쿠데타 이후 제정된 1962년 3공화국 헌법에서 삭제되었다. 하지만 이미 70년 전 모든 정치세력이 합의해 이 조항들을 대한민국의 근본 규범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현재의 법률이든 헌법이든 그 어떤 틀에도 갇혀 진보적 상상력을 제한할 이유가 없음을 말해준다. _2부 1장 ‘다음 세대의 진보정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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