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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의 맛] 먹고 놀던 며느리가 '바싹불고기' 원조집을?



생활/건강

    [장사의 맛] 먹고 놀던 며느리가 '바싹불고기' 원조집을?

    '역전회관' 김도영 사장

    외식시장의 전설로 불리는 사장님들이 들려주는 '장사의 철학', 그들의 이야기가 "장사나 해 볼까?" 생각하는 창업 꿈나무들과 장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700만 자영업자들에게 장사의 대한 마음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칼럼을 시작한다. [편집자 주]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기차역이나 터미널에 있는 식당은 가지 말라'는 말이 있다. 늘 뜨내기 손님으로 붐비고 음식 맛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용산역을 이용하는 전라도 미식가들은 서울에 볼 일이 생기면 꼭 들르는 역전 식당이 있다. 바로 '역전회관'이다. 촌스럽기도 하고 정겹기도 한 이름 '역전회관'은 바싹불고기란 메뉴를 처음 세상에 알린 곳이다. 소고기를 양념으로 숙성시켜 직화로 바싹 구워내는 '바싹불고기'는, 가능한 한 수분과 지방을 모두 날린다. 오로지 고기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양도 꽤 된다.

    ◇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역전회관의 모태는 1928년으로 거슬러 간다. 김도영 사장의 시할머니인 故 김막동 할머니가 전남 순천에서 설렁탕, 수육, 불고기를 주 메뉴로 한 호상식당(1928년~1958년)이란 밥집을 하셨는데 그 지역에서는 맛집으로 꽤 유명세를 탔다고 한다.

    '역전회관'의 창업주이자 김도영 사장의 시아버지인 신진우 씨는 서울대 농대를 나왔지만 하는 사업마다 엎어졌고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1962년 서울 용산역 앞에 가게를 내고 '역전식당'이라는 간판을 걸었다. 고춧가루나 고추장이 들어가지 않는 선짓국이 주 메뉴였다.

    별미로 주물럭이 있었는데 식당의 주 연료가 연탄불이던 시절이라 가게는 연탄불에 주물럭 굽는 냄새와 연기로 숨 쉬기 조차 어려웠다. 부부는 갖은 궁리를 하다가 묘안을 낸다. 주방에서 센 불에 고기를 구워서 내기 시작한 것. 이것을 먹는 손님들이 "국물도 없이 바싹한데?" 해서 이름이 붙여진 '바싹불고기'다.

    글자 그래도 '바싹' 구워 낸 바싹불고기는 무엇보다 굽는 기술이 중요하다. 주문이 들어오면 석쇠에 고기를 얇게 펴서 가장 센 불로 재빨리 뒤집어가며 굽는 것이 맛의 비결이다. 불향과 식감이 그대로 살아있다. 굽는 기술이 없으면 고기가 타기 십상이고 불이 약하면 육즙이 빠져나간다.

    이후 역전식당은 바싹불고기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고, 1980년대 가게를 확장하면서 맏아들 신한식 씨가 일손을 돕기 시작했다. 허드렛일을 시작으로 모든 노하우를 터득한 뒤 1990년에 가게를 물려받았다. 이후, '역전식당'은 '역전회관'으로 이름까지 확장했다.

    ◇ 먹고 놀던 며느리가 식당을 이어받는다고?

    김도영 사장은 원래 전업주부였다. 용산 시절에는 밥만 달랑 먹고 오는 손님에 불과했다.

    2008년 용산역 재개발사업이 추진되면서 용산 가게가 문을 닫을 때 시부모님은 식당을 접으려고 했다. 50년 이상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온 고마운 식당이었지만, 그만큼 힘겨운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국으로 유학을 간 김도영 사장의 아들이 복병이었다. 영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군 복무를 위해 한국에 온 아들은 사뭇 진지하게 자신이 식당을 이어받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유학 보낸 아들이 멋들어진 레스토랑도 아니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하던 식당을 이어받고 싶다니 박수치며 환영할 상황은 아니었다. 특히 그 일이 얼마나 고된지 너무나 잘 알던 아버지가 허락했을 리 없다.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아버지는 아들의 청을 거절했다. 아들은 엄마에게 매달렸다. 차마 아들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김도영 사장은 그때부터 외식업에 관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공부를 하면서 김도영 사장은 충격을 받았다. '역전회관'은 3대를 잇고도 성장에 큰 뜻이 없었는데, 고작 역사가 10~20년 된 식당들이 자부심을 갖고 가게를 확장하면서 어마어마한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

    "그때 생각했죠. 내가 그동안 세상을 몰랐구나, 너무 바보처럼 살았구나 싶었어요."

    그때부터 '역전회관'을 단지 아들 부탁 때문이 아니라 지켜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김도영 사장이 식당을 해보겠다고 나섰을 때 누구보다 말린 사람은 남편이었다. 외식업의 '이응'자도 모르고 카운터에서 돈 한 번 안 받아본 사람이 무슨 외식업을 하겠냐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확신과 자신감이 있었기에 남편을 설득하고 싸웠다. 결혼 이후 그때처럼 격렬하게 싸운 적은 없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투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남편이 너무 반대해서 마지막에 내놓은 카드는 이혼이었어요. 이혼하고 위자료를 받아 가게를 하겠다고 협박했더니, 남편이 수그러 들었어요."

    그 정도 결심이라면 '그래 한 번 해봐라'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 젊은 손님들이 인정한 맛

    마포에 새 둥지를 튼 역전회관은 용산점과 2년간 병행했다. 용산점의 후광에 힘입어 마포점은 저절로 굴러갈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지만 되레 그것은 걸림돌로 작용을 했다. 일단 맛이 달랐다.

    "같은 고기에 같은 양념, 같은 주방장이 요리하는데도 용산 가게와는 맛이 다른 거예요."

    도대체 어디서, 뭐가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남편은 물론이고 수십 년간 '역전회관'을 지켜온 주방장조차도 그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다.

    혹시 불 때문인가 싶어 마포점에서 양념된 고기를 용산점으로 가져가서 구워보고 거기서 굽던 고기를 조금 남겨서 다시 마포점으로 갖고 와 구워보기도 했다. 하루에 몇 번씩 용산과 마포 식당을 오가면서 같은 맛을 내려고 해봤지만 허사였다.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그 과정은 10개월 이상 이어졌다.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다가 큰 돈을 투자한 상황이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안 하던 식당 일을 하려니 몸도 죽을 것처럼 고되고 힘들었다. 스트레스와 고단함은 몸으로 나타났다. 온 몸이 곪고 터졌다. 하지만 모두가 쌍수 들고 반대하는 걸 우겨서 한 일이라 힘들다 아프다 하는 소리는 입도 벙긋 못했다.

    오픈하고 1여 년 동안 고행도 그런 고행이 없었다. 그 넓은 공간에 하루 한 테이블이 있을까 말까였다. 그 중에서 제일 무서웠던 것은 오랜 단골손님이었다. '이 집이 그 집 맞냐?', '가짜 아니냐?' 매서운 소리를 할 때면 죄 지은 것도 없는데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지난 한 시간을 보낸 후에야 해답을 얻었다. 이유가 뭐였을까? 그것은 바로 고기의 숙성 온도와 불의 온도 그리고 식당 내 습도였다. 용산 식당은 도시 한복판에 위치해 있는 데다 높은 건물이 없어서 습도와 온도 차이가 났던 것이다.

    "오래된 가게들이 섣불리 이사하면 안 된다는 말이 그냥 하는 게 아니었어요."

    하다 못해 공중에 떠도는 균과 공기도 음식 맛을 좌우할 수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단다.

    그렇게 용산시대가 끝나고 마포시대가 열렸다. 다행히 용산 때보다 장사가 잘 됐다. 특히 노포의 약점이라 할 수 있는 젊은 손님이 늘어나고 있다는 건 최고의 수확이었다.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 시아버지가 나를 "김 사장"이라고 불러주었다

    반대했던 시부모님도 무척 만족스러웠을 터. 20년 이상 가게를 이끌어온 아들도 사장이라고 부르지 않던 아버님이 어느 날 '김사장'이라고 불러줬을 때 그간 말 못하고 혼자 힘들었던 시절이 떠올라 눈물이 핑 돌았다. 세상 물정 모르던 며느리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평생 식당으로 잔뼈가 굳은 그분들이 모르실 리 없다.

    그러나 남편이 없었다면 지금의 '역전회관' 역시 없었을 거라고 말한다.

    "일은 제가 다 벌려놓고 뒷감당은 남편이 다 해줬죠(웃음). 남편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남편은 가게를 물려받기 전 쓰레기 치우기, 접시 닦기, 바닥 닦기 등 허드렛일만 10년이나 했고 아버지가 그랬듯이 쉬는 날 없이 일을 했다.

    "그때는 남편이랑 저녁 한 끼 먹는 게 소원이었어요. 아이들 키우면서 함께 어딜 놀러 가본 적이 없으니 아이들 소원도 마찬가지였죠."

    그런 신한식 씨가 있었기에 '역전회관'은 지금껏 지켜지고 있다. 모든 공이 김도영 사장에게 돌아가고 있지만 그의 말대로 용산시대를 마포시대로 성공적으로 이끈 진정한 공로자는 남편이다.

    역전회관 창업자 신진우, 홍종엽 부부는 지금도 일주일에 서너 번은 가게에 나와 음식 맛이며 빛깔까지 깐깐하게 챙기고 아니다 싶으면 쓴 소리를 서슴치 않는다.

    "두 분이 살아계신 것 자체가 저에게도, 역전회관에도 대단한 행운이죠."

    식당을 물려준 부모는 '항상 음식 간을 직접 보라'고 당부하셨다. 같은 공장의 고추장도 계절 따라, 시기 따라 맛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김도영 사장이 식당에 나오면 음식 간부터 보는 이유다.

    이 모든 일에 첫 삽을 뜨게 한 그의 아들은 군 제대 후 미국 CIA요리학교에서 호텔경영학을 공부하고 얼마 전 '역전회관'으로 돌아왔다.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맨 밑바닥부터 차근히 배우도록 할 작정입니다. 이론 공부도 중요하지만 장사는 실전이니까요."

    그도 잘 몰랐을 때는 남들처럼 크게 키우고 싶은 꿈도 있었지만 실전에서 배운 교훈은 한식의 맛은 일관성을 지키기 힘들다는 것이다.

    "대를 이을 식당인데, 반짝 돈 벌고 끝낼 수는 없죠. 시부모님이 지금까지 지켜왔던 것처럼 저도 잘 지켜서 아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고 싶어요."

    이것이 김도영 사장의 꿈이다.

    (사진=도서출판 정한책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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