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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2월 24일, 환영인사 안했다고 민간인 학살"



사회 일반

    "1949년 12월 24일, 환영인사 안했다고 민간인 학살"

    -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 석달부락
    - 빨치산도 공비도 주변에 없었고
    - 주민들은 군경작전에 협조했지만
    - "환영"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민간인학살
    - 미군, 사태파악 후 처벌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 이승만 정부, 처벌 대신 은폐와 조작
    - 겨울방학식 마치고온 초등학생들도 학살
    - 당시 경찰최고간부 "국가가 이제라도 위로해야"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6월27일 문경 양민 집단 학살사건 현장에서 ‘진실규명 결정 보고대회 및 고유제’(위)를 개최했다. (사진=문경시청 제공)

     



    ■ 방 송 : FM 98.1 (18:30~20:00)
    ■ 방송일 : 2016년 6월 24일 (목) 오후 7시 5분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정희상 기자(시사인)

    ◇ 정관용> 여러분 문경양민학살 사건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1949년 12월 24일이니까요. 6.25 한국전쟁 터지기 전이죠. 공비를 토벌 중이던 군인 70여 명이 경상북도 문경군의 한 마을에 들어가서 마을주민 136명 가운데 모두 86명을 학살한 이런 사건입니다. 그동안 철저히 은폐되어 왔었어요. 오로지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진실규명을 위해 애써왔었는데 당시 그 사건의 유족인 채의진 선생님, 그리고 시사인의 정희상 기자 이런 분들이 몇 안 되는 분들입니다. 이번에 이 두 분께서 제6회 진실의 힘 인권상을 타게 됐다고 하네요. 그래서 오늘 정희상 기자를 스튜디오에 초대를 했습니다. 정 기자 어서 오십시오.

    ◆ 정희상> 네, 안녕하십니까?

    ◇ 정관용> 진실의 힘 인권상, 진실의 힘은 어떤 단체죠?

    ◆ 정희상> 군사정권 시절에 고문 피해를 입으신 분들이 나중에 국가를 상대로.

    ◇ 정관용> 배상 받았죠?

    ◆ 정희상> 네, 배상을 받은 그 기금으로 조성한 그런 인권 차원의 재단을 만든 단체입니다.

    ◇ 정관용> 맞아요. 제6회 수상자 되신 것 우선 축하를 드리고 문경양민학살사건. 우리 정희상 기자는 처음에 이걸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 정희상> 양민학살이라고 보통 우리 국민이 표현하는데 정확하게는 민간인 학살이라고 해야죠. 한국전쟁 전후에, 그러니까 1948년 정부수립 전후부터 해서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이 정전되기까지 그 기간 동안에 일어났던 비무장 민간인들의 집단학살 사건에 대해서 4.19 이후에 최초로 전국에 걸쳐서 발로 뛰어서 취재를 해서 1989년이었습니다, 그때가. 4월 혁명이 약 30년 지나서였는데.

    ◇ 정관용> 그러다가 ‘아, 문경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구나’ 하는 걸 아시게 된 건?

    ◆ 정희상> 그때 당시 89년에 경북지역 또 경남지역, 전남지역, 지리산 지역 이런 일대에 자연부락들에 무수히 많은 민간인 집단학살, 현장들을 찾아다니고 발굴하고 했습니다만 문경지역 같은 경우는 전쟁 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1949년 12월 24일날 사건이 일어나거든요. 평화로운 시기에 평화로운 마을에 지나가던 국군부대가 가공할 야만적인 학살을 저지른 거죠. 남녀노소 주민 86명을 사냥 연습하듯이 이렇게 학살시킨 그런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에 대해서 알게 됐던 것은 그때 1989년 당시에 국회기록 중에서 4.19 직후에 잠깐 피해자들이 진정을 내서 조사한 기록이 있었습니다. 그 부분을 추적에 들어가서 알게 돼서 현장에 방문해서 채의진 선생님도 만나고.

    ◇ 정관용> 유족을 만나시고. 아니, 정말 전쟁도 전에 평화로운 시기였는데 군인들이 그 마을이 왜 갔던 거예요? 제가 아까 공비토벌 중이라고 말했는데 맞습니까?

    ◆ 정희상> 그 지역은 그런 지역도 아니었습니다. 지리산이라든지 혜문산, 불갑산 이런 지역은 공비토벌, 소위 말하는 게릴라, 빨치산이 있어서 토벌한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태백산맥 일대는 이미 48년까지 토벌이 끝난 상황이었습니다. 그 학살당한 당시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 석달부락이었는데요. 거기는 136명 정도의 주민이 살고 있었고요. 그 사람들은 그 주변에 어떠한 빨치산이든 공비든 있지 않았고 그런 상황에서 그 전 해에 마지막 토벌을 했답니다, 그 지역에. 그래서 그랬을 때 군경의 작전에 협조했던 그런 마을주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확인 없이 생존자들 증언은 그래요, 기억은. 국군이 지나가는데 환영해 주지 않는다 해서 빨갱이 마을이 틀림없다 해서 확인도 없이 학살했다는 겁니다.

    ◇ 정관용> 뭐라고요? 환영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 정희상> 나와서 환영해 주지 않는다, 반기지 않는다.

    ◇ 정관용>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데요.

    ◆ 정희상> 그러니까 그때 그러한 가공할 학살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인권의식도 없고 일부 군부대 내 그리고 예전에 우익청년단체들 같은 경우 서북청년단이나 또 북에서 내려온 이런 일부 우익청년단원들 같은 경우는 북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복수심에 불타서 산간부락 마을 지나가다가도 그런 식으로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을 저지르고.

    ◇ 정관용> 이유도 없이?

    ◆ 정희상> 네.

    ◇ 정관용> 믿어지지가 않네요. 지금 말씀 들어보면 48년도까지 그 태백산맥 일대에 공비토벌은 끝났었다? 그것도 49년 들어서서 연초도 아니 12월 24일이니까 연말이에요. 그럼 거의 한 1년여 동안은 군부대가 그 마을을 수시로 왔다 갔다 하거나 그런 것도 아니라는 것 아니에요?

    ◆ 정희상> 네, 그랬습니다.

    ◇ 정관용> 아주 한참 만에 그 마을에 왔다는 것 아닙니까?

    ◆ 정희상> 네.

    ◇ 정관용> 그런데 환영해 주지 않는다?

    ◆ 정희상> 그래서 다른 어떤, 물론 민간인학살이 어떤 지역에 따라서 차별을 하거나 달리 보아서는 안 될 전쟁범죄이겠으나, 비무장 민간인을 학살한다는 것은. 그러나 여기는 어떠한 궁색한 이유라든지 변명도 통하지 않는 그야말로 광기어린 집단학살극이었고.

    ◇ 정관용> 혹시 마을 뒷산에 공비 몇 명이 숨어 있었다든지 그런 것도 없어요?

    ◆ 정희상> 전후로 전혀 그런 것도 없고 그런 기록도 없고 미군이 기록을 했습니다, 그 사건을. 당시 주한미임시고문단이 한국에 주둔해 있으면서 이 사건을 굉장히 주목해 봅니다. 그래서 자체적으로 그때 로버츠 준장이었는데 진상조사단을 파견을 합니다. 조사를 해서 그 기록을 동경에는 맥아더 사령관에 보내고 또 거기선 미국 본국으로 보내고. 그래서 그게 기밀문서였는데 1990년대 후반에 기밀해제가 된 게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나와서 저희가 입수를 했죠.

    ◇ 정관용> 그랬더니 그 기록에 의하면 공비 이런 것도 전혀 없다? 그 미군 측의 진상조사는 가해자인 군인들도 조사를 했나요?

    ◆ 정희상> 네. 다 했고 명단도 다 나와 있습니다, 가해자.

    ◇ 정관용> 그런데 그 군인들이 그러니까 뭐라고 진술했다는 거예요, 거기에 의하면? 왜 그랬냐고 물었을 것 아닙니까?

    ◆ 정희상> 그러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미군이 사건을 수사한 게 아니고 사건 진상을 조사해서 어떤 부락의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학살당했다, 그런 내용들이 나오고요. 그다음에 사건가해부대가 나오고 그다음에 군경의 작전에 그 전에 두 차례나 협조했던 주민들이었기 때문에 이런 무차별 학살한 데 대해서 한국의 당시의 이승만 정부가 학살 가해자들, 군부대 지휘관들을 처형을 할 걸로 이렇게 미국 정부는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엄격한 수사와 처벌 대신에 은폐와 조작을 택한 거죠. 공비들이 내려와서 학살됐다고 호적은 둔갑시키고

    ◇ 정관용> 그 은폐 부분은 좀 이따 따져보고 어쨌든 미군 진상조사단은 가해자인 군인들의 명단까지를 적어놨지만 그들은 면담해서 왜 그랬는지 인터뷰하거나 이런 것도 없다, 조사한 내용도 없다?

    ◆ 정희상> 네, 그 부분은 그때...

    ◇ 정관용> 혹시 정희상 기자도 그 가해자인 군인 가운데 누구 혹시 만나거나 그런 적 없습니까?

    ◆ 정희상> 1명은 찾아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토벌했다고 자랑을 하다가 그때 민간인들 학살했다라고 하자 기억이 안 난다고 그러면서 이제 발을 빼고 이런 과정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때 1996년경에 그 가해자 1명을 지휘관을 찾아내서 하급지휘관이었죠. 아마 분대장 정도 됐었던 것 같습니다. 찾아내서...

    ◇ 정관용> 그런데 물어봤더니 기억이 안 난다?

    ◆ 정희상> 처음에는 그 마을 작전 아주 쉽게 해서 딱 포위해서 전멸시켰다고 얘기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린애와 갓난애, 할머니 부녀자들이 주로 학살당했는데요’ 그랬더니 ‘아, 부하들이 한 일이라 기억이 안 납니다’ 그러면서 자기 군적도 소멸해서 지금 국방부에 안 남아 있을 겁니다라는 식으로 목소리가 떨리면서 피하더라고요. 처음에 얘기를 털어놨던 건 제가 기자라는 얘기를 안 했기 때문에 아마 종군작가인 줄 알고 자기 공적을 기록하는 줄 알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 정관용> 그러면 아무튼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환영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빨갱이 마을이다. 그래서 군인 70명이 들어갔다는 거죠?

    ◆ 정희상> 그렇죠.

    ◇ 정관용> 어떻게 했다는 겁니까?

    ◆ 정희상> 가서 그날 정오 무렵에 그러니까 점심때쯤 무렵에 군부대 70여 명이 그 마을을 지나가다가 군인이 지나가는데 아무도 나와서 반기지도 않고 환영도 안 해 준다 해서 이거 수상한 마을이다 해서 전부 집집마다 돌면서 사람들 불러내서 나오라고 마을 앞 논두렁으로 불러냅니다. 그리고 집에는 불을 지르고.

    ◇ 정관용> 모든 집에?

    ◆ 정희상> 네, 전 가옥을 불을 지르고 가재도구까지 다 태우고 언덕에 기관총과 바주카포 이런 무기들을 설치해서 마을 주민들을 불러놓은 논두렁에 집중포화를 퍼붓습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학살을 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학살을 마친 군인들은 다시 마을 동편에 산이 있는데 산을 넘어가면 거기에 김녕초등학교가 있습니다. 그때 당시에 마을 어린이 14명이 방학식날이었습니다, 겨울 방학식날. 방학식을 마치고 일찍 하교를 하는데 그들을 불러서 또 집단으로 하교하는 어린 학생들까지 다 사살을 합니다.

    ◇ 정관용> 초등학생들까지?

    ◆ 정희상> 네.

    ◇ 정관용> 아이들이 학교를 갔다 올 거란 걸 알고 일부러 간 거군요, 그러니까.

    ◆ 정희상> 네, 그렇죠. 그러니까 믿기지 않은 끔찍한 야만적인 학살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랬기 때문에 당시 미군 당국에서 이건 처형되어야 될 사건으로 기록을 했었던 것 같고요. 그다음에 당시에 정부가 알았습니다, 이 사실을. 그래서 서울경찰국 보안과 정보형사들 두 명이 바로 파견 됩니다. 실상을 조사하러 그 조사기록도 국내에 없는데 그 조사 기록을 미군이 입수해서 미국 본국에 보냈습니다.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소에 있는 문서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 경찰조사, 서울에 내려간...

    ◇ 정관용> 그 경찰조사에는 또 군인들 조사한 내용이 있습니까?

    ◆ 정희상> 군인들은 조사, 왜냐하면 그때 가해부대는 숨겼고 군부대 그때 2사단이었거든요. 2사단 25연대, 2대대 7중대였는데. 안동에 주둔하던 2사단 사단장에 대해서는 이 사건을 이유로 내부적으로 보직해임을 시켰다는 이런 게 미군 기록에 나옵니다. 그리고 당시에 초대 국방부장관인 신성모 장관이 사건 보름 후에 내려옵니다, 그 지역에. 내려와서 유가족들, 생존자들을 불러 모아서 위로 연설을 하는데 위로 연설을 하면서 지금 생존자들 기억은 그렇습니다. 몇 년 전에 제주도에서도 이런 사건이 나고 여수, 순천에서도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데 슬프다고 하면서 우는 시늉까지 하면서 이 사건 진상을 밝히고 처벌하고 이런 대신에 공비들이 한 걸로 둔갑을 시킵니다, 학살을.

    ◇ 정관용> 위로연설을 하면서?

    ◆ 정희상> 하고 나서 신 장관이 돌아간 뒤로. 다 집을 불태웠기 때문에 신 장관 당시에 문경군수가 이의승 군수였더라고요. 이의승 군수에게 당시 돈 100만원을 주고 갑니다. 다 태워 버린 집들, 아래쪽에 이 돈으로 집을 지어서 산 사람은 살게끔 하라. 그래서 한 가구당 당시 16만원 정도 돌아가는 그걸로 토담집을 짓고 학살 사라진 마을 아래에서 그 피해자들이 지금까지 살고 있는 거죠.

    ◇ 정관용> 그렇게 해놓고는 올라가서는 이건 공비들이 한 짓이다라고 둔갑을 시켰다? 군인이 한 게 아니고?

    ◆ 정희상> 네. 그 기록은 호적에도 지금까지도 공비가 출몰해서 총살, 마을주민을 총살한 것으로 이렇게 기재되어 있고요. 그다음에 미군 기록에 미군에도 한국군 3사단이 보고를 해오기를 공비 70명이 나타나서 마을을 학살을 했다라고 보고를 한 겁니다, 미군에게. 그때 당시에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장이었던 로버츠 준장은 굉장히 중시합니다, 이 사태를. 왜냐하면 당시에 공비, 소위 말하면 게릴라, 빨치산들이 민간인을 집단학살할 정도로 그런 적이 전례에 없었기 때문에 이건 굉장한 전술 변화라서 우리 대응도 바뀌어야 된다 하는 측면에서 사실 여부를 조사를 시킵니다. 그래서 조사가 이루어졌던 겁니다.

    ◇ 정관용> 그랬더니 이건 공비가 아니라 군인이다?

    ◆ 정희상> 공비한테 뒤집어씌우고 언론 보도는 전혀 나오지 않았고. 국민에게 학살의 전말을 숨기기를 이승만 정부가 강력하게 바라고 있고 이런 내용들이 미군 문서에 쭉 나옵니다.

    ◇ 정관용> 어처구니가 없네. 그런데 학교 갔다 돌아오는 초등학생들까지 일부러 찾아가서 그렇게 학살을 할 정도면 136명 가운데 86명이 사망했다고 그랬다면 그래도 상당 부분 목숨을 건지신 분들이 있잖아요?

    ◆ 정희상> 네.

    ◇ 정관용> 그분들은 어떻게 살아나올 수 있었나요?

    ◆ 정희상> 그러니까 지금 문경유족회장이 이번에 공동수상하신 채의진 선생님도 그런 경우인데 당시에 13살로써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모양입니다. 다른 친구들하고 하교하는 길에 산으로 올라오는 군인들을 본 거죠. 마을에 불 질러놓고 학살해 놓고 산으로 오던 군인들을 보았죠. 그때 마침 채의진 씨 형님하고 몇몇 장정들이 문경중학교를 새로 설립한다 해서 국민들이 벼 한 말씩 공출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거를 큰 마을 동에 짊어다 주고 지게만 지고 돌아오는 길에 조우한 거죠. 그 군인들과 어린학생들과 동에 갔다 오던 형님하고. 형님이 당시 마을 이장이었답니다, 채의진 선생님 형님이. 그래서 군인들이 다 마을을 학살하고 온 것을 알고 울면서 군인들에게 ‘이유나 알고 죽읍시다. 왜 우리를 이렇게, 우리 마을을 학살합니까?’라고 했더니 바로 그 자리에서 형님을 사살했다는 거예요. 그 말대꾸했다고. 바로 사살하면서 그때 형님이 쓰러지면서 채의진 어린 동생을 안고 쓰러졌던 모양입니다. 형님만 총상을 많이 입어서 사망을 하고 구사일생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난 거죠, 어린 학생이었던 채의진 선생님은. 그리고 마을 논두렁에서도 사실 그런 마지막 처참한 순간에도 할머니는 자기 손주를 껴안고 또 자기 아들을 껴안고 이렇게 학살을 당하고 총을 맞았기 때문에 일부는 부상만 당한 채 가슴 안에서 살아난 어린애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래서 확인사살까지 했는데 그때 확인사살을 피한 사람들이 몇몇 살아 남았었고요.

    ◇ 정관용> 확인사살은 어떻게 했다는 거예요?

    ◆ 정희상> 총을 맞고 신음을 하고 있거나 이런 경우 일일이 다니면서 확인사살을 했다고 그럽니다. 갓난아이 4명 포함해서 15살 미만 어린애가 10명이 넘습니다, 피해 학살된 주민들 중에서. 인간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야만과 광기에, 더군다나 어떤 그 지역 자체가 교전이 있었다거나 혹은 그 전에 군부대에 피해를 입혔다거나 한 것도 아닌데. 그래서 미군도 그렇게 굉장히 격노를 하면서 그런 보고서를 썼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 정관용> 살아남은 그 가족 분들은 그동안 어떻게 살아오셨을까요?

    ◆ 정희상> 이루 말할 수 없는 피폐한 삶이었죠. 대가 끊긴 집도 6가구인가 됐고요. 아예 이제 멸문해 버린 가족이죠. 전원이 학살당해서. 그리고 이제 드물게 한두 명씩 살아남은 집 같은 경우는 어린 학생들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부모들이 다 돌아가시고 그랬기 때문에 그 길로 고아가 돼서 걸어서 서울까지 와서 서울에 있는 구세군 급식소에서 꿀꿀이죽을 얻어먹으면서 이렇게 생존을 영위하고 전쟁을 겪기도 하고 그랬지만 그렇게 해서 학업은 다 끊겼고 그런 속에서 아직도 점촌읍이나 이런 데에 리어카를 끌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증언들을 하시고 그랬는데요. 그중에 보기 드물게 채의진 선생님 같은 경우에는 학업을 계속 하셨습니다. 상주 중·고등학교를 거쳐서 서울물리사범대 영문과를 나와서 영어교사를 하십니다.

    ◇ 정관용> 형님뿐 아니라 부모님도 그때 다.

    ◆ 정희상> 아버지는 할머니를 업고 나오셨다가 할머니가 사실은 총알받이가 되는 그런 결과가 돼서 아버지는 부상만 입고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하고 채의진 선생님하고 그 둘은 그 뒤에 외갓집에 가서 생활하고 했다 그러더라고요.

    ◇ 정관용> 그런데 이승만 정권은 이건 공비 짓이다라고 해서 진상을 은폐해버렸고.

    ◆ 정희상> 그렇죠.

    ◇ 정관용> 그리고 아까 잠깐 언급하셨습니다만 4.19 직후에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가 있었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게 또 유야무야됐나요?

    ◆ 정희상> 그렇죠. 4.19 직후에 전국 각지에서 그렇게 억울한 사건들이 많았지 않습니까? 집단학살 당한 그 유족들이 억울함을 풀어 달라. 그리고 제대로 유해라도 찾아서 땅에 묻고 모시게 해달라라고 그리고 책임을 져 달라라고 새로 들어서는, 그러니까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지 않습니까, 4.19와 함께. 민주당 정부에게 요청을 하고 그래서 국회에서 진상조사단이 꾸려져서 전국에 몇 지역들이 다닙니다. 그중에서 문경에도 자유당, 민주당 두 국회의원이 다녀갔어요. 그리고 그 일이 있기까지는 채의진 선생님이 당시에 서울물리사범대 2학년이었다고 합니다, 4.19 때. 그때 휴학계를 내고 이제야 우리 마을사람들, 우리 가족... 9명을 잃었거든요, 채의진 선생님 가족. 가족의 억울한 원한을 풀 수 있겠다 해서 검찰총장, 대통령, 국회의장 이런 각계의 지도자들에게 탄원서를 냅니다. 그래서 국회에서 조사가 나왔었고. 5.16 쿠테타가 일어납니다. 쿠테타가 나면서 사실은 당시에 전국의 민간인 피해학살 유족들은 나름 박정희 새 정부에게 기대를 한 부분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왜냐하면 박정희 대통령의 친형인 박상희 씨가 사실 학살당한 그때 선산군 인민위원장, 대구 폭동이라는 그 사건 때 인민위원장으로 있다가 미군과 경찰에 의해서 총상을 당했거든요. 그분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형이고.

    ◇ 정관용> 그래서 기대를 했는데 그런데 어떻게 됐어요?

    ◆ 정희상> 김종필 씨의 장인어른이죠. 기대를 했는데 그 뒤에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전부 전국에 억울한 피해를 당했다고 진정 낸 사람들이든 유가족이든 혁명포고령 위반으로 해서 전부 금고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전국의 유골들을 수습해서 봉분을 만들거나 비석을 세워놓은 지역에 대해서는 전부 파헤치고 비석 깨뜨리고 파묻고 유골들은 전부 봉분을 파헤쳐서 화장해서 뿌려버리고.

    ◇ 정관용>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있었지 않습니까?

    ◆ 정희상> 그렇죠.

    ◇ 정관용> 거기서 이 문경학살사건도 조사했나요?

    ◆ 정희상> 그렇죠. 조사했죠.

    ◇ 정관용> 아까 1948년 정부수립 전후부터 53년 휴전 때까지의 이른바 민간인 학살, 전국 도처에서 여러 사건들이 있었다 하지 않았습니까? 전체 피해의 규모를 몇 만 정도로 봐야 됩니까?


    ◆ 정희상> 최대 1백만명 안팎으로 추산되는. 그리고 가해 당시에 군부대나 치안총수들도 만나러 다녔습니다. 왜 학살했는가. 그랬을 때 그 사람들도 1백만명은 줄잡아 보아야 될 거라고 얘기를 하더군요. 당시에 부산 임시 수도 있을 때 이승만 정권이 전쟁 시기에 내려가 있었지 않습니까? 그때 치안총수가 당시 경남 도경국장입니다. 그분을 만났더니 자기가 치안총수였지만 일제 때 고등경찰하던 독립군 고문하고 잡던 그런 자질 없는 경찰관들이 실무진들로 초기에 많이 경찰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통제가 안됐다. 그래서 억울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난 건 사실이다. 지금이라도 국가가 위로하고 위령을 해야 될 것이다라는 얘기를 일말의 양심적인 얘기를 해줘서 또 알게 되고 그랬습니다.

    ◇ 정관용> 백만 문경민간인학살사건, 정말 끔찍한 진상을 오늘 좀 낱낱이 이야기 들었습니다. 참 애 많이 쓰셨고요. 다시 한 번 진실의 힘 인권상 수상 축하드립니다.

    ◆ 정희상> 마음이 무겁습니다. 아직도 해결해야 될 미완의 숙제입니다, 이 부분은.

    ◇ 정관용> 고맙습니다.

    ◆ 정희상> 감사합니다.

    ◇ 정관용> 시사인에 정희상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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