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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 아수라장 생존기 '내 이름은 유가족'



문화 일반

    국가폭력 아수라장 생존기 '내 이름은 유가족'

    [치유의 기록 '416기억저장소' ③] "7일 만에 찾은 아이, 잠자다 나온 것 같았죠"

    9일은 세월호 참사 발생 1000일이 되는 날입니다. 304명의 귀한 목숨을 한순간에 앗아간 사건의 진실은 여전히 세월호와 함께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습니다. CBS노컷뉴스는 세월호 참사가 빚어낸 한국 사회의 깊은 상흔을 치유할 기록을 다듬어 가는 '416기억저장소'를 조명합니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① 천일 동안 켜켜이 새긴 눈물…진실 인양 날갯짓
    ② "도언아, 엄마 다짐 멀리서나마 듣겠지…보고 싶다"
    ③ 국가폭력 아수라장 생존기 '내 이름은 유가족'

    세월호 참사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협의회 416기억저장소는 지난 2015년 6월부터 구술증언 수집에 들어가 1차로 60여 명의 구술을 마쳤다. 이 가운데 먼저 유가족 10명의 구술증언록을 10권의 책(권당 100쪽 내외)으로 엮어냈다. 416기억저장소는 불필요한 논란이 일 것을 우려해 경기 안산시 고잔동에 있는 저장소를 찾는 시민들에 한해 구술증언록을 공개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필사로만 외부에 옮겨갈 수 있다.

    세월호 참사 1000일을 맞아 10권의 구술증언록에서 발췌한 유가족들 증언을 재구성하면서, '유가족'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고 그를 인터뷰하는 형식을 취했다. 참사로 혈육을 잃고 깊은 실의에 빠진 국민들을 위로하기는커녕, 상식에서 벗어난 폭력을 자행하며 그들을 격리하려 했던 박근혜 정권. 그 비뚤어진 권력의 민낯 앞에서 유가족들이 겪었을 고통과 좌절, 분노의 크기는 절대적이라는 판단에 따랐다. 증언록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접했던 '(구술자 울음으로 인터뷰 중단)'이란 지문 역시 그 단적인 근거다.

    지난해 11월 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 퇴진 촉구 시국선언에 나선 세월호 희생자 가족 영석 엄마 권미화 씨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본 구슬증언은 416사건에 대한 참여자들의 경험과 기억을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이후 진상규명 및 역사 기술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지금부터 유가족 씨의 증언을 시작하겠습니다.'

    - 이번 구술증언에 참여하게 된 동기를 설명해 주세요.

    "동기라기보다는… 제가 사실 2014년 4월 16일부터 팽목항에 있을 때 중간중간 기억 안 나는 부분이 있어요. 중요한 건 페이스북에 기록을 좀 했어요. 그리고 엄마들 보고 자꾸 기록하라고 했죠. 시간이 지나면 느낌도 달라지잖아요. 그래서 막 글을 쓰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지금도 생각 안 나는 게 많아요."

    "이 나라가 진짜 정상적인 나라였다면 사고 발생 원인이라든지 관련된 책임자들이 철저히 규명되고 처벌 받았어야죠. 피해자들 입장에서 본다면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사회에 복귀해, 아이들은 없지만 건강한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게 정상적인 나라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상 현 시점에서 돌아보면 전혀 그렇게 된 건 없고, 오히려 정부가 막고 있잖아요. 이런 부분에 대해 안타까움을 갖고 있었죠. 정확하게 기록하고 조금이나마 알릴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된다면 그 자체로 못난 애비로서 역할은 하는 게 아닌가 자위하는 차원에서 참여했습니다."

    - 세월호 참사 직후 진도 팽목항에서는 어땠습니까.

    "거의 모든 사람들이 경험한 사실이겠지만, 이 감시 당하는 부분 말이죠. 정보관들이라든지 사복 경찰이라든지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 있었어요. 녹취를 했는지 영상을 찍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감시를 당했죠. 심지어 (유가족이) 세 명 정도 모여 얘기하고 있으면 어떤 사람이 슬그머니 와서 옆에 서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분위기가 참…. 그 사람 왔다고 얘기를 계속 하기도 그렇고, 안하기도 그렇고… 그러니 묻는 거죠, '당신 누구냐'고. 그러면 '나는 누구 삼촌'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고, '어디에서 여러분 도와 주려고 온 목사'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고. 하여튼 대한민국에 그렇게 많은 삼촌과 목사님이 계신 건 처음 봤으니까요."

    - 아이를 만나러 갔던 과정을 말해 주실 수 있나요.

    "저하고 와이프하고 시신안치소에 들어갔는데, 반대 방향으로 눕혀 놨더라고요. 들어가는 데서 보면 발이 우리쪽으로 놓여 있고, 머리는 저 바다 쪽으로 눕혀 놨더라고. 그 거리가 꽤 되는데, 식별하기도 힘든데 우리 와이프가 딱 보더니 찾아가서 안더군요. 그때 봤을 때 시신 상태는 정말 잠만 자다 나온 아이… 7일 만에 찾았는데 잠만 자다 나온 아이처럼 보였어요."

    박근혜 대통령 퇴진 제7차 촛불집회가 열린 지난달 1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세월호 희생자를 기리는 의미로 304벌의 구명조끼가 놓여져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

     

    - 참사 이후,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어떻습니까.

    "허허. 땅을 치고 통곡할 일만 있지. 글쎄…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너무 좀 막연한 것 같은데… 모르겠습니다. 저 같은 경우 제도권 밖으로 많이 밀려난 듯해요. 이전까지는 그래도 꿋꿋하게 생활하면서 경제적으로도 가장 윤택해지는 그런 상태였죠. 아이는 없고 슬픈데다 이 상황에서 다시 제도권에 진입하는 건 쉽지 않죠. 그런 면에서 많은 비애를 느끼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우리들한테 위안을 줬던 건 많은 국민들과 시민들이에요. 그분들이 같이 등도 두드려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메시지도 많이 보내 주셨고, 대중집회 같은 데서 같이 호응해 주셨어요. 지금도 정부의 잘못하고 있는 행태에 대한 질타에 같이 동참해 주시고, 호소해 주시죠. 사실 이것 빼놓고 보면 위안이라는 얘기는 기억이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분들한테는 무한한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요."

    -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요.

    "음… 아, 지난 2015년에 진행했던 19박 20일 도보행진할 때요. 어느 지역에서 도보를 하는데 그러시더라고요. 하… 자식 좀 그만 팔아먹으래요. 다 빨갱이래요, 우리 보고. 빨갱이 새끼들 지나간다고, 자식들 그만 팔아먹으라고, '느그 자식들만 죽었냐'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우리가 빨갱이면, 수학여행 가다 죽은 아이들 부모가 빨갱이면 당신도 빨갱이다. 우리는 부모다. 엄마아빠다. 당신도 집에 가면 어느 자식의 부모일 것이고, 할아버지일 거 아니냐. 그럼 당신도 빨갱이'라고요. 반대 의견을 내고 바꾸자고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게 종북, 좌파까지는 괜찮다고 봐요. 그런데 빨갱이라는 단어가 입혀지면 대한민국에서는 살 수 없잖아요."

    - 피케팅할 때 사람들 반응은 어땠습니까.

    "장소마다 조금씩 달라요. ○○는 지역이 작은데도 관심을 많이 가져 주시고, 어제 □□ 같은 경우 대놓고는 얘기 안하는데 지나가면서 들으라는 식으로 많이 하더라고요. 둘이 가는 사람들은 대화로 '아직 해결 안 됐어?' '왜 안 돼! 다 됐는데 욕심 때문에 그러지'라는 식으로요. 할아버지 같은 경우는 '지겨워 지겨워' '미쳤어 미쳤어' 이런 소리 들리게 하면서 가더라고요. (그런 이야기 들으면서) 처음에는 많이 속상했죠. 아휴… 그렇지 않아도 오면서 차 안에서 같이 갔던 분들한테 그랬어요. '무관심보다는 낫다'고요. 애써 그러면서 왔어요."

    - 참사 1주기였던 지난 2015년 4월 16~18일 연행 당시 상황을 기억하십니까.

    "그해 4월 11일 광화문에서 (경찰이) 처음 캡사이신을 발사했어요. 11일에는 경찰한데 맞고 그런 건 없이 캡사이신만 맞았어요. 우리가 청와대로 행진하려 할 때, 그때 막으면서 그랬죠. 16~18일처럼 우리한테 폭행을 가하고 그러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16, 17일에도 신체적으로 폭행을 가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어요. 끌어내기만 했어요. 그런데 18일날, 그날 완전히… 왜냐하면 계속 고립시켰으니까. 화장실도 못 가게 하고…. 경찰이 버스 빼면서 화장실 들인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라 완전히 고립시키려는 거였죠. 우리와 시민들이 합류 못하게 경찰들이 다 막은 거예요. 그래서 엄마들을 한 분 한 분 경찰들이 연행해 간 거예요. 말 그대로 무슨 범죄자를 체포하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앞이 안 보이는데 과격하게 무릎 꿇리고 팔을 뒤로 꺾고, 머리는 바닥에, 그리고는 저를 묶더라고요. 그 상태에서 버스로 끌려간 거예요. 가면서 제가 가만히 있었겠어요? 난리를 쳤죠. 젊은 기동대 애들이 저한테 막 욕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야 내가 너 같은 아들이 있어. 어디서 엄마 같은 사람한테 욕을 하냐'고 했더니 또 막 욕을 하더라고요. 두 명이 날 잡고 갔는데, 그래도 한 명은 '어머니 진정하시라'고, '어머니 자꾸 이러시면 더 다치니까 진정하시라'고 하더군요. 나머지 한 명은 막 욕하고 있고요."

    박근혜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7차 대규모 촛불 집회가 열린 지난달 10일 오후 광화문광장 인근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이 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

     

    - 무슨 생각하세요.

    "내가… 내가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실을 알고도 행동하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우리 아이가 희생된 거 같고… 더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거든요. 그래서 저번에 고향 친구들 만났을 때 그 얘기를 했어요. '야, 우리 그때 5·18 진실을 알았잖아.' '그래, 그때 우리 성당에서 들려줘서 알았지.' 다들 그냥 침묵하고 있었던 거죠. (계엄군이) 어떻게 행동할지 모르니까 다같이 침묵하고 있었던 거죠. 광주도 자국민을 죽인 학살이잖아요. 진짜 학살인데도 아직까지 못 밝히고 있는 거예요. 증거가 있어도 그렇잖아요. 그런데 하물며 우리 아이들은 바다에서 희생 됐기 때문에 더 힘들 수도 있어요. 아마 우리 죽을 때까지 싸워도 진실이 안 밝혀질 수도 있어요. 그래도 끝까지 밝혀야죠. 내 아이를 위해서… 다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 직장에 다시 복귀하는 게 힘드셨을 텐데요.

    "복귀해 일하는데 많이 힘들더군요. 첫째는 이렇게 있다가 내가 다가가면 사람들 말이 딱 끊기는 거예요. 그리고 내 눈치를 보더라고.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자꾸 반복 되니까,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저 놈이 지 새끼 앞세워 놓고 무슨 또 돈 벌려고 직장을 다니나'라고 욕하지 않을까 혼자 생각하는 거죠. 진상규명 활동에서도 금요일부터는 시간을 낼 수 있는데, 주중에는 참석 못하니 답답하고,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그래서 '연말까지만 직장 다니자'고 마음을 정해 놓고 11월 돼서야 집사람한테 얘기를 했어요. 애 엄마가 생각 외로 흔쾌히 받아주더군요. 허허."

    - 진상규명, 어떻게 이뤄져야 할까요.

    "진상규명? 딱 하나, 정부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면 되는 거죠. 그 다음이 책임자 처벌이고요. 일단은 이 정부가 잘못했다는 걸 시인하는 게 진상규명 아니겠어요? 그런데 이 정부에서는 잘못을 시인할 수가 없지. 만약 시인하게 되면 이 정부 자체가 없어져 버리는 거니까요. 그러니 지금 죽어라 모르쇠로 일관하는 거 아닙니까. 자기네들이 존재하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말이죠. 그건 다 알고 있잖아요.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진상규명, 우리가 짐작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 짐작이 사실로 드러나게 되면 국민적 분노는 굉장할 겁니다. 우리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써나가는 건 분명한 것 같아요. 지금까지 진실을 밝힌 게 없잖아요. 다 꼬리자르기 식이었고 끝까지 파헤친 적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그걸 할 거고, 우리 부모가 못하면 자녀가 할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그걸로 만족하는 것 같아요. 최순실 혹은 최순득에 의해서 아이들을 구하지 않았고, 이런 게 밝혀진다면 더 기가 막힌 거죠. 국가는 없었고, 무당 같은 누구의 딸에 의해 한 나라가 좌지우지 되는 이 처참한 꼴, 그런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게 의미 있는 거겠죠. 만약 그 기록이 남는다면 그 이후에 처벌해야죠. 철저하게 처벌하면 그런 계략을 꾸밀 생각 안하겠죠. 지끔까지 처벌을 안했기 때문에, 다 그냥 그냥 넘어갔기 때문에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는 거라고 봐요. (진상규명은) 역사를 바꾸는 것, 그 의미가 가장 큰 것 같아요."

    - 하늘의 별이 된 아이를 떠올리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그 아이는 현재 어떤 의미인가요.

    "내 삶의 전부죠. 이것도 아이 옷이고, 집에 들어가면 아이 신발이 놓여 있어요. 일부러 한가운데 놨어요. 사진도 붙여 놓고 말이죠. 엄마인 저도 이 흘러가는 상황에 따라 잊혀질 때가 있더라구요. 안 잊혀지면 거짓말이고,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거죠. 아이는 지금 곁에 없지만 내 삶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에요. 아이 누나의 삶 역시 그 영향력 안에 있을 거예요. 예전처럼 다른 아이들이 추구하는 성공만 마냥 바라보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해요. 가족의 삶을 다 바꿔 놓은 셈이죠. 그러니 삶의 전부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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