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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학술

    백수린 소설집 '참담한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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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백수린이 두번째 소설집 '참담한 빛'을 펴냈다. 소설 10편이 실린 이번 소설집에는 2015년 제6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여름의 정오」와, 같은 해 8월 문지문학상 ‘이달의 소설’에 선정된 「첫사랑」이 함께 묶였다.

    표제작 「참담한 빛」에는 두개의 세계가 공존한다. 영화잡지 기자로 일하는 ‘정호’는 영화제 참석차 내한한 다큐멘터리 감독 ‘아델 모나한’을 인터뷰하기 위해 그녀를 만난다. 어렵사리 성사된 인터뷰 자리에서 정호는 아델이 터널공포증을 앓게 된 연유에 대해 듣게 된다. 아델이 머뭇거리며 힘들게 이야기를 이어나갈 때 정호는 자기에게 머물렀던 잠깐의 행복과 어느날 돌연 얼굴을 바꾼 불행을 떠올리고 있다. 6개월이 된 아이가 아내의 배 속에서 숨을 멈춘 뒤 그들 사이가 어떤 식으로 변해갔는지, 아내가 느꼈을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한 정호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소설은 정호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준다. 이 소설의 결정적 장면은 아델의 공포증이 정호의 것으로 치환되는 순간일 것이다. 두 인물을 ‘빛’이라는 매개를 통해 겹쳐 볼 수 있는 장면 또한 의미심장하다.

    박새 한마리가 날아올랐다. 그 뒤에 줄지어 선 높다란 나무의 우듬지 위로 참담하리만큼 눈부신 햇빛이 폭설처럼 쏟아져내렸다. (…) 그 순간이었다. 알 수 없는 공포가 그의 뒷덜미를 내리친 것은.(「참담한 빛」 180면)

    아델은 빛 한복판에서 치유받았고 정호는 폭설처럼 쏟아져내리는 햇빛 아래에서 “알 수 없는 공포”를 처음 느낀다. 그것은 배 속에 죽은 아이를 품고 “완벽한 빛의 한가운데”(170면)에서 산책하며 행복해하던 아내가 후에 느낄 고통을 정호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시작된 불행과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이렇듯 백수린은 타자의 고통에 예민하게 귀 기울이는 작가다. 「여름의 정오」는 ‘나’가 스무살 잠시 머물렀던 빠리에서 만난 열살 연상의 일본인 ‘타까히로’를 10여년 뒤 같은 장소에서 떠올리며 시작되는 이야기다. 빠리의 묘지에서 그와 데이트했던 장면처럼 그들 사이에는 묘하게 죽음의 이미지가 어른거리지만 그때가 ‘나’에게는 인생의 정오와도 같았을 것이다. 그런 한창때를 그리면서도 이 소설에는 마치 배경처럼 일본의 사린가스 테러와 9·11 테러, 섬유노동자들의 죽음과 이에 항의하는 시위 장면이 등장한다. 작가는 이러한 장면을 인물이 가는 길 곳곳에 배치하며 소설 속 그들이 겪는 고통이 세계의 비참과 무관하지 않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작가는 한편 청춘의 서사를 그리는 데도 탁월한 감성을 발휘한다. 「첫사랑」은 대학 시절 짝사랑했던 J선배를 오랜만에 만나기로 한 날 입을 새 원피스를 사기 위해 백화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은 ‘나’가 노동하는 틈틈이 대학 시절 J선배와 러시아문학을 공부했던 과거의 이야기가 끼어드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나’는 러시아로 유학을 다녀오고 대학원에 진학하지만 J선배와도 연락이 끊기고 학교는 구조조정으로 학과를 폐쇄할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나’는 자본의 최전선과도 같은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J선배가 결국 어떤 식으로 망가졌는지 알게 된다.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질 4월의 눈을 맞으며”(122면) 선배와 걸었던 기억은 모두 옛날 일이 되어버렸고 ‘나’는 “문득문득 나의 존재가 지닌 밀도라는 것이 얼마나 희박한가 하는 생각”(110면)을 하며 지낼 뿐이다.

    이러한 청춘의 불투명함은 「스트로베리 필드」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쉽사리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방황 또한 충분히 의미있고 정당하다고 말해주는 소설의 마지막 대목은 큰 울림을 준다. 감정의 실체를 설명해낼 수 없는 어떤 순간들의 문제가 결코 청춘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우리 모두 알기 때문이리라.

    우리의 안은 어째서 이토록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어두운 걸까.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텅 빈 나무 속처럼.(「스트로베리 필드」 35면)

    작가는 이방인처럼 살아가는 고독한 사람의 윤리를 그만의 방식으로 촘촘하게 그려낸다. 독일에서 태어난 「북서쪽 항구」의 ‘레나’는 처음으로 엄마의 고향을 찾았던 어린 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낯선 항구도시, 누군가를 만나러 간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길목에서 갑자기 어떤 노인이 개를 걷어차기 시작하고 그녀는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설움에 복받쳐 엄마에게 독일로 돌아가자고 애원한다. 그런 ‘레나’에게 엄마가 말한다. “그런데 넌 독일에서 엄마가 어떨지 생각이나 해봤니?”(238면) 레나는 엄마가 느꼈을 고독을 그 낯선 항구도시의 풍경으로 대신해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그날의 정황과 풍경을 세세하게 늘어놓는다.

    어디에도 미래가 없다면 차라리 자기 나라에서 사는 게 낫지 않아? 이방인으로 평생 사는 건 외로운 일이야. 내 말에 짧은 침묵을 두고, 그가 말한다. 자기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것보다 더 외로운 일은 없어.(「스트로베리 필드」 78면)

    「스트로베리 필드」의 ‘주드’는 자기 나라에서조차 스스로를 이방인이라 생각한다. “외국어로는 모국어로 하기 힘든 이야기도 훨씬 더 쉽게 털어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77면) 깨달은 소설 속 인물처럼 그들은 삶 속에서 소외되어 받은 상처를 내밀하게 풀어놓는다.

    이뿐 아니라 「시차」에는 어릴적 네덜란드로 입양된 ‘빈센트’, 「중국인 할머니」에는 70여년간 화교로 살아온 ‘새할머니’, 「높은 물때」에는 베네찌아에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제’와 ‘윤’이 등장하지만, 이렇듯 꼭 타국을 배경으로 하지 않더라도 이 이방인 의식은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해서 이 소설집의 마지막을 장식한 「국경의 밤」의 마지막 대목, “갑자기 쏟아지는, 내 몫이 아닌 것만 같은 빛”을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에 처음 발을 딛는 ‘나’의 서사는 백수린 소설의 다음을 기대하게 만든다. 그는 “다가오는 밤을 채우는 소리와 향기”(299면)에 대한 또다른 말을 품고 우리에게 올 것이다.

    백수린 지음 | 창비 | 316쪽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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