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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률의 삿포로 레터]후배들이 헌정한 4관왕, 완치된 '맏형의 찢긴 다리'



스포츠일반

    [임종률의 삿포로 레터]후배들이 헌정한 4관왕, 완치된 '맏형의 찢긴 다리'

    • 2017-02-24 06:00
    '후배들아, 고맙다' 이승훈이 23일 삿포로동계아시안게임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매스스타트에서 우승하며 4관왕을 달성한 뒤 기쁨의 세리머니를 펼치고 있다.(오비히로=대한체육회)

     

    '2017 삿포로동계아시안게임' 스피드스케이팅 마지막 날 경기가 열린 23일 일본 홋카이드현 오비히로 오벌은 한국 대표팀의 잔칫날이었습니다. 남자팀 막내 김민석(18 · 평촌고)이 1500m에서 깜짝 금메달을 따내면서 분위기를 돋웠습니다.

    이어 여자 매스스타트 세계 랭킹 1위 김보름(24 · 강원도청)이 아쉽게 우승을 놓치긴 했습니다. 전날 5000m에서 금메달을 따느라 힘을 소진한 데다 매스스타트에 집중한 일본 선수들의 조직적인 팀 플레이에 밀려 동메달도 간신히 따냈습니다.

    하지만 대표팀의 상승세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맏형 이승훈(29 · 대한항공)이 스피드스케이팅 마지막 종목인 남자 매스스타트에서 금메달을 캐내며 화려하게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20일 5000m, 22일 1만m와 팀 추월까지 무려 4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한국 동계아시안게임 사상 최초의 4관왕입니다. 이전까지는 쇼트트랙 김기훈(1990년 삿포로 대회)과 채지훈(1996년 하얼빈), 안현수(2003년 아오모리)와 2011년 이승훈이 알마티-아스타나 대회에서 세운 3관왕이 최다였습니다. 아시아 전체로도 2011년 스키 크로스컨트리 알렉세이 폴토라닌(카자흐스탄)에 이은 두 번째 대기록입니다.

    대회 4일 동안 이승훈이 스케이팅을 한 거리는 무려 2만4600m나 됩니다. 이날 먼저 경기를 마치고 이승훈의 경기를 TV로 지켜본 김보름은 "나는 어제 5000m를 뛰어서 정말 피곤한데 오빠는 진짜 차원이 다른 체력을 지녔다"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이어 "타고난 체력에 연습벌레인 까닭에 가능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더욱이 정상적인 몸으로도 무리일 법한 강행군을 몸에 실밥이 여전한 가운데 소화한 터라 더 놀랍습니다. 이승훈은 지난 10일 강원도 강릉에서 열린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 팀 추월 경기 도중 넘어져 자신의 스케이트날에 오른 정강이를 베이는 부상을 입었습니다. 8바늘을 꿰맨 가운데 대회 남은 경기를 포기했고, 아시안게임 출전도 불투명했습니다.

    '네 덕분이다, 형이 잘한 거죠' 이승훈(오른쪽)이 23일 남자 매스스타트에서 우승한 뒤 지원을 해준 후배 김민석을 격려하고 있다.(오비히로=대한체육회)

     

    하지만 이승훈은 출전을 강행했습니다. 자신의 실수로 세계선수권 메달이 무산된 후배들을 위한 미안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4관왕을 달성한 뒤 이승훈은 "사실 부상을 입은 뒤 시즌을 포기했다"고 털어놨습니다. 이어 "그러나 당시 1위를 하려던 내 욕심에 확실했던 메달이 무산된 후배들에게 미안했다"면서 "그래서 아시안게임에서라도 메달을 안겨주려는 마음뿐이었다"고 대회 출전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이런 마음은 전화위복이 됐습니다. 당초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던 지난 20일 5000m에서 이승훈은 6분24초32를 찍으며 자신이 세운 아시아 기록을 6년 만에 경신했습니다. 22일에는 1만m에서 우승한 뒤 불과 3시간 만에 열린 팀 추월에서도 금빛 질주를 펼쳤습니다. 주형준(26 · 동두천시청), 김민석과 함께 나서 세계선수권의 아쉬움을 날렸습니다.

    후배들은 맏형의 투혼과 희생 정신에 크게 감동했습니다. 김민석은 "승훈이 형에게 정말 고맙다"면서 "결코 가벼운 부상이 아닌데 투혼을 펼친 것은 대선배로서 본보기를 보였고, 후배들을 북돋워줬다"고 감격적인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어 "같은 선수가 보기에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면서 "최상의 컨디션으로 한다 해도 4관왕을 할 선수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부상으로 4관왕에 올랐으니) 그만큼 대단한 것 같다"고 감탄했습니다.

    팀 추월 금메달로 김민석은 병역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주형준은 이미 2014 소치올림픽에서 역시 이승훈과 함께 팀 추월에 나서 은메달을 따내며 군 면제 혜택을 얻었습니다.) 물론 23일 1500m에서 금메달을 따냈지만 팀 추월에서 먼저 결판을 짓지 못했다면 부담 때문에 우승을 장담하기 쉽지 않았을 터였습니다. 김민석은 "아무래도 팀 추월에서 금메달을 따서 편하게 1500m를 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맏형의 살신성인에 후배들도 멋지게 화답했습니다. 김민석과 이진영(24 · 강원도청)은 이승훈과 함께 매스스타트에 나서 선배의 4관왕에 힘을 보탰습니다. 둘은 레이스에서 독주를 펼치려던 개최국 일본의 츠치야 료스케를 추격하고 견제하며 이승훈이 역전을 펼칠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덕분에 이승훈은 처져 있었지만 츠치야를 가시권에 두면서 막판 추월을 할 수 있었습니다. 김민석은 "이진영 형과 같이 (츠치야를) 견제했다"면서 "승훈이 형이 4관왕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웃으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맏형의 값진 희생을 후배들도 고스란히 배운 셈입니다.

    23일 삿포로아시안게임 남자 매스스타트 경기 모습.(오비히로=대한체육회)

     

    이승훈도 후배들에게 고마움을 드러냈습니다. 한국 최초의 동계아시안게임 4관왕과 최다 금메달이라는 업적에 대해 "기쁘고 영광스럽고 자랑스럽다"면서도 "오늘 후배들이 도움을 줘서 4관왕을 하는 데 큰 힘이 됐다"고 공을 돌렸습니다.

    만약 이승훈이 부상 때문에 출전을 포기했다면 한국 최초의 동계아시안게임 4관왕이라는 위업은 이루지 못했을 겁니다. 사실 이승훈도 "다쳤을 때는 시즌 자체를 포기한다는 생각이었다"고 털어놨습니다.

    그러나 후배들을 위하는 선배의 마음이 이승훈을 움직였습니다. "3일 만에 통증이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상처 부위가) 당기는 느낌이 있었다"는 상황에도 부상 후유증을 이기게 만든 원동력이었습니다.

    결국 부상은 전화위복이 됐습니다. 이승훈은 6년 전 아시아 최초의 장거리 메달(5000m)과 금메달(1만m)을 따냈던 밴쿠버동계올림픽 시즌보다 더 좋은 기록을 낼 만큼 건재를 과시했습니다. 선배의 분전에 후배들도 움직였습니다. 팀 추월 금메달을 합작해낸 김민석은 매스스타트에서 이진영과 함께 이승훈의 4관왕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동계아시안게임 4관왕은 어쩌면 후배들이 이승훈을 위해 헌정한 선물인 셈입니다.

    이런 갸륵한 마음들이 내년 평창동계올림픽에 대한 자신감도 넉넉하게 가져왔습니다. 이승훈은 "원래 5000m와 1만m는 크게 생각하지 않고 팀 추월과 매스스타트에 집중하자는 생각이었는데 이번 대회를 통해 다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내년 올림픽에서 아시아에서는 전무후무한 선수로 남겠다"고 각오를 다졌습니다. 김민석도 "평창올림픽은 1500m에서 1분44초대 기록을 세운다는 목표로 훈련하겠다"라고 다짐했습니다.

    맏형의 책임감과 희생정신, 이에 감화한 후배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만들어낸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훈훈한 금메달 선순환 과정이 아시안게임을 후끈 달궜습니다. 아마도 후배들의 애틋한 마음에 이승훈의 찢겼던 정강이는 완치되지 않았을까요? 그래선지 이승훈은 24일 귀국하는 날 꿰맸던 상처의 실밥을 푼다고 합니다. 이런 뜨거운 브로맨스가 내년 평창에서도 이어지길 바라 마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金맛이네요' 이승훈(오른쪽부터), 김민석, 이진영 등 남자 매스스타트 대표팀 선수들이 23일 대회 일정을 만족스럽게 마무리한 뒤 오비히로 역 인근 덮밥 맛집에서 조촐한 만찬을 즐기고 있다.(오비히로=노컷뉴스)

     

    p.s-저를 비롯한 국내 취재진은 흐뭇한 마음으로 오비히로 오벌의 취재를 마치고 삿포로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역으로 향했습니다. 오후 7시 22분 열차가 2시간50분을 달려야 하는 까닭에 몇몇 기자들은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부타동(돼지고기 덮밥)으로 이름난 역 근처 맛집을 찾았습니다.

    공교롭게도 그곳에는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대표팀의 만찬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만족스럽게 대회를 마무리한 이승훈과 이진영, 김민석이 관계자들과 함께 먼저 숯불에 부타동을 즐기고 있습니다. 엄청난 체력 소모를 한 뒤라 선수들은 추가로 숯불에 구운 고기가 수북히 쌓인 덮밥을 주문해 부지런히 먹더군요.

    "금메달을 따낸 뒤 먹으니까 더 맛있지 않느냐"는 말에 이승훈을 비롯한 선수들은 "그렇다"며 웃었습니다. 동생들을 아끼는 선배와 그를 존경하는 후배들, 굳이 맛집이 아니어도 이들이 함께 하는 저녁이라면 어떤 음식이라도 꿀맛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내년 평창에서도 이런 훈훈한 만찬이 벌어지지 않을까요?




    '벤또도 맛있네' 열차 시간이 촉박해 국내 취재진은 이승훈 등과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하지 못하고 포장을 해와 객실 안에서 부타동을 먹을 수 있었다. 다른 집과 달리 짠맛이 덜하고 담백했다는 모 여기자의 호평 속에 전날 과음을 한 다른 기자는 역 안의 부타동집이 더 맛이 진해서 낫다는 다소 박한 평가를 내렸다. 한번쯤 먹어볼 만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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