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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동방의 항구들>… 중동 역사 속 신산한 인생



책/학술

    소설 <동방의 항구들>… 중동 역사 속 신산한 인생

    일본 소설 <묵동기담/스미다강> …에도시대의 탐미주의

     

    소설 <동방의 항구들="">의 원작 제목을 직역하면 '동방의 계단Les Echelles du Levant'이다. 이것은 과거 유럽의 여행자들이 중동에 이를 때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일련의 상업 도시들에 붙여진 이름이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 터키 스미른과 아다나, 베이루트를 경유하는 이 도시들은 오랫동안 여러 언어와 관습, 신앙이 나란히 융성한 교류의 장들이었다. 역사에 의해 서서히 만들어지고 결국에는 전복된 불안정한 세계였다. 그 속에서 수많은 인생들이 산산조각이 났다. 이 소설은 그 비극적 인생을 들여다보고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익숙한 역사이면서도 낯선 이국의 풍경들을 만나게 된다. 작가 아민 말루프는 유려하면서도 단순한 문체로 그 역사와 풍경을 훑어간다. 한 번 손에 잡으면 놓을 수 없는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19세기 말 오스만 제국의 몰락에서부터 20세기 이스라엘의 탄생과 함께 혼돈으로 굳어진 중동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을 수 있을 것이다.

    공쿠르상을 받은 작가인 아민 말루프도 레바논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정체성 문제에 깊이 시달렸다. 레바논보다 프랑스에서 더 올래 살았고 프랑스어로 집필애온 그이지만 그는 여전히 아랍인이었다. 프랑스가 식민지들에서 한 수십만의 대량 학살의 역사와 현재 프랑스 내에서 이민자들에게 보이는 오만함과 잔혹함을 보면 프랑스의 똘레랑스는 프랑스인에게만 적용된다고 평가할 수 있다. 프랑스의 '아랍인'인 아민 말루프는 이런 고뇌를 자신이 살아온 시간과 공간을 녹여서 형상화하여, 정체성과 대량학살에 대해서 현대사를 배경으로 하는 커다란 스케일의 소설 <동방의 항구들="">을 썼다.

    터키 아르메니아 학살, 나치의 홀로코스트, 나크바, 1차 중동전쟁, 레바논 내전이라는 실제 역사 속의 학살들이 왜 일어났는가? <동방의 항구들="">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중동의 혼돈, 유럽의 불안정과 테러, 세계 각지에서 급속화되는 우익화와 민족주의. 정체성과 학살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의 우리들에게는 중세보다 먼 현대의 그 역사와 그 속의 사람들을 알아야 할 의무를 지니지 않았을까?

    이 책은 영화로 제작 중이다. 〈몽상가들〉의 스타인 프랑스 배우 루이 가렐과 1997년 파즈르 국제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자인 이란 출신의 배우 골시프테 파라하니가 주연을 맡았다.

    책 속으로

    "전쟁을 저주하고 있었소.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악몽과 두려움 없이, 쫓기는 신세가 아니면서 우리가 이 거실에 앉아 코냑을 홀짝이며 다른 얘기들을 나눈다면 얼마나 좋겠소." "아시겠지만 우리가 쫓기는 신세가 아니었다면 여기, 이 아파트에 와서 함께 코냑을 마실 수도 없었겠지요." (108-109쪽)

    나치주의가 패배한 직후 히틀러가 증오했던 두 민족이, 각자 자기 민족만이 부당함의 유일한 희생양이고 따라서 권리가 있다고 확신하면서 서로 대립하고 일어나 상대를 죽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을, 그녀는 참을 수 없어 했소. 유대인은 한 민족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 즉 민족 말살 시도를 당했고 따라서 그런 일이 다시는 재발되지 않도록 결단해야 하기 때문에, 아랍인은 자신들은 유럽에서 자행된 범죄와 아무 상관이 없음에도 자신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잘못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라며 들고 일어섰던 것이오. (162-163쪽)

    하지만 젊었던 나와 클라라에게는 그 시대에 대한 환상 외에 다른 조언자가 없었다오. 회오리바람이 중동 지방에 몰아치려는데 우리는 그것을 맨손으로 막으려 했다오! 정말이지 그랬다오. 수십 년, 아니 수세기 동안 아랍인과 유대인 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을 전 세계가 그저 보고만 있었소. 영국인, 소련인, 미국인, 터키인 등 모두가 체념하고 있었소. 우리 두 사람 그리고 우리와 같은 몇 안 되는 몽상가들만 빼고 모두가 말이오. 우리는 그저 충돌을 막고 싶었소. 우리의 사랑이 또 다른 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를 바랐다오. (192-193쪽)

    따라서 나디아는 이슬람교도들의 관점에서 볼 때 이슬람교도이고, 유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유대인이오. 딸애의 입장에서 딸애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든가 아니면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을 수 있었소. 그러나 그 애는 동시에 둘 다를 선택하기를 원했소. 그렇소, 동시에 둘 다를, 그리고 다른 것들도 더 원했소. 자신에게 도달한 모든 혈통을 자랑스러워했소. 중앙아시아와 아나톨리아, 우크라이나, 아라비아, 베사라비아, 아르메니아, 바이에른에서부터 시작된 정복과 후퇴의 모든 여정들을 말이오. 그 애는 자신의 피 한 방울 한 방울을, 영혼의 한 조각 한 조각을 선별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오! (261-262쪽)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것은 단지 자살을 포기하는 것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소. 벼랑 위에서 뛰어내리려던 순간 누군가 내민 따뜻한 손을 잡고 뒤로 한 발 물러서는 것과 같은 게 아니었소. 그처럼 간단한 게 아니었다오. 그런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나는 단단한 땅이 아니라 벼랑 가, 좁은 낭떠러지 위 끝에 그것도 위스키 한 병을 마신 채 서 있는 셈이었소. 뒤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소. 왜냐하면 내가 처한 상태에서는 구원을 향해 걷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낭떠러지로 돌진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오. 우선 나는 술에서 깨어나 맑은 시야와 명료한 사고를 되찾아야 했소. 내가 두 발을 어디에 디디고 서 있는지 분명히 알도록 말이오. (271쪽)

    아민 말루프 지음 | 박선주 옮김 | 훗 | 308쪽 | 12,000원

     

    에도 시대를 그리워한 탐미주의자 나가이 가후의 소설 <목동기담 스미다="" 강="">. 이 책은 1937년에 발표한 대표작 <묵동기담>과 1909년에 발표한 단편 <스미다 강="">을 묶었다. < 묵동기담>의 주인공 다다스는 실제로 화류계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며 문단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던 나가이 가후의 모습을 담고 있다. 다다스는 급속도로 서구화되는 화려한 긴자 거리를 피해 빈민촌을 즐겨 찾고, ‘묵동(濹東)’으로 표현한 스미다 강 주변이야말로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는 진정한 ‘일본적’인 장소라며 에도 시대 문화에 대한 애착을 표한다.

    전체주의 · 군국주의로 치닫는 당시 일본에 대해 환멸과 무력함을 느낀 가후는 현실을 방관하고 과거로 회귀하여, 불확실한 미래보다 현재의 쾌락을 중시했던 에도 시대 일본인들의 삶을 좇아 탐미주의적 문학 세계로 빠져들었다. 가후는 강 위의 다리 하나하나, 골목 구석구석까지 세세하게 표현하며, 주인공의 시선을 통해 자신이 기억하고 싶었던 옛 정경을 그 자리에 박제하듯 기록한다.

    “오유키는 지쳐버린 내 마음에 우연히 들어와 그리운 과거에 대한 환상을 떠올리게 하는 뮤즈였다.” _20쪽

    <묵동기담>은 중년의 소설가 오에 다다스가 새로운 작품 <실종>을 구상하기 위해 스미다 강 근처를 배회하다가 갑작스레 쏟아진 소나기를 계기로 창부 오유키와 인연을 맺는 이야기이다. 나가이 가후의 자전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다다스는 에도 문화에 애착을 보이는데, 양장을 입은 유녀들 사이에서 드물게 옛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는 오유키는 그에게 “세상에서 버림받은 한 늙은 작가의 아마도 마지막 작품이 될 초고를 완성시킨 신비로운 구원자”이다. 하지만 미래를 함께할 것을 상상하는 오유키의 구애에는 등을 돌리고 이별을 한다.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 멈춰 서기를, 혹은 되돌아가기를 선택한 다다스의 태도는 미래보다 순간을 추구하던 에도 시대의 모습 그 자체를 상징하는 듯하다.

    <스미다 강="">은 어느 시대나 존재했을 부모 자식 간, 세대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데, 이 작품 역시 나가이 가후 특유의 에도 정서에 대한 아쉬움을 담고 있다.

    조키치는 사람이란 나이가 들면 젊은 시절에 경험했던 번민과 불안을 까맣게 잊고, 그 아래 세대의 처지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잔소리나 늘어놓는 편리한 존재라는 생각을 했다. 또한 나이를 먹은 사람과 젊은 사람 사이에는 도저히 통할 수 없는 어떤 괴리가 있다는 생각도 절실하게 들었다. _169쪽

    전통 기예인 도키와즈를 가르치는 오토요는 아들 조키치를 공부시켜 버젓한 회사원으로 길러내기 위해 홀로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 그러나 조키치는 어머니의 바람과 달리 공부에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고 자유로운 예술가의 삶을 동경한다. 소꿉친구이자 짝사랑하던 이웃집 오이토까지 게이샤가 되겠다고 나서자 공부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고 어머니와 대립하게 된다. 조키치는 젊은 시절 방탕하게 놀았고 예술가로 살아가는 외삼촌마저도 어머니의 입장에서 자신을 설득하는 것을 보고 어른이 되는 것에 환멸감마저 느끼며 좌절한다.

    가후는 1911년, 천황 암살 미수라는 죄명을 씌워 사회주의자들을 처형하는 사건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침묵하는 작가로서 부끄러웠던 가후는 현실과 거리를 두고, 관능과 아름다움에 탐닉하며 현실의 고통을 잊으려는 탐미주의로 돌아섰다. 그는 나약한 예술가로서 과거(에도 시대)로의 회귀를 택했다. 이러한 가후의 삶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가 격변하는 20세기를 감당하는 한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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