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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재단 폭력사태의 서막…워커힐에서 무슨일이?



사건/사고

    육영재단 폭력사태의 서막…워커힐에서 무슨일이?

    "육영재단 폭력사태는 정치적 계산에 의한 사건"

    (자료사진)

     

    "겨레의 꿈이요 나라의 보배인 어린이들의 그 빛나는 눈동자...(중략)... 어린이들의 티 없는 소망들을 교육적으로 잘 유도해 주는 것은 곧 우리 어른들의 의무요 책임인 것입니다"

    육영수 여사가 1972년에 쓴 글귀다. 어린이 교육에 대한 애정이 잘 묻어나는 어록으로 육영재단 홈페이지에 소개돼 있다.

    하지만 육영재단은 육 여사의 바람과 달리 2007년 조직폭력배들의 전쟁터가 됐다.

    어둠을 틈타 몰려든 조폭들, 깨진 유리창, 난무하는 욕설, 터져 나오는 비명, 심지어 사제 폭탄까지.

    CBS노컷뉴스 취재결과, 육영재단의 비극은 2007년 워커힐 호텔부터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2007년은 제17대 대통령 선거가 열렸던 해였다.

    ◇ 2007년 워커힐, 박근혜 친인척 총집합

    왼쪽부터 박지만 EG회장, 박근혜 대통령,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 (자료사진)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은 2007년 초 친인척 일가를 모두 서울 워커힐 호텔로 초대했다.

    100명이 넘는 친인척들이 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중에는 2011년에 피살된 박용철 씨도 포함됐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식사를 대접하며 대권 출마의 뜻을 밝혔고,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의 경선을 앞둔 상황인 만큼 '행동거지'에 신경 써달라는 취지의 말을 전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전 시장과의 경선이 치열할 것으로 보고 친인척 비리나 구설수를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현 더불어민주당)은 인기가 크게 떨어진 터라 당내 경선에서 이기면 대통령 당선까지 손쉽게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대선으로 가는 걸림돌'로 최태민 일가를 꼽기도 했다.

    1987년 최태민 일가가 육영재단 운영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논란이 된 바 있어서다. 이후에도 최 씨를 둘러싼 이런저런 입소문은 계속됐다.

    ◇ "미얀마에서 총으로 쏴 죽이자" 신동욱 암살작전

    공화당 총재 신동욱 (사진=공화당 총재 신동욱 트위터 캡처)

     

    하지만 화살은 동생 박근령 육영재단 이사장의 남편 신동욱 씨에게로 향했다.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최씨 일가는 '가족'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신동욱은 2014년 공화당을 창당한 인물로, 14살 연상인 박근령 이사장과 2007년 2월 서울 관악산에서 약혼했다.

    박 대통령이나 박지만 EG회장은 신 씨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으로 알려졌다. 특별한 이력도 없는 신 씨가 박정희 전 대통령 집안에 들어온다는 것 자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실제로 두 남매는 2008년 10월에 열린 두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약혼식을 치른 신 씨가 육영재단 운영까지 깊숙하게 개입하고 육영수 여사가 심은 나무들까지 베면서 구설에 오르자, 박 대통령 측에서는 결국 '신동욱 제거작전'을 계획하게 됐다.

    당시 상황에 깊숙이 관여했던 B씨는 "박 의원 참모진들은 '신동욱이 표를 깎아 먹는다'고 판단했다"고 전했다.

    애초 신 씨를 미얀마로 불러들여 총으로 사살할 계획이었다. 박용철 씨는 이를 위해 미얀마로 현장답사까지 다녀온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내부 논란 끝에 계획은 변경됐다. 신 씨를 살해하는 대신에 중국으로 유인해 마약 복용에 미성년자 성매매 혐의로 감옥에 넣기로 했다.

    박용철 씨는 2007년 7월 신 씨를 중국으로 데려가 함께 마약을 복용하고 미성년자와의 성매매를 알선한 뒤 공안에 신고했다. 하지만 신 총재가 중국 공안 조사에서 자신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위'라고 밝혀 풀려나게 됐다.

    이후에도 국내에서 신 총재를 마약 혐의로 감옥에 보내려 시도했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검사결과 음성반응이 나오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박 대통령 경선캠프에서 일했던 한 관계자는 "캠프에서 필요 이상으로 신 씨에 대한 논의를 많이 해 불만의 목소리도 나왔었다"고 전했다.

    ◇ "육영재단 강탈해 신동욱 떼어 놓자" 최후의 카드

    신 총재가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면서 박 대통령 측 참모들의 고민이 깊어졌다.

    떼어내려 했던 신 총재가 오히려 암살 시도의 배후에 박 대통령 측 인사들이 관련됐다는 것을 아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또 박 대통령은 2007년 8월 경선에서 패배하긴 했지만, 여전히 유력 차기 대권 주자로 '방해요소'인 신 씨를 제거하는 일은 중요했다.

    고심 끝에 박 의원 측과 참모들은 '육영재단 강탈'이라는 카드를 꺼냈다. 육영재단을 박근령 이사장으로부터 빼앗아 신 총재가 박근령 이사장 곁에 있을 만한 이점을 없애겠다는 계산이었다.

    결국 폭력사태가 벌어지기 하루 전날 밤인 2007년 11월 27일 박용철 씨와 임두성 당시 한빛복지협회장 등 7인이 모였고, 다음날 육영재단은 결국 조폭들의 전쟁터가 됐다.

    박근령 이사장 측에서도 육영재단을 재탈환하기 위해 조폭들을 동원했다. 이런 악순환은 한 달 가까이 지속됐고, 서로 뺏고 빼앗기는 혈투 과정에서 사제폭탄까지 나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B씨는 "육영재단 폭력사태는 박지만 등의 개인적인 욕심이 빚은 사건이 아니라 철저하게 정치적 목적에서 계획된 폭력사건"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수 조원에 달하는 육영재단의 부지도 폭력사태의 원인이 됐을 것이라는 분석도 육영재단 주변에서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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