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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깎이 한글학교 어르신들, "지금이라도 글 배우니 질겁다"



책/학술

    늦깎이 한글학교 어르신들, "지금이라도 글 배우니 질겁다"

    신간 '보고 시픈 당신에게: 마음으로 쓴 시와 산문 89편'

     

    '보고 시픈 당신에게'는 전국의 한글학교에서 늦깎이로 한글을 배우고 있는 어르신들의 시와 산문 89편을 엮은 책이다. 뒤늦게 글자를 익히면서 느끼는 기쁨과 안타까움, 가족에 대한 사랑, 고단하고 애틋했던 삶이 비뚤배뚤한 몇 줄 작품에 담겼다. 손글씨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원문을 그대로 옮기고, 저시력자들을 위해 큰 글자로 다시 한 번 정리했다.

    6연 전부터 몸이 아파요
    백병원에서 파키스병이라고 함이다
    땀이 비오더시 헐러내림니다
    옷 두 벌 새 벌식 배림니다
    온 몸이 떨림니다
    그래서 글이
    삐둘삐둘합니다
    부끄럽지 안아요
    잘몬한 기 업서요
    _ 「글이 삐뚤삐뚤」 전문

    열한 살 때
    언니는 밤마다 실그머니 나갔다
    알고 보니 마을 해관에 글 배우러 다니더라
    나도 가고 시펐다
    언니 나 좀 대꼬가라 하니
    밤에는 늑대가 나온다며
    언니는 나를 띠 놓고 갔다
    언니 그때 나 좀 데꼬가지 하니
    언니가 웃는다
    지금이라도 글 배우니 질겁다
    - 「언니 마음」 전문



    대학 진학률이 80%에 육박하는 현실이지만, 아직도 기본적인 읽기와 쓰기가 불가능한 인구는 성인 100명 중 6명에 달한다(국가평생교육진흥원 조사, 2014 통계청 승인). 여러 사정으로 공부의 때를 놓쳤다. 부모의 잘못을 묻기도 어렵다. 나이 들어서는 자식들 뒷바라지하다 60~70이 훌쩍 넘었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공부할 곳이 마땅치 않다. 그러면서도 ‘모두 내 탓’으로 돌리고 살았다.
    “얼마나 더 산다고 이제 와 공부야?”라는 핀잔을 무릅쓰고 한글교실을 찾아 더듬더듬 한글을 배운다. 태어나 처음 내 이름 석 자를 쓰며 눈물짓는다. 남편에게 자식에게 편지를 쓴다. 생각처럼 손이 따라주질 않아 글자에는 떨림이 가득하다. 그래도 원망보다는 고마움을 담았다. 그렇게 꼭꼭 눌러 썼는데 편지를 받아야 할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여보, 미안해요. 내가 빨리 글을 알았더라면 당신 이해하고 좋은 안내, 좋은 친구가 되어 줄 수 있었을 것을. 어느 책을 읽다 보니 ‘후회 없이 삶을 산 사람은 마지막 가는 길이 편안하다‘라는 글이 있더군요. 얼마나 더 살지는 모르지만 후회 없이 살다가 편안한 마음으로 당신 곁으로 갈게요. 우리 만나서 그동안 못 다한 이야기 많이 해요. 나 많이 변했어요. 그래도 꼭 알아봐주세요.
    _ 산문 「보낼 수 없는 편지」 중에서

    먼저 떠난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 며느리에게 차마 전하지 못한 메모, 돈이 없어 자신을 판 아버지를 원망하기보다 그리워하는 모습은 이내 눈물을 자아낸다. 술에 절어 사는 남편에게 잔소리를 한바탕 퍼붓다가도 콩물을 말아주고, 관광지에 실수로 두고 온 수박이 아까워 무릎을 치는 할머니의 모습에서는 자꾸만 웃음이 난다.

    나는 어제 친구하고
    소백산 청록동굴 갔다
    그런데 아리랑 호텔 앞에
    수박을 놓고 갔다
    아이고 아까워라
    돈이 사만 원인데
    _ 「관광을 갔다」 전문

    자신의 삶을 시와 산문으로 고백하는 일은 비문해자들에게 그야말로 기적이다. 손자와 함께 동화책을 읽고, 혼자 은행 업무를 보는 모든 순간이 기쁨이 된다. 답답함이 사라지고 고통이 희망으로 바뀐다. 평균 연령 69세, 아픈 무릎을 이끌고 한글교실로 나서는 분들의 목소리는 그래서 한결같다.

    항상 배우지 못해서
    배운 사이 부러웠어요
    시집가서 신랑한테
    행복도 받지도 못하고 살았어요
    내가 배우지 못해서 한니 맺혔다
    지금이라도 배우니 행복함니다
    오늘은 공부방에서 공부하니 좋슴니다
    _ 「하글 배우고 십다」 전문

    문해교육은 단순한 ‘문자 습득’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게 된 비문해자들은 이제 모임을 만들고 사회 참여에 나선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이야기한다. 문해교육은 한을 풀고 자존감을 높이는 과정의 첫 단계다. 반평생 모르고 살았던 ‘꿈’이라는 단어를 찾는 일이다.

    저는 사상구 삽니다
    제가요 공부로 하고 보니
    부산 시내가 다 보이는 것 가타요
    앉자도 공부 누도 공부
    우리반 공부 다 잘해요
    얼마나 좋은 줄 몰나요
    이 글 쓴다고 삼 일 걸였서요
    _ 「좋은 공부」 전문

    국가 지원이 필요한 문해교육 기관 중 실제 지원을 받는 곳은 1/3에도 미치지 못한다. 지원을 받는다 해도 예산이 부족해 자원봉사자와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운영되는 실정이다. 학교가 문을 닫거나 교사들이 현장을 떠나는 경우도 있다. 늦깎이 학생들은 “아직도 배울 게 많은데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고 한탄한다. 최소한의 교육으로 뒤늦게 희망을 보게 된 삶, 문해교육 현장에 있는 교사와 학생들의 바람은 ‘마음껏 공부’ 하나뿐이다.

    나의 눈, 손, 입 치료하기 위해
    한글교실 입학하여 공부하니
    씻은 듯이 말끔히 나았습니다.
    나와 같이 공부 못하여
    애만 태우고 있으신 분이 있다면
    용기 내시어
    저와 같이 나와서 공부 하세요.
    공부는 힘이 나게 합니다.
    _ 「공부는 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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